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메시지와 후기 해석된 메시지 사이의 차이를 구별해야
원 메시지와 후기 해석된 메시지 사이의 차이를 구별해야
  • 김승수
  • 승인 2018.11.12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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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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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 종교는 모두 경전을 갖고 있다. 그 경전은 모두 고대어로 기록된 고전 문헌이다. 이 고전 문헌과 이를 해석하는 현재 해석자들 사이에는 시간과 공간에서 비롯된 간극(gap)이 존재한다. 학부 시절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인도에서 붓다(Buddha) 즉 고타마 싯다르타(Siddhartha Guatama)에 의해 시작된 불교와 지금의 한국 불교 사이에는 차이가 너무 많음을 느끼게 되었다초기불교 이후 부파 불교(部派佛敎, early Buddhist schools), 대승. 소승불교, 밀교(密敎), 한국 불교에 이르기까지 결국 붓다 사후 해석의 차이로 인해 분열되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세속화를 포함해 붓다의 초기 가르침과는 너무 많이 달라진 형태의 모습을 한국 불교에서 보았다.

기독교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이후 그가 가르치신 복음과 그 외의 당시대의 역사 문화적 사건들까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초기 가르침들을 후기 사도들과 특히 로마제국의 사회체제와 유대 관습에 남아있던 사도 바울이 해석한다이를 다시 로마 체제에 있었던 속 사도와 교부들이 해석하며, 신성로마제국에 이르러는 스콜라신학자들이 해석하고, 이어 종교개혁자들이 다시 해석하며, 다음 개혁파 및 다양한 교파 신학자들이 해석한다. 흥미로운 것은 해석들이 전쟁으로 인간을 계급화하고, 전쟁과 싸움질을 좋아하는 전투적인 로마 문화권을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나 불교의 종교학(신학 등)에서 종교창시자들의 원 메시지와 당시대 역사문화권에서 사고가 벗어날 수 없는 해석자들의 해석된 메시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종교의 원 창시자들의 가르침들에 가까이 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지금의 한국 불교의 모습과 가르침들에서는 붓다의 원 가르침도 있지만 당시대 역사문화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해석자들의 해석된 것이 더 크게 자리 잡혀 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한국기독교의 모습과 가르침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원 가르침도 있지만 당시대 역사문화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해석자들의 해석된 것이 더 크게 자리 잡혀 있을 수도 있다.

명심할 것은 사도바울은 당시대의 역사문화성 안에 있었던 아들이었고, 해석자였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을 해석에서 전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에서 동일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이 가진 문화성에서는 동일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의 조직문화와 전쟁국가였던 로마의 군사적 조직문화에 익숙했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패했던 성전제도와 그 조직성. 계급성을 사멸시키셨지만, 바울은 문화에서 만큼은 유대성과 로마성을 넘어서지 못한 채 주님의 공동체를 다시 그 안의 모습으로 세우게 된다. 신이 아닌 인간은 결국 그 시대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김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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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서신서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이렇게 세운 조직성의 문제 발생과 후기 교정들에 대한 내용이다. 결국 그렇게 세운 조직성들의 결과로 일어난 문제와 후유증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과 섬김으로 극복할 것을 당부한다. 이 말씀들이 교회조직을 세울 때가 아니라 이미 그 결과적으로 일어난 문제점의 해결성으로 후기에서 자세히 제시되었음을 볼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가 보여주듯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이다.

사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들과 행적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바울과 같은 유형의 조직을 세울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적도, 언지를 주신 적도 없다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계급적 의식 덕분에 제자들 사이에서 성냄들과 분열이 보이자 예수님은 섬김을 말씀하시며 책망하셨다. 이에서 보듯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세속적인 양식의 조직공동체를 세우신적이 없으시다는 것이다. 그러한 추구들은 바울의 해석성에 있었던 것이었고, 이를 극대화 시킨 것은 정치. 계급화된 신성로마제국과 그 지역들에서의 기독교에서였다.

얀 후스 이후 종교개혁은 만인제사장주의를 부르짖으며 일어났으나, 로마의 제국주의성. 조직 안의 계급성이 강했던 이 역사문화 안에 있던 서구에서는 성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만인제사장주의는 지금도 언제나 목사들의 양심을 뒤 흔들게 된다종교개혁의 슬로건 중의 하나는 ''성경원문으로 돌아가자!''이다. 한국종교들은 종교창시자들의 가르침들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종교창시자들의 가르침을 해석한 후대 해석자의 해석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종교창시자들의 원 가르침들과 그 본질적 의미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바울, 성 어거스틴, 요한 칼빈, 베자, 아브라함 카이퍼 등등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예수 그리스도'' 자체로 돌아가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종이 주인이 될 수 없고, 부식이 주식이 되지는 못한다.

지금의 시대는 율법을 어기지 않기 위해 율법사들이 이를 위한 장로들의 유전과 관습을 만들고 나서 그것을 이용해 종교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착취했던 시대와 매우 비슷하다. 그 때 율법의 그 근본정신으로는 들어가지 못함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학자들을 매우 책망하셨다.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유전과 관습 같은 해석을 사용해 교인들을 착취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가르치심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에 대한 재반성과 개혁은 분명 필요하다.

개혁교회 안에 각종 부정부패와 비리들, 그리고, 장로 8 천만 원, 권사 5 천만 원.... 이러한 조직성 추구들이 말이나 되는 것인지? 이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그 이론은 무엇일까 궁금하다. 개혁신학은 그 자체 개혁이 매우 필요하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엔 장로도, 권사도, 장로 8 천만 원, 권사 5 천만 원도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그리고 성경의 그의 복음으로 돌아가자.

 

글쓴이 김승수는, 글로비전교회 목사로, 아르케 콘텐츠 연구원 대표로,  서울기독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과 한국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와 외래교수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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