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의책과일상] 살아낸다는 것
[김영웅의책과일상] 살아낸다는 것
  • 김영웅
  • 승인 2018.12.2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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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2009년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2009년

신성모독과 음담패설 등이 취미인 것 같은 망나니, 육욕에 충만하여 정신적 세계를 단박에 우스개거리로 만들어버리는 방탕한 이단, 말초적 쾌락이 존재의 이유이자 목적이 된듯한 그에게서 왜 난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사건을 떠올렸던 것일까. 성육신이야말로 그가 말로 주장하고 삶으로 보여주었던 것들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거룩한 기독교의 핵심 교리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혹시 바로 여기에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숨은 역설이 담겨있는 건 아닐까?

'나'라는 화자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쓰여진 이 책의 주인공 이름은 '조르바'이다. 이 책은 화자가 조르바를 만나면서부터 그가 죽기까지의 기간 동안 있었던 일들을 회고하는 방식으로 짜여져 있다. 정신을 함께 나누었던 친구와의 이별은 ‘나’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친구는 동포를 구하기 위하여 책을 버리고 삶을 택한다.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떠안고 친구는 카프카스로 기꺼이 몸을 던진다 (결국 그 친구는 동포를 구하고 나중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비겁했던 것일까? 이별 장면에서 기억하는 친구와의 마지막 대화 속에서 ‘나’를 송곳처럼 찔러 내면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시작했던 말은 ‘책벌레’였다. ‘나’는 그 말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깊은 상처를 받았다.

‘나’는 결심했다. 새로운 삶을 살아보기로.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남겨준, 크레타 섬에 위치한 갈탄광으로 향한다. 그러나 책과 집필도구는 챙겨서 간다. 그래도 ‘나’에게는 그것도 일생일대의 큰 결단이었다. 조르바를 만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던 그 레스토랑에서 조르바는 운명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조르바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나’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호탕한 기인이었다. 조르바와 함께 크레타 섬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기로 작정했다. 마침 그는 탄광에서 광부로서의 경험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고 표현해도 조르바를 모두 담아내기엔 역부족이다. 그는 언제나 그 이상이었다. 이별했던 친구가 ‘나’에게 어떤 자극제 역할을 했다면, 조르바는 이미 그 길의 목적지에 도달해있는 사람이자 그 길의 완성인 것 같았다. ‘나’의 구원을 찾아나선 여정에서 그는 그 자체로서 답이었다.

400 페이지가 넘어가는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크레타 섬에서 조르바와 함께 했던 시기에 대한 회고다. 책의 말미에서도 언급되지만, ‘나’는 조르바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다 기억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의 조르바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조르바로부터 뿜어져나오는 자유를 통해 성숙해지고 풍성해진, 어쩌면 그 많고 많은 책으로부터도 얻지 못했던 해방과 일종의 구원 과정에서부터 얻은 절절한 내면의 변화가 고스란히 이 책에 담겨있다. 내가 이 광기어린 기인, 조르바와 화자인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생각났던 건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소설을 읽어나가는 중 나는 나도 모르게 나를 ‘나’에게 대입했다. 그리고 ‘나’의 눈으로 조르바를 보고 느꼈다 (저자가 ‘나’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건 아마 이 때문은 아닐까? 독자들이 그가 직접 겪은 조르바를 느껴보라고).

 

나의 삶과 신앙의 여정은, 내가 가졌고 유일하게 내세울만한 자랑거리라고 여겼던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시작되었다.

조르바는 슬플 때 소처럼 울 줄 알았고, 기쁠 땐 미친 놈처럼 춤을 출 줄도 알았다. 영혼의 깊숙한 곳이 터치될 땐 산투르를 연주하여 온몸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크레타 섬의 주민들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씌워 죽여버린 과부를 보호하려 몸을 던졌던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의 부불리나였던 오르탕스 부인의 죽음 앞에서 유일하게 애도를 표하며 슬퍼했던 인간이었다.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수도승들의 치부를 여과없이 드러내어 조롱했던 대담하고 예리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밤하늘의 별과 포말로 부서지는 바다와 지저귀는 새소리와 아프리카에서 불어오는 더운 바람에도 예민하게, 마치 처음 그 창조물들을 대하는듯한 자세로 반응했던 인간이었다. 인생의 허다한 경험들을 뒤로 하고 그것을 내던져버리지 않고 그 속에서 진주를 찾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철학을 만들어내었던 인물이었다. 실로 그는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지식과 지혜를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체득하여 실제 삶을 살아내는 자였던 것이다.

내가 가진 신앙을 바라본다. 말과 글로 도배된 많은 부분들이 보이고, 거기로부터 깨닫고 기뻐하는 작은 몸부림조차 손과 발로 전달되지 않고 머리과 가슴에 갇혀버린 처량한 내 꼴이 보인다. 난 과연 왜 책을 읽어나가고 있는 것일까. 많은 깨달음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일상을 하나님나라로 살아내려는 결단으로 새로이 시작한 나의 삶과 신앙의 여정은 책 속의 화자와 마찬가지로, 내가 가졌고 유일하게 내세울만한 자랑거리라고 여겼던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때 시작되었다.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이 여정 가운데 이 책을 만나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매일 새롭게 도약하는 것이다. 신학책에서 세상을 보고, 세상에서 신학을 본다.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인간을 알게되고, 인간을 알게되면서 하나님을 본다. 살아낸다는 것, 머리와 가슴을 찔러 깊은 깨달음을 얻고 눈물을 쏟아낸다해도 일상으로 살아내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와 억눌린 자들을 돌보지 못한 채 고상한 교회 은어들을 사용해대며 까불어대고, 고작 한다는 신앙의 행위가 개인의 번영과 안녕만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과 악마가 하나라고 함부로 지껄였지만 일상적 삶에선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삶을 살아낸 (어쩌면 예수의 삶을 살아낸) 조르바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낸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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