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의책과일상] 눈먼 자들을 통해 본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김영웅의책과일상] 눈먼 자들을 통해 본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 김영웅
  • 승인 2018.11.23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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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해냄출판사, 2015년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해냄출판사, 2015년

‘산둥 수용소’에서 랭던 길키는 인간의 도덕성과 합리성을 충분히 넘어서며 그것들보다 더 깊이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이기심’을 보고한다. 그리고 그 ‘이기심’은 책에서 인간의 ‘죄’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그 책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비도덕적이고 비합리적인 방식도 취할 수 있으며 나중엔 그 행동까지도 합리화해버리는 존재였다. 인간의 관대함과 인격적 성숙이 한낱 껍데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그 껍데기 안에는 이기적이고도 위선적인 자아가 숨어있어 언제든 상황이 허락할 때면 즉시라도 고개를 쳐들고 큰 소리를 내어 단번에 인간의 몸과 마음을 장악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으면서 난 랭던 길키의 ‘산둥 수용소’가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두 책은 큰 차이가 있다. 하나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동일하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지만, 적어도 산둥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의 눈은 멀쩡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산둥 수용소에선 비록 강압적이었지만 외부세력이었던 일본군에 의한 질서가 적어도 존재하긴 했다는 것이다. 이 책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주무대로 나오는 수용소는 산둥 수용소에서 이 두 가지 차이를 제거하면 이해하기가 수월해진다. 외부의 개입이 없는, 눈먼 자들로만 이루어진 수용소. 생각해보라.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그 내부의 상황에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아주 기본적이라 할 수 있는, 먹는 것과 입는 것, 자는 것과 싸는 것이 어떻게 해결되어질지.

더욱 극한 상황의 연출은 더욱 깊은 내면에 위치한 인간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었다. 실제 역사로 자리잡고 있는 ‘산둥 수용소’와는 달리 ‘눈먼 자들의 도시’는 순전한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읽어나가며 몰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거기엔 동일한 질문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진지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아주 기본적이고 철학적인, 어쩌면 신학적일 수도 있는 질문. “인간의 본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그렇다면 나는 어떤 인간인가?”

어느 마을 사거리, 빨간 신호등 때문에 멈췄던 차들은 기다렸던 파란 불이 들어왔기 때문에 일제히 다시 가속페달을 밟아야 할 참이었다. 그런데 맨 앞의 차 한 대가 신호가 바뀐 것도 모른 채 계속 멈춰있다. 운전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럴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 멈춘 차 안의 운전자는 신호가 바뀐 것도 모를 정도로 딴짓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신호가 바뀐 것을 몰랐던 건 맞다. 그러나 알 수가 없었다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싶지만, 그 남자가 갑자기 눈이 먼 것은 사실이었다.

이 책은 위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시작을 한다. 저자는 그저 한 남자에게 벌어진 기이한 일을 기록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 일은 재앙의 시작이었다. 그 남자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그 차를 도둑질한 남자, 눈먼 남자의 아내, 함께 안과를 찾아갔을 때 탔던 택시의 운전수, 안과 의사, 간호사, 안과에 온 환자 몇 명을 시작으로 점차 눈이 머는 현상은 결국 모든 사람에게까지 전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안과 의사의 아내는 눈이 멀지 않았다. 눈이 멀어버린 상황에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안과 의사였지만 아내는 남편을 돕기 위해 수용소로 함께 향했다. 자신도 눈이 멀었다고 모두를 속이면서 말이다. 전염성이 확인되자 국가가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눈먼 사람들과 그들과 가까이 있어 보균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어떤 낡고 버려진 정신병원 건물에 강제 수용되었다. 처음에는 군인들이 격리된 그들에게 먹을 것을 비롯한 생필품을 전달해주었지만, 군인들도 나중에 가선 모두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에 누구도 다른 누구를 감시하거나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사라진 감시와 통제는 자유라고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 모든 사람이 눈이 먼 세상에서 자유란 어떤 의미일까? 혹시 자유라는 것은 눈이 보여야만 가능하고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닐까?

수용소 안에서라면 동병상련이란 이유로 서로를 더 공감하고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남을 희생해서라도 자신의 유익을 먼저 챙기게 되는 파렴치한 존재, 우리 인간 말이다.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신 눈이 보일 때 마음껏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할 수 있는 자유는 주어졌다. 그러나 그 자유라는 것은 대부분 인간됨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도덕성과 합리성에 반하는 것들이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한 은밀하고도 수치스러운 행위들이 난잡하게 행해졌다. 무정부상태. 그것도 서로 보지 못하는 세상.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인간에겐 희생과 헌신을 양날개로 하는 이타심과 사랑이,

이기심 말고도 존재하고 있다.

이미 정상적인 눈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되어도 예전의 사고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그들은 동물, 아니 어쩌면 동물보다 더 못한 존재처럼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고통의 의미를 묻고 수치심을 느낄 수 있으며, 누군가 인간 내면에 입력해 둔 도덕성을 인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백 명이 넘는 인원이 수용된 곳이라 아무런 질서도 없는 상황에서는 힘있는 자가 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총을 가진 어떤 깡패가 그곳에 조달되는 음식을 중간에서 가로채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는 폭력을 무기로 돈과 여자를 요구했고, 유일한 먹을 것을 포기하고 죽느니 그들의 요구에 따르며 살아내는 것을 선택했던 눈먼 자들은 그 굴욕적인 요구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에 있는 걸까? 어차피 싸게 될 것들을 먹고 하루를 더 살아내기 위해 아내를 강간의 제물로 바치는 남편들을 보면서 난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분노가 일었으나, 나를 그 상황에 투영시키자 그 분노는 연민과 애절함으로 바뀌었다. 나는 달랐겠는가 묻는다.

의사의 아내는 유일하게 전염되지 않아 눈이 정상이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그 사실을 일부러 숨겨오고 있었지만, 비참하고 굴욕적인 상황을 맞이한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그 깡패를 죽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깡패는 총이 있었고 그녀에겐 달랑 가위 한 자루가 있었다. 그러나 그 깡패는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볼 수 있었다. 가위는 총을 이겼다. 다른 동료 여성이 그 깡패에게 강간을 당하는 사이 잠입하여 그의 목을 따버렸던 것이다. 첫 번째 살인이었다. 그녀에겐. 군인들도 다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에 수용소는 더이상 수용소가 아니었다. 이를 나중에 알게된 눈먼 자들은 누군가에 의한 방화 때문에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밖으로 나와도 달라질 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이다. 밖은 커다란 수용소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길거리는 배설물로 가득했고, 죽은 시체들이 여기저기에 뒹굴고, 그 시체를 뜯어먹는 개들이 가득했다.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볼 수 있는 것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그녀가 본 세상은 처참했다.

내가 감동받은 부분은 의사의 아내의 이타적인 행동 때문이다. 그녀조차 차라리 자신도 눈이 멀어버렸으면 좋겠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일행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애썼다. 일행을 모두 집으로 데려가서 남은 물을 함께 마시는 장면에서 난 경건해지기까지 했다. 저자는 눈먼 자들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고, 그녀를 통해서는 어떤 희망과 인간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모르지만 인간에겐 희생과 헌신을 양날개로 하는 이타심과 사랑이 이기심 말고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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