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내레이터들 - 그 존재의 의미
성경의 내레이터들 - 그 존재의 의미
  • 김영웅
  • 승인 2018.11.16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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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알 수 없는 분', 꽃자리, 2016
곽건용, '알 수 없는 분', 꽃자리, 2016
곽건용, '알 수 없는 분', 꽃자리, 2016

난 모세오경의 저자가 진짜 모세인줄 알았다. 물론 그 40년간의 광야생활에서 어떻게 기록이란 걸 했을까 의아하게 여기기도 했었고, 정말 그게 가능했을까 하며 의심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의심은 언제나 그리 오래 가질 못했다. '그래도 하나님은 못 하시는 게 없잖아...'하며 매번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상상의 나래를 스스로 싹둑 잘라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이,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덮어놓고 믿는 맹목적 믿음을 부추기는 가장 강력한 소스로 작용했던 것 같다.

교회를 30년 가량 다녔지만, 아무도 내게 정확한 사실에 대해서 말해준 사람이 없었다. 성경을 배우며 읽다가 의문이 생겨도, 질문을 하는 건 왠지 무례한 것 같았다. 괜히 삐딱하게 보여서 빨간색으로 낙인 찍혀봤자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도 난 인간이었기 때문인지 그렇게 계산을 했던 것 같다. 그러는 사이에 교회에서의 나의 유년시절과 청소년시절, 그리고 청년시절이 "거룩하게 별 탈없이"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 때문일까. 난 대학교에 가자마자 한동안 교회를 떠나게 된다. 암묵적으로 "거룩을 강요당했던" 신앙생활은 대학이라는 자유 앞에서 순식간에 무너졌다.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좋아 보이는 신앙생활도 결국은 약간의 틈새에도 무너질만큼 강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두 가지 가능성밖엔 없는 것 같다. 그들도 몰랐거나, 알았지만 숨긴 거다. 난 둘 다 맘에 들지 않는다. 둘 다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몰랐다는 건 그나마 애석한 마음이 들기라도 하지만, 숨겼다는 건 그 자체로 기분이 나쁘다. 아니, 자기 사생활도 아닌 것을 왜 숨겼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만약이라도 내 믿음과 신앙생활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 같다며, 나름 배려의 차원에서 그 사실을 숨겼다고 애써 상상해 줄 수도 있지만, 글쎄, 그렇게 숨기고 포장해야만 믿음이 잘 자라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거라면, 그것이 과연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 바른 믿음과 바른 신앙생활을 위한답시고 그것들의 원천인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고 숨긴다면, 그게 바로 모순이 아닐까. 거짓을 동원하거나 무지해야만 진리를 지킬 수 있다는 논리가 도대체 말이 되느냔 말이다.

물론 성경의 저자와 성경이 쓰여진 시기가 왜 중요하냐고, 그냥 교훈만 뽑아내면 되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진 않다. 교훈만 뽑아낼 거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은 성경을 굳이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엔 교훈거리가 되는 책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그 많고 많은 교훈을 주는 책 중에 성경을 읽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며, 성경이 그 어떤 책보다 가장 좋은 교훈을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이 말이 되기 때문에 읽는 것도 아니고, 교훈을 얻기 위해 읽는 것도 아니고, 재미있기 때문에 읽는 것도 아니다. 성경을 읽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비록 성경을 여러 번 읽어도 결국 도달하는 결론은 '알 수 없는 분'이긴 하지만, 우린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목적과 약속, 그리고 성품을 알 수 있다. 교훈은 그 과정 중에서 파생되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경이 그 근원이다.

성경의 저자와 성경이 쓰여진 시기가 중요한 이유는 성경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내러티브를 기록한 자, 즉 내레이터의 존재를 비로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가 하나님이 하늘에서 구름 타고 읊어주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 쓴 기록물이 아니다. 더더구나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돌판에 새겨주신 십계명처럼 하나님이 번쩍하고 직접 써 주신 글도 아니다 (그렇다면 엄청난 양의 돌이 필요했을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은 어떤 인간, 내레이터가 쓴 부분이 많다고 한다.

 

성경을 원래 쓰여진 용도와 목적 이상으로 과하게 확대해석하여 문자 그대로를 우상화한다거나

성경책을 마치 신주단지처럼 생각하는 것 같은, 무늬만 기독교인 무속적인 신앙에서 탈피하자.

그렇다면 그 내레이터라는 작자는 어찌 모든 것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까. 하나님도 아니고 말이다. 그 답은 바로 성경이 쓰여진 시기에 있다.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노아, 바벨탑,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이야기가 나오는 창세기만 해도 그 각각의 이야기는 각각의 이야기가 진행되던 그 당시에 실시간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먼 훗날 각 사건의 결과와 그 결과가 미친 영향 등을 다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과거를 기억하거나 어떤 자료에 근거해서 쓴 글이다. 실제로 창세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기에 쓰여진 책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는 지금처럼 문서 작성/저장 도구가 미비했기 때문에 아마도 그 내레이터가 성경을 기록할 땐 분명히 내레이터의 주관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펜이 저절로 막 움직이며 양피지에 글을 술술 써내려 간 것처럼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효율을 고려했을 땐, 그럴 바엔 차라리 하나님이 다 써서 하사해 주시는 게 훨씬 나아 보인다. 또한 내레이터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할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한다. 사람의 기억은 한계가 있는 법이고, 주관이 반영되면 그 기억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을 인간의 소설책 정도로 격하시키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성경을 원래 쓰여진 용도와 목적 이상으로 과하게 확대 해석하여 문자 그대로를 우상화한다거나 성경책을 마치 신주단지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은 무늬만 기독교인 무속적인 신앙에서 탈피하자는 말이다. 무속적이고 이교도적인 신앙은 결코 거룩하신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이 아니며, 그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는 방법이 될 수 없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여전히 모세오경이 모세가 작성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문자주의, 근본주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창조과학을 주장하며 그에 반하는 모든 과학은 진화론이나 진화론의 열매이자 사단의 작품이라고 믿는 사람들과 혹시 한통속이 아닐까 싶다. 물론 어느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믿음은 성경의 저자가 누구냐에 따라 큰 영향을 받진 않을 것이고, 쓰여진 시기가 틀렸다고 해서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객관적인 사실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내레이터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성경을 읽는 데 또 다른 묘미를 선사한다. 하나님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죄를 부여한 유대인들이 정의했던 신성함 같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가짜 거룩함을 배제하고 그 컨텍스트에 맞게 읽고 해석할 수 있는 눈이 비로소 열리기 때문이다.

나야 이런 것들이 그저 여기저기서 주워듣고 아마추어적인 방법으로 공부하면서 알아가고 있는 지식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안의 의심을 애써 잠재우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의심을 존중하고, 그 의심에서 출발한 질문과 답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더 깊고 바른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을 증진시켜가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물론 내가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언제나 그랬듯 겸허히 받아들이고 고쳐나갈 것이다. 결코 어느 한 진영에 갇혀서, 질문과 의심의 싹을 잘라버리게끔 강요당하는 종자의 인간이 되고 싶진 않다. 그리고 어디 이뿐이랴. 기독교 안에는 얼마나 진짜인 것처럼 위장한 가짜 지식들이 판을 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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