'개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격언은 맞다
'개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격언은 맞다
  • 정한욱
  • 승인 2018.11.27 0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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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야콥 폰 윅스퀼, 도서출판 b, 2012년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야콥 폰 윅스퀼, 도서출판 b, 2012년

그 자신이 중심을 이루는 고유한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주체이며, 

기계라기보다는 기계를 관리하는 기술자에 비유될 수 있다.

에스토니아 출신 생물학자 야콥 폰 윅스퀼(Jakob Johann von Uexkuüll, 1864~1944)이 1934년에 펴낸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환세계(環世界 Umwelt)’ 라는 혁명적인 개념을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생물학의 고전이다. 그는 이 책에서 모든 동물 주체는 객관적인 환경 속에서 스스로에게 의미가 있는 일부분만 인식해 주관적으로 구축한 현실인 ‘환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 살아나간다고 주장한다. 생명체는 단순히 자극에 반응하는 자동기계가 아니라 “그 자신이 중심을 이루는 고유한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주체이며, 기계라기보다는 기계를 관리하는 기술자에 비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동물에게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환경’이 아니라 주체인 동물이 의미를 부여하고 구축하는 ‘환세계’이며, 자연에는 하나의 객관적인 환경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동물 주체가 구축하는 다양한 환세계가 존재할 뿐이다. 또한 서로 다른 지각의 틀에 기반을 두고 구축된 인간과 배추흰나비와 개의 세계와 현실, 즉 환세계는 각기 완전히 다르다. 어떤 동물의 주변에 아무리 다양한 환경이 존재하더라도 자신의 환세계에 없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동물들의 환세계는 다채로운 인간의 환세계에 비해 훨씬 빈약하고 초라하지만, 그 빈약함이야말로 생존이나 번식과 같이 의미 있는 행동을 효율적으로 유발하는 확실하고 강력한 조건이 된다. 

유물론과 실증주의가 지배하던 당대의 풍토에서 “곤충이나 동물의 눈으로 본 주관적인 세계”나 “주체가 의미를 부여한 것만이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다”와 같은 혁명적인 생각은 철 지난 유심론으로 취급당한 채 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으며, 저자인 윅스퀼 역시 오랫동안 주류 과학계에 자리잡지 못한 채 재야 학자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윅스퀼의 이론은 동물행동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선구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하이데거나 카시러와 같은 당대의 철학자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인식에서 주체의 역할을 강조하는 ‘환세계’ 개념은 그가 이 책에서 직접 밝힌대로 칸트 인식론의 생물학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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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동물학자인 히다카 도시다카는 왁스퀼의 환세계 개념을 알기 쉽게 해설한 책인 『동물이 보는 세계, 인간이 보는 세계』에서 동물들의 환세계는 지각의 틀에 의해 한정되지만, 인간은 이를 넘어 논리와 개념을 통해 또다른 환세계(저자는 이를 일루전이라고 표현한다)을 구축해 그 안에서 살아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본능과 지각에만 바탕을 두고 있어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항상 동일할 수 밖에 없는 동물의 환세계와는 달리, “어떤 환상도 품을 수 있는” 인간은 지금까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일루전을 만들어 왔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과학의 도움으로 지각으로 알 수 없는 영역으로까지 인식의 범위가 확장됨에 따라 새로운 일루전을 바탕으로 구축되는 인간의 세계 역시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지금까지 구축해 온 환세계 혹은 일루전이야말로 유일하게 가능한 현실이자 진리라고 굳게 믿은 나머지 어떠한 종류의 변화도 완강하게 거부하는 모든 형태의 근본주의자들은 변화가 불가능한 동물의 환세계에 스스로를 가둔 채 영원한 징역을 살고 있는 "자발적 비인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윅스퀼의 ‘환세계’ 개념을 접하면서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엉뚱하게도 “개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옛 격언이었다. ‘환세계’를 어떻게 이보다 더 기막히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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