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비거주 선교사’인가 ?
나는 왜 ‘비거주 선교사’인가 ?
  • 유혜연
  • 승인 2018.11.12 00: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혜연의 선교 이야기

우리 사역의 모양이 우리를 선교사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초점이, 우리의 열정이, 우리의 방향이, 우리를 선교사로 만든다. ‘ 어디'(장소, 지역)'은 이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 어디나 우리가 선 땅이 선교지이기에.

20127, 9년 만에 처음 갖는 안식년을 보내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일 년 안식년을 계획했기에 선교지에서의 9년의 살림을 대충대충 상자에 담아 섬기던 직업학교 구석에 쌓아 놓고 옷가지를 주섬주섬 담은 가방을 하나씩 들고 6식구가 설레는 가슴으로 공항으로 향했다.

큰딸은 일 년 전 대학 진학으로 먼저 들어와 있어서, 단출하게(?) 6식구만 태평양을 건너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9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어색 그 자체였다. 선교지로 나가기 전 11년을 함께 생활하셨던 시부모님은 9186세 가 되셨고, 친정집과 같이 푸근했던 모() 교회는 사돈의 팔촌 같은 서먹함으로 우리를 맞았다우리는 선교지로 떠났던 그때의 그 모습 그대로인 것 같은데, 이 땅은 강산이 변하고 사람이 변한 느낌이었다.

이런 어정쩡함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던 3개월이 지나, 가슴 저리는 소식이 들려왔다. 정복 경찰 20여 명이, 토요일 오전 학교로 진입해 모든 학생과 현지 사감 교사 부부를 8시간 넘게 심문하고, 결국 24시간 내 폐교 명령을 내린 것이다. 몇몇 학생들은 화장실로 숨고, 용기 펄펄한 몇 녀석은 뒷담을 넘어 도망을 하고 상황을 전화 넘어 듣게 된 우리는 무엇보다도 동역자들과 학생들을 향한 미안함으로 통곡하였다.

함께 못하는 죄책감이 며칠을 잠 못 들게 했다. 당장 비행기를 잡아타고 들어가야 한다는 마음이 요동쳤지만, 안전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그렇지 못함을 삼켜야 했다. 여러 현지 교사들과 동역자들의 수고와 헌신으로 학생들은 안전히 분산시켰으나, 학교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그 아름답던 사역은 후루루 사라져 버렸다. 수많은 이들의 헌신과 기도로 시작하고꽃을 피웠던, 가슴 뛰게 했던 학교가 덩그러니 건물만 남게 되었다. 그 상실감이 상상할 수 없는 아픔과 무거움으로 다가왔고,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흘기는 시간이 잦아졌다.

나 아버지한테 삐졌어여 ... (우리가) 함께 할 수도 없는 시간에, 우리는 이렇게 멀리 와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학생들 교사들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왜 꼭 이렇게 이 시간에 ... ”

학교가 폐교되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마음에는 여러 가지 질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다음 걸음을 계획해야 하는가? 몇 달을 울며 기도하며 대화하며 또 울면 기도하며 대화하며 우리 부부는 어려운 결론에 도달했다. 선교지에 거주하지 못하지만/하지 않지만 그 민족을 사랑하고 섬기는 선교사다. 우리가 비거주 선교사가 되기로 결정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안전 문제 발생으로 장기 거주할 때 사역의 많은 부분이 제약을 받을 수 있다. 신학교 사역은 거주하지 않아도 진행할 수 있고, 현지 리더를 세움에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직업학교와 신학교를 동시에 섬겼기에, 직업학교 폐교로 신학교 위주의 사역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연로하신 시부모님은 도움 없이는 생활하실 수 없는 연세에 이르셨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후원금의 부족이었다, 아주 아주 많이. 본부에서는 안식년을 후원금 모금에 전력을 다하길 원했지만, 워낙 그쪽으로 소질이 없는 우리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선교하러 가기 전까지 세우고 교육했던 수많은 한인 2세들이 교회를 떠나 떠다니는 모습이 우리를 아프게 했다. 이러한 이성적인 이유로 비거주 선교사로 타이틀을 바꾸기로 했지만, 한동안 남편은 많이 어려워했다.

먼 나라 (우리의 선교지)’죽의 장막이라고 불리던 시절, 18살 고등학생이던 남편은 그 나라에 선교사로 가기로 헌신하고 22년 후에 그 땅을 밟았다. 22년을 그리워하며 준비했던 선교를 겨우’ 8년 반만의 거주로 끝내는 것을 아주 많이 마음 아파했다.

비거주 선교사 생활 6년 차. 이제는 적응이 될 듯도 한데 아직도 우리는 선교지를 바라본다. 그래서 꿋꿋이 자신을 스스로 선교사로 부르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 사역의 모양이 우리를 선교사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초점이, 우리의 열정이, 우리의 방향이, 우리를 선교사로 만든다는 것을, ‘ 어디'(장소, 지역)'은 이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 어디나 우리가 선 땅이 선교지이기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