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사랑?
성스러운 사랑?
  • 김영웅
  • 승인 2018.11.17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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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지드, 좁은문, 을유문화사

책에 몰입해보지 못했던 것도 아닌데,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을 만나기 전까진 독서하며 한번도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중학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엄마의 도움으로 "데미안"을 읽게 되면서 문학세계에 들어왔던 나는 문학고전들을 기회가 되는대로 읽기 시작했다. 당최 무슨 뜻인지도 몰랐던 단테의 신곡, 책보단 짧은 연극을 보고 나서야 조금 이해가 되었던 괴테의 파우스트, 지루하기만 했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길고 난해하여 여러 번 시도 끝에 겨우 마칠 수 있었던 도스트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책도, 뭔지 모를 의무감 반 호기심 반으로 읽어냈다.

내가 "좁은문"을 읽었던 시기가 그 어려운 책들을 읽고 난 이후인지 읽기 전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확실히 내 뇌리에 박힌 기억은 내가, 이 싸나이 김영웅이 독서하면서 울어버린 사건이었다. 그렇다. 난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나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에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 책의 앞 색지에다가 내가 처음으로 울었던 책이라고 써놨었던 것 같다.

데미안에 이어, 나이 마흔에 시작한 나의 고전 다시 읽기 시리즈의 그 두 번째 주인공은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이었다. 베드타임 스토리로 Calendar mystery 시리즈 중 September 편을 아들에게 끝까지 다 읽어주고 나서 느꼈던 깔끔함 때문이었을까. 아들을 재우고 나니, 퇴근 길 기차 안에서 읽다가 만 챕터의 나머지 부분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 챕터까지만 다 읽고 자려고 했는데, 그만 실패하고 말았다. 내가 눈물을 흘렸던 유일한 책이었던 탓일까. 지속되는 알리사의 편지와 제롬이 묘사하는 그녀의 이미지, 그리고 곧 닥쳐올 둘 사이의 비극이 너무나도 선명해져, 난 결국 알리사의 죽음을 두 번째로 맞이할 수 밖에 없었고, 또다시 비탄에 잠긴 채 겨우겨우 책을 끝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하녀가 등불을 들고 들어왔다."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유일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문장이다. 25년간 잊혀지지 않았던 문장. 심호흡을 했다. 비록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감정의 폭풍같은 것이 내 전신을 감쌌다. 시계는 벌써 자정을 가리켰지만 당장 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하녀가 등불을 들고 오기 전에 조금만 더 그 책 안에 있고 싶었다. 정리되지는 않지만 불현듯 마음 깊은 곳을 터치당한 것 같은 기분으로 그냥 그렇게 한동안 나 자신을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

왈칵 터져나오는 감정의 북받침이 책 곳곳에 나오지만,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적이기만 하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 차례의 감정의 폭풍 또한 고요함 가운데 있다. 고요한 폭풍이랄까. 그리고 책에 지속적으로 흐르는 또 다른 기운은 슬픔이다. 고요함과 슬픔. 아, 좁은문을 통과하는 길은 고요하고도 슬픈 것일까? 그래야만 하는 걸까?

25년 전에, 알리사의 죽음과 살아남은 제롬을 생각하며 눈물을 터뜨렸던 건, 어쩌면 내가 신앙이라는 게 무엇인지 지금보다 많이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해석해 본다. 지금도 그때처럼 책을 다 이해할 순 없다. 인간 사이의 사랑으로 인한 행복이 왜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적이 되어야만 하는지, 난 아직도 명쾌하게 답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이 마흔이라는 것은 분명 15살의 청소년과는 다른 것이다. 그렇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를 기억하며 아련함과 순수함을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그 아련함과 순수함의 출처가 무지일 수도 있겠다는, 참 재수없고도 늙어빠진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내가 어릴 적 그다지도 싫어했던 뭇 아저씨의

버릇없고 영혼없는 논리로 색안경을 끼고 잔소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알리사의 성스러운 길을 가고자 하는 그 고결한 뜻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마흔 살의 나는 한편으로 알리사를 책망한다. 비록 알리사가 병에 걸려 죽게 되어 그 이상 깊게 논쟁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알리사가 죽을 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난 분명히 망설이지 않고 바보라고 말해주었을 테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을 더 밝히 인도받는 것이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라면, 어찌 그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어 함께 그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있냐고 난 따질 테다. 그 좁은문은 결코 한 사람만 지나칠 수 있는 "종착역'의 의미보다는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그 길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들어가야만 하는 "시작점"의 의미이지 않겠냐고,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라고, 당장 그 볼품없는 어설픈 연극을 그만 두라고 큰 소리로 권유해볼 테다. 그 성스러운 길을 가는 길이 고행과 고독과 외로움으로만 가득 채워져야만 하는 거냐고, 왜 사랑하는 사람과 두 손 붙잡고 갈 수 없는 거냐고, 정 길이 좁다면 사랑하는 사람 등에 업혀서 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외쳐볼 테다.

하지만, 25년 전에도 그랬듯이 알리사는 혼자 요양원에서 외로이 죽어갔다. 그것은 스스로 준비한 죽음이었다. 의도적으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죽어갔다. 난 너무 속이 상했다. 제롬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알리사가 그렇게 매몰찬 연극을 해가면서까지 제롬으로부터의 사랑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시도들이, 마흔살의 내 눈엔 부질없고 어리석게도 보인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던 이유다. 아, 25년간 내가 너무 늙어버렸나. 나도 모르게 내가 어릴 적 그다지도 싫어했던 뭇 아저씨의 버릇없고 영혼없는 논리로 색안경을 끼고 잔소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지면서 난 불을 끄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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