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성소수자 혐오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성경이 성소수자 혐오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 정한욱
  • 승인 2018.06.2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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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학, 인권옹호자 예수 : 성경과 성소수자|성경이 성소수자 혐오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생각비행, 2018년
김지학, 인권옹호자 예수 : 성경과 성소수자|성경이 성소수자 혐오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생각비행, 2018년
김지학, 인권옹호자 예수 : 성경과 성소수자|성경이 성소수자 혐오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생각비행, 2018년

『인권옹호자 예수 - 성경과 성소수자』는 미국에서 인간의 다양성과 인권을 공부했고 지금은 한국에서 차별과 소외가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저자가 기독교와 성소수자 문제와 관련된 여러 이슈들을 쉽고 친절하게 정리한 책이다. 소수자의 인권을 언급했다가 섬기던 교회에서 쫓겨나기도 했던 저자는 이 책에서 흔히 성소수자 차별의 근거로 쓰이는 성경구절들을 어떻게 읽고 해석해야 하는지 살피고, 성소수자에 대한 흔한 편견과 오해에 대해 당사자들의 경험과 객관적 데이터를 제시하며 차분하게 반박한다. 그리고 독자들이 성경과 예수의 정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소수자와 약자와 함께했던 예수의 삶을 따르게 되기를 소망한다.

일견 평이해 보이고 가끔은 나이브하다고 느껴질 만한 성경해석도 눈에 띠는 작은 책이지만, 저자의 치열한 공부와 고민 그리고 실천이 녹아 있는 메시지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앙의 색깔을 떠나 한번쯤 읽으며 자신을 비춰보아야 할 좋은 입문서다. 내용을 조금 자세히 요약한 후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이기로 한다.

 

요 약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연구에 의하면 동성애가 죄라고 대답한 비율은 비개신교인이 18.5%임에 비해 개신교인은 53.3%나 되었다고 한다. 혹자는 왜 이렇게 소수자를 차별하는 성경과 기독교를 버리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성소수자이면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성소수자에게 편견 없는 좋은 이웃이 되고 싶은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며, 그들에게는 성경이 실제로 동성애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가 중요할 수 있다. 동성애에 대한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공포를 조장하는 악성 루머와 가짜 뉴스는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로 이어지게 되며, 이런 사회에서 성소수자가 자존감과 자긍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기란 어렵다. 우리가 현재 상황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를 넘어 관심을 가지고 제대로 된 정보를 구하는 것이다.

성경과 성소수자  성경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오히려 성경을 허점투성이로 만들어 권위를 추락시킬 뿐 아니라, 오랜 시간 성경을 통해 축적되어 온 경험과 지혜를 배우는 데 방해가 된다. 성경은 그 안의 교훈들로 우리가 풍성한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도우며, 성경을 통해 얻은 교훈들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사랑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성경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있다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제한 없고 조건 없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일 뿐, 동성애뿐 아니라 이성애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다. 성경에는 다양한 가족형태나 사랑의 모습이 등장하며, 그중에는 다윗과 요나단, 룻과 나오미의 경우처럼 동성애 관계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경우도 있다. 성경에 있는 3만 1173개 구절 중 60개 구절이 정욕에 대한 경고이고 그중 동성애에 관한 경고는 10구절 미만에 불과하다. 성경의 핵심 가치인 환대와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성소수자는 빼고’라고 그다지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

기독교와 성소수자 외부적인 적을 만들고 공포와 혐오를 부추겨 내부 결속력을 높여 왔던 한국의 근본주의 교회와 보수 정당은 전가의 보도였던 종북몰이가 더 이상 먹히지 않자 동성애를 새로운 표적으로 설정했고, 더 좋은 세상을 위한 희망과 계획을 제시하기보다 또다시 사회적 소수자를 희생양 삼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획책하고 있다. 또한 동성애를 최악의 죄나 도덕적 타락, 질병 등으로 규정함으로서,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같은 이성애자들의 심각한 폭력과 일부 목회자들의 추악한 비리를 은폐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한국은 어느 때보다 다양성과 인권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으며 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인류는 점차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지금 우리는 혐오와 배제의 문화를 만들어갈 것이냐 존중과 포함의 문화를 만들어갈 것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오해와 대답 1  통계적으로 볼 때 성소수자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2~10%정도 존재해 왔으며 의학적으로는 오래전부터 더 이상 정신병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누가 어떻게 성소수자가 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며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있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져 있으면서 삶의 과정에서 변화될 수 있는 유동적 범주라는 견해가 힘을 얻어가고 있다. 대부분의 동성애자는 이성애자 부모를 두고 있으며, 동성애자 부모가 키우는 아이들 대부분은 이성애자가 된다. 동성애자 부모의 양육은 자녀의 성적 지향을 물론 성장 과정에 통계적으로 거의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 동성애를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차별적이고 폭력적이며, 소위 ‘전환치료’는 개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력을 동반한 폭력이다. 성소수자 인권 운동은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양성애자든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고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오해와 대답 2  에이즈의 주요 감염 경로는 성 접촉의 종류를 막론하고 정액과 질 분비물이며 이는 콘돔의 사용으로 100% 예방할 수 있다. HIV에 감염되더라도 꾸준히 약을 잘 복용하기만 하면 에이즈 환자가 되지 않으며, 평생 비감염인과 같은 수준의 면역력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다. 에이즈를 퇴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관계시에 콘돔을 사용하고, 제대로 된 정보를 알리고, 보건소에서 익명으로 무료 HIV 검사를 시행하는 것이다. 동성애는 오직 성적 쾌락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성애라는 단어에서 성관계부터 연상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그들의 어떻게 성관계를 하며 어떤 체위를 취하는지에만 관심을 가지는 자신들이야말로 심각한 섹스 중독자는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동성애를 받아들이면 소아성애 동물성애 시체성애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동성애를 지지한다고 해서 결코 성관계 전에 동의할 수 없는 대상들(동물, 시체 ,사물), 또는 동의했다 하더라도 완전한 동의가 아닌 착취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영유아, 아동, 장애인)에 대한 부적절한 성관계가 인정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차별금지법  차별금지법은 개인 간에 일어나는 차별적 언행을 일일이 처벌하기 위한 법이 아니며, 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주 목적이다. 인권은 찬반이나 합의나 다수결의 문제가 아니며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다양성을 무시하고 획일적인 기준에 따른 ‘정상성’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다른 사람의 인권, 다양성, 표현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의 인권, 다양성,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퀴어 퍼레이드는 1년에 단 하루 성소수자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며 자신을 긍정하는 축제이자 획일적인 사회 규범에 저항하는 날이며, 실제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오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반대자들은 그 극소수의 사진을 찍어서 부정적인 여론을 퍼뜨린다. 공적 영역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타자를 정죄하고 차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는 방증이다. 만약 앞으로 기독교가 소수자가 된다면 차별금지법은 차별의 위협에 놓인 기독교와 신앙인들을 보호하게 될 수도 있다.

예수와 성소수자  예수는 동성애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예수가 말하지 않은 주제들에 대해 예수의 뜻을 유추하는 방법은 예수의 언행과 삶을 관찰하는 것이다. 예수의 사역은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를 향해 있었으며 여성, 고아, 과부, 병든 자, 가난한 자,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당하는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러한 예수의 언행을 통해 예수에게는 생식능력이나 혼인상태 혹은 성적 지향이나 성 정체성은 별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유추할 수 있으며, 남성으로부터 Y 염색체를 받지 않았던 예수는 실제로 트랜스잰더였거나 간성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도 있다. 이런 예수가 지금 다시 이 세상에 온다면 아마도 가장 강력한 성소수자 옹호자가 될 것이다. 죽음 이후의 천국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소외되거나 배제되지 않는 평등과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책임감 있는 연대를 실천하는 예수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 정신이며 정상적인 중교의 역할이다.

 

성소수자 혐오를 위해 인용되는 성경구절에 대한 저자의 해석

생육하고 번성하라 창 1:28에 나오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무너진 후 출산율을 높여 다시 재건해야 하는 역사적 정황에서 기록됐다. 오랫동안 자위행위나 콘돔 사용을 금지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 교회는 출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성관계를 모두 정죄해 왔다. 이미 태어난 생명들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든다면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얼마든지 잘 이행할 수 있다.

돕는 배필과 해산의 고통 창 2:18-24에 나오는 “돕는 배필”이란 남성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용어가 아닌 ‘상호 보완하는 힘’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본문은 이상적인 관계란 상호 존중하고 평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라는 사실을 알려주며, 동성 파트너들 사이에도 이런 관계는 당연히 가능하다. 그리고 창 3:16은 타락의 결과와 그 벌이 임신이고, 그 고통을 이기고 출산을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그런 고통이 있어도 여자는 자신을 다스리는 남편을 원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우리가 이 텍스트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월주의로 가득했던 당대인들의 여성혐오적 태도다.

소돔과 고모라 창 19:1-38 동성애를 비난하기 위해 이용하는 성경 구절 중에서 가장 오용되고 악용되는 본문 중 하나인 소돔과 고모라 사건은 사실 동성애와 아무 상관이 없다. 이 도시가 심판을 받아 파괴된 이유는 나그네들에게 친절과 환대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소수자를 억압하고 차별하는 이 시대와 많이 닮았다.

가증한 일 레 18:22, 20:13은 유대인 포로들이 다른 민족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환경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만들었던 정결법의 일부로, 시대를 초월한 영원한 율법이 아닌 그 시대 그 상황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적용되는 법이다. 교회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성경구절을 취사선택해서 하나님의 뜻이라며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는 폭력을 수없이 저질러 왔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구절을 문자적으로 지킨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며 성경에 동성애가 죄라는 구절이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어떤 가치를 나의 가치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가치로 삼을 것인가가 중요하다. 성경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시켜 다른 모든 해석을 정죄하는 교만에 빠져서는 안된다.

순리와 역리 롬 1:21-28에 대해서는 (1) 유대인의 전통에는 동성애가 없는데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에는 동성애가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을 보고 바울이 동성애는 다른 신을 섬긴 결과라고 결론을 내렸다는 해석, (2) 바울이 디나이얼 게이이자 호모포비아였다는 해석, (3) 바울이 호모포비아였지만 게이가 아니라 성욕을 경계한 금욕주의자였다는 해석, (4) 바울이 당시 로마 황제의 성적 타락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는 해석, (5) 바울이 무성애자였다는 해석, (6) 바울이 일중독자였다는 해석이 있다. 여기서 ‘순리’나 ‘역리’는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보기에 적당한 행동을 기준으로 한 것이지 과학지식이나 인간행동에 대한 통계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판단이 아니다. 동성에는 자연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동성애자가 동성에게 끌리는 것이야말로 순리다.

천국에 들어갈 자 고전 6:9-10, 딤전 1:9-10은 천국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목록이다. 이 본문에 나오는 ‘남색’은 당대에는 보기 어려웠던 서로 존중하고 신실하게 교제하는 동성 커플이 아닌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동성 간의 성관계(성노예 혹은 성매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구절은 사랑 없이 정욕에 사로잡혀 많은 여성을 성적으로 취하는 사람과 다른 남성을 ‘여성을 취하듯이’ 취하는 사람을 이야기한 것이며, 바울은 동성애와 이성애를 떠나 정욕에 사로잡혀 성적으로 타락한 마음과 행위를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 단상

1. 나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에 첨예한 이슈로 부각되어 있는 성소수자 문제가 짧으면 한 세대, 길어야 두 세대 내에 더 이상 논쟁거리조차 되지 않는 날이 오리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과거에 ‘성경을 바탕으로’ 여성을 아버지나 남편의 재산 내지는 “해산을 통해서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하고, 흑인이나 유색인종을 평생 노예 내지는 이등국민으로 살 운명을 타고난 “나무 패고 물 긷는” 저주받은 가나안인으로 간주하며, 적그리스도 집단인 유대인과 이교도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경전을 불태워 버리라고 선동했던 사람들을 현재 우리가 신앙의 이름으로 야만적 폭력을 자행한 혐오스러운 자들로 여기는 것처럼, 우리를 이어 이 땅에서 살아갈 대다수의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성적 지향으로 사람을 혐오하고 정죄하겠다는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대다수였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수치로 여기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시대나 그렇듯 고집스레 자신들의 도그마를 고집하는 소규모 ‘종파’들이 일부 존재할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는 없다.

2. 교회 내에는 한국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는 것에 대해 기독교가 뭔가를 잘못했거나 마땅히 해야 할 일 - 예를 들면 안티 동성애 운동 - 을 하지 않아서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꽤 많은 것 같다. 주로 교회를 오래 다녔고 교회 다니는 분들만 상대하는 사람들일수록 걸릴 위험이 높아지는 ‘기독교 왕자병’이다. 21세기의 한국은 무신론자가 50%가 넘는 비종교 사회이고, 전 인구의 20%를 차지한다는 기독교는 "됫박 아래 감춰진 등불"마냥 여전히 자신들의 게토 안에 격리되어 있으며, 기독교 전파 100년이 넘도록 기독교의 정신은 한국인의 심층적인 종교적 집단무의식에 전혀 파고들지 못했다. 개인적 견해로는 오늘날 한국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우호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은 한국인들의 심층을 지배하는 유교적 권위주의와 가부장주의가 약화된 결과일 뿐, '말씀대로'를 외치는 보수 기독교의 잘잘못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오늘날 성소수자 문제와 같은 사회적 윤리적 이슈에 대해 기독교가 어느 정도나마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들의 가르침과 삶과 실천에 대한 사람들의 공감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들이 가진 ‘머릿수’와 그들이 선거에서 행사할 ‘표’ 때문일 것이다. 불행하고 비참한 일이다.

3. 성경을 '문자대로' 믿는다는 한국의 근본주의자들이 로날드 사이더의 흥미로운 표현을 빌자면 “해당 본문을 성경에서 전부 오려 내면 성경 자체가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지고 말 정도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사회 정의에 대해서 철저하게 침묵해 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그런 분들이 성경을 통틀어 열 군데 미만에서만 다루고 있을 정도로 존재감이 미미한 동성애에 관해서는 마치 기독교를 무너뜨릴 절대악이나 되는 것처럼 흥분하는 것일까? 혹시 브라이언 스탠리의 말마따나 20세기 말부터 한국 기독교의 ‘큰집’이라 할 수 있는 영미권 기독교 내에서 동성애와 관련된 해석학적 논쟁이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를 가르는 상징적 분리선”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은 제정신 박힌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런 주제들이 논쟁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조차도 수치스럽게 여기겠지만, 한때 서구에서 '최신의' 이슈들이었던 노예제도나 여성인권, 인종차별과 관련해 당대의 보수와 진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그어졌던 그 분리선 말이다. 이제는 신학이나 목회에서의 유행으로도 모자라 증오나 혐오까지도 미제나 영국제를 수입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일까? ‘문자대로’ 혹은 ‘말씀대로’ 믿는다는 것은 자신들의 기호에 따라 “낙타는 통과시키고 하루살이는 걸러 내는” 현대판 바리새인이 되는 것을 뜻하는가?

4. 성경깨나 읽었고 신학 좀 들여다봤다는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상당히 자유스럽고 때로는 나이브해 보이는 저자의 성경읽기가 꽤 눈에 거스를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십계명에 나오지도 않는 성소수자와 눈에 보이는 신상을 만들지 않는 이슬람에 대해서 그렇게도 적대적인 당신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우상이 꽉꽉 들어찬 절집이 전국에 가득한데도 신앙의 열정으로 기꺼이 동족을 학살했던 시므온과 레위와는 달리 왜 그렇게 온순한가?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성경의 정신에 따라 '기저귀를 차는' 여성은 목사가 될 수 없다는 말을 당당하게 발설하는 당신은, 왜 몇년 전 결혼도 하지 않은 여성을 대통령으로 뽑는 데는 그렇게 열성이었는가?

저자의 말마따나 성경의 모든 구절을 문자적으로 지킨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며, 성경에 특정 구절이 존재하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성경의 어떤 가치를 나의 가치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가치로 삼을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시대와 역사와 문화를 초월해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가장 본질적인 해석의 원리는 ‘사랑의 법’이며, 성경의 모든 본문들은 이 원리에 근거해 해석되어야 한다"는 김근주 교수의 일갈이 하나의 좋은 대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5. 그래서 이 주제에 대한 내 생각은 어떠냐고? 짧으면 한 세대, 길면 두 세대만 기다리면 알려주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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