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맑게 해주는 탁월하고 균형 잡힌 루터 입문서
머리를 맑게 해주는 탁월하고 균형 잡힌 루터 입문서
  • 정한욱
  • 승인 2018.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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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식,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 500년 전 루터는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남겼는가, 21세기북스, 2017년
박흥식,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 500년 전 루터는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남겼는가, 21세기북스, 2017년
박흥식, 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 500년 전 루터는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남겼는가, 21세기북스, 2017년

독일 괴팅겐대학교에서 서양 중세사를 전공하고 현재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교 교수로 재직중인 저자는『미완의 개혁가, 마르틴 루터』를 통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시기에 루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고, 역사학적 견지에서 루터의 행적과 성과를 재평가하며, 나아가 그의 한계나 잘못도 지적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교회사의 맥락에서는 루터를 영웅시하고 위인으로 떠받드는 경향이 여전하지만 무분별하게 루터의 성취에 도취되기보다는 당대의 시각에서 그의 업적과 그가 서 있던 지점을 정확히 성찰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루터의 삶 그리나 나아가 종교개혁을 균형 있게 재평가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책의 1부에서 루터가 95개 논제를 발표하면서 예기치 않게 종교개혁이 시작되어 거대한 운동을 발전한 국면을 다루고, 2부에서는 루터 종교개혁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1520년대 전반의 그의 업적을 대표하는 주제들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시대적 요소들을 검토하며, 마지막 3부에서는 루터의 개혁이 예기치 못하게 맞은 위기와 그것을 돌파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저자에 따르면 종교개혁은 루터 한 사람의 위대함이 이뤄 낸 결과가 아니라 12세기 말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희생을 치뤄가며 지속해 온 개혁운동들의 결실이었으며, 루터 뿐 아니라 동료 개혁가들과 그들의 대의에 공감하고 동의했던 평민들이 독일은 물론 전 유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교회의 부패와 시대의 모순에 함께 저항했던 운동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신칭의로 대표되는 새로운 신학적 통찰이 개혁의 중요한 내적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지만, 루터의 저항과 주장이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운동이 변화를 갈망하던 16세기 독일과 유럽 기독교세계의 윤리적 사회적 요구에 부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선 실패한 개혁가들과 달리 당대 정치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그들과 결탁해 중세적 봉건질서에 안주하는 길을 택했던 루터는, 자신과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졌던 개혁가들을 품지 못했고 더 철저하고 광범위한 사회적 개혁을 요구하던 민중들을 적대시함으로서, 개혁의 다양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했고 결국 미완의 개혁가로 남고 말았다. 그는 복음과 시대정신에 더욱 투철해야만 했다.

저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가 종교개혁 직전의 유럽교회와 많이 닮아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루터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응하면서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견지했던 저항과 비판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위기를 맞은 한국교회는 자신의 시대에 맞서 최선을 다했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한 전범은 아니었던 루터를 거울로 삼아 세상과 이웃을 위한 종교로 거듭나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세속사와 교회사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루터와 그 시대를 냉철하면서도 흥미진진한 필치로 그려 낸, 가슴을 뜨겁게 달구기보다 머리를 맑게 해주는 탁월하고 균형 잡힌 루터/종교개혁 입문서다. 분문을 장별로 자유롭게 요약해 지금까지 진행해왔던 루터 공부의 결론으로 삼기로 한다.

 

요 약

1장. 종교개혁의 발단과 루터의 투쟁

신화가 된 논제 제시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루터가 면벌부를 비판하는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의 성 교회 출입문에 못박아 게시한 것으로 알려진 1517년 10월 31일을 종교개혁 기념일로 지킨다. 이러한 주장은 루터 사후에 멜란히톤에 의해 처음으로 제시되었으나 그는 이 사건의 직접 증인이 아니었다. 이에 대해 가톨릭 신학자 아르빈 이절로는 루터가 여러 서신과 글에 남긴 진술들과 모순된다면서 논제가 성 교회에 제시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게시 여부를 증명할만한 결정적인 역사적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루터 역시 논제 제시를 긍정하는 듯한 말을 단 한 차례도 한 적이 없으며, 자신의 논제가 널리 알려지기를 한사코 원하지 않았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따라서 논제 제시는 루터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가톨릭교회에 대한 저항운동의 일환으로 루터를 영웅화하려던 주변 사람들의 욕망 때문에 만들어진 일종의 신화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10월 31일 루터가 두 주교에게 서신을 보냈고 시 교회에서 면벌부를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는 사실은 밝혀져 있으며, 설령 논제 게시가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루터가 과감하게 면벌부 문제에 대한 개선을 요청한 날이기에 기념일에 걸맞은 역사적 의미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면벌부 비판과 종교개혁의 시작 루터의 95개조 논제는 성경과 가톨릭의 전통에 기반하여 참된 참회의 의미를 되물었고, 교황이 남용하고 있는 사면 교리를 비판했으며, 면벌부가 구원에 대해 지니고 있는 효용에 대해 전면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종교개혁의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학술적인 것 즉 공개토론 방식을 통해 학자들 사이에 면벌부에 대한 의견을 모우고 공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95개조 논제는 주로 루터를 자신의 당파적 이익을 옹호하는 개혁가로 받아들이며 환영했던 도시민들이나, 루터의 학구적이고 논리적인 지적에 대해 공감했던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전 독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실패로 끝난 14세기 이후의 여러 개혁 운동들과 달리 이 논제가 대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등에 업고 종교개혁을 점화시키는 불꽃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면벌부에 대한 비판이 신학적으로 설득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독일 사회에 축적된 반교황 정서와 교회에 대한 불만이 분출될 계기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신학적인 발견 때문이 아니었으나 루터는 민중들이 그들이 처한 상황과 윤리적 사회적 나아가 정치적 차원 때문에 자신의 비판적인 글에 환호했던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다.

진리를 향한 외로운 싸움 루터의 신학적 발견과 통찰은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토대였지만, 면벌부에 대한 비판이 종교개혁이라는 큰 흐름으로 발전하기까지는 인문주의자들과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지, 인쇄술의 효율적인 활용, 작센 선제후의 보호 등과 같은 여러 상황과 조건들이 필요했다. 루터가 면벌부의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기대했던 것은 교회가 스스로의 문제를 인식하고 조속히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었으나, 가톨릭교회는 루터를 단속하고 파장을 최소화하는 데 급급했다. 1519년 6월 20일간에 걸친 라이프치히 논쟁은 제도교회의 입장을 지지하는 세력과 개혁세력의 대결이 전면화되는 계기였으며, 이 논쟁 과정에서 루터는 면벌부에 대한 비판을 넘어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부정했고 성경의 권위가 교황 혹은 종교회의의 권위보다 앞선다는 점을 강하는 등 그리스도교의 근본 혁신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 논쟁의 결과 루터의 명성은 독일은 물론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으며, 독일의 헤라클레스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교황청은 파문을 위협했으나, 루터는 교황의 교서를 불태움으로서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수도원과 대학의 울타리 안에 있던 루터를 종교개혁의 전쟁터로 이끌어낸 것은 시대의 요청이었다.

 

2장. 개혁사상과 시대의 저항

새로운 교회의 정체성 루터는 파문이 임박한 1520년에 이르러서야 종교개혁 3대 논문을 포함한 종교개혁의 근간을 형성하는 글들을 발표했다. 이 중 루터의 저술 가운데 독일 민족의 공감을 가장 많이 불러일으켰던 『독일의 그리스도교 귀족에게』는 만인사제론에 근거해 귀족, 즉 지배 계층이 정치적 사회적 책임을 다하여 교회와 사회의 개혁에 동참하거나 주도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성직자와 학자를 대상으로 한 논쟁적이고 신학적인 글로 가톨릭 신학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는 중세 그리스도인의 삶을 무덤에서 요함까지 통제하고 있던 성사제도를 포로상태로 비유하면서 일곱 성사 중 세례와 성찬만을 성경적인 것으로 인정하였다. 마지막으로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는『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는 이신칭의 교리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어느 것에도 메이지 않는 참된 자유를 얻고, 사랑으로 자발적으로 종이 되어 모든 것을 섬기는 존재라고 강조했다. 신앙에 있어서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라는 ‘오직 성경’과, 각 개인이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만 의로워질 수 있다는 ‘오직 믿음’, 그리고 세례받은 모든 신자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제사장이라고 주장하는 ‘만인사제론’과 같은 종교개혁의 원리들은 모두 이 시기 루터의 글과 사상에서 유래했다. 루터가 1520년에 발표한 글들에 담긴 신학사상은 당대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치명적으로 파괴했고, 독일은 물론 스위스의 개혁세력까지 아우르는 복음주의의 토대를 형성했다.

보름스 제국의회 루터의 개혁은 종교적 권위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는 세속적 권위인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1519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카알은 제국을 분열시키는 요인으로 부상한 루터 문제를 방치할 수 없었기에 1521년 보름스에서 개최된 제국의회의 청문회에 루터를 소환했다. 그렇지만 루터는 성경과 양심에 의지하며 주장의 철회를 전면 거부했으며, 그 결과 이단으로 선언되고 제국 내에서 모든 법률적 보호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루터는 그 이후에도 제한받지 않고 개혁사상을 계속 글로 발전시킬 수 있었고, 그가 쓴 글은 독일 전역에서 출판되어 확산되었다. 독립적인 성경의 영방들로 이루어진 신성로마제국의 독특한 정치구조와 프랑스 및 투르크와의 전쟁을 위해 종교개혁 진영에 서 있던 제후들의 경제적 ‧ 군사적 도움이 필요했던 황제의 상황 덕분에 이단자 루터의 신앙고백이 보호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일관되게 루터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이는 제후 자신의 신앙적 신념 외에 루터가 제후들의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개혁을 추진해 왔으며 종교개혁을 후원하며 교회를 자신의 감독하에 두는 것이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성경번역과 독일어 성경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탈출하여 비텐베르크로 돌아가던 중 프리드리히에 의해 납치되어 10개월간 바트부르크에 은신하게 된 루터는, 어휘가 빈곤하여 성경의 의미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는 편견을 깨뜨리고 불과 11주 만인 1522년 9월에 독일어로 된 우수한 신약성경 번역을 완성했다(9월 성경). 또한 9월 성경이 인쇄되는 동안 구약성경의 번역에도 착수하여 1534년 9월 이를 완성했다. 그는 번역문이 독일어의 고유한 문체와 언어적 특징을 잘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문자적인 번역을 고집하기보다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과감한 의역이나 단어의 추가도 꺼리지 않았다. 또한 루터는 성경 전체가 일관성과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리스도와 복음이 성경의 중심 주제라고 주장했으며, 각 책의 중요도를 중심 주제와의 관련성 속에서 재평가했다. 따라서 루터는 요한복음 ‧ 바울서신 ‧ 베드로서신을 다른 책들보다 높게 평가했으며,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으로 평가절하했다. 종교개혁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꼽히는 독일어 성경번역은 모든 신자들이 성경을 직접 읽을 수 있도록 그들의 일상어로 옮김으로서 성경 해석의 독점권을 아래로부터 무너뜨리는 ‘종교혁명’을 가능케 했으며, “제화공이나 여성들도 성경에 대해 토론하는” 문화의 기반을 닦았다.

인쇄술과 새로운 매체 인쇄술은 루터의 개혁을 단기간에 강력한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종교개혁은 인쇄술과 대중매체를 동원한 캠페인이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던 최초의 대규모 사건이었다. 루터가 새로운 독자층인 대중을 상대로 전단지와 소책자라는 새로운 대중매체를 통해 독일어로 글을 쓰기 시작하자 출판 시장은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종교개혁은 대중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 작가와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베스트셀러였던 루터의 책들은 출판이 금지되었으나 일부 출판업자들은 그의 종교개혁사상에 설득되어 목숨까지 내놓고 활동했다. 소책자와 전단지에는 축적이 필요한 정보보다는 주로 토론거리가 될 만한 주장이나 의견들이 담겨 있었으며, 이는 당대인들에게 종교적 사회적 사안들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 사회적 이슈에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가톨릭 성직자들 역시 종교개혁을 비판하는 책들을 출간했으나, 현학적이고 딱딱했을 뿐 아니라 라틴으로 씌어진 그들의 글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종교개혁 시대에 나왔던 소책자들 중 속인들이 쓴 책에 등장하는 종교적 평등사상은 루터의 만인 사제론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없으며, 이렇게 평민 작가들이 보여준 다양한 글과 활동은 종교개혁이 루터가 일사분란하게 이끈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3장. 위기와 돌파 그리고 루터의 유산

동지들과의 협력과 갈등 1521년 루터가 보름스 제국회의를 향해 떠난 이후 비텐베르크에서 개혁을 주도한 칼슈타트나 츠빌링은 이종배찬의 시행, 성유물의 해체, 미사강요의 종결 등 소위 비텐베르크 운동이라 불리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구했으며, 츠비카우에서 온 급진적인 개혁자들 역시 유아세례 배격, 성상제거, 임박한 종말, 무력에 의한 사회전복 등을 주장했다. 이에 선제후는 그동안 진행되었던 변화를 원상으로 되돌릴 것을 명령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루터는 연약한 형제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그간 이루어진 개혁의 일부를 원상으로 복귀시켰다. 그는 이 과정에서 옛 동지들이나 그에게 기대를 걸고 찾아온 급진 개혁가들을 현실적인 개혁 목표의 달성을 위협하는 열광주의자나 거짓 형제들이라 비난하고 배척했다. 루터의 이러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태도와 지도력은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개혁을 구출한 행위이기는 했지만 유럽적 차원의 종교개혁운동이 협력을 필요로 하던 시기에 그것을 가로막은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했다. 그 이후 루터의 작센 선제후에 대한 의존은 더욱 높아졌고, 그가 홀로 개혁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는 위험한 상황이 초래되었다.

농민전쟁과 좌절된 대중운동 1524년부터 시작된 농민전쟁은 봉기의 명분을 복음과 하나님의 법에서 찾았으며, 농민들은 그들의 주장이 비텐베르크 개혁가들의 사상과 동일선상에 있다고 믿었다. 루터는 처음에 귀족들의 불의함과 횡포를 질책함과 동시에 농민들에게도 세속 정부에 대한 반란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진 합법적 권위와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라며 명백한 불의에 대해서조차 인내해야 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농민들의 약탈에 의해 황폐해진 현장을 목격한 후에는 입에 담기 힘든 폭력적 언어를 동원해 농민들에 대한 살육행위를 촉구했다. 종교개혁은 본질상 억압적인 중세 봉건질서에 대한 변혁을 포함하는 사회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으나, 중세적 신분질서를 절대적으로 간주했던 루터는 종교개혁이 사회적 정치적 성격으로 발전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려 했으며, 제후나 귀족이 권력을 남용해 농민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현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제후들의 살육과 무차별한 진압을 목도한 사람들은 루터를 ‘제후들의 아첨꾼’이라고 비난했으며, 억압받던 농민들과 수공업자들은 루터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개혁운동으로부터 이탈하게 되었다.

교회의 재조직과 영방교회 농민전쟁 이후로 종교개혁은 공동체 혹은 민중 종교개혁에서 제후의 종교개혁으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으며, 종교개혁과 영방화라는 두 흐름이 수렴되면서 점차 국가 및 영방에 종속된 영방교회 혹은 도시교회가 형성되었다. 루터가 요청하고 영방군주의 승인으로 이루어진 선제후령 전체에 대한 교회시찰 활동은 영방교회 건설의 토대를 놓는 기획이었으며, 그 결과 1530년경 루터파는 가톨릭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지닌 실질적 종파로 탄생했다. ‘비상주교’인 제후의 통제를 받는 일종의 국가교회인 영방교회는 국가 관료 기구적 속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목사들은 영방의 지배력을 궁벽한 시골까지 연결해주는 통로로 작동했다. 제후의 입장에서는 영방교회의 확립이 정치권력과 경제적 이익을 강화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었고, 이는 독일 뿐 아니라 북유럽의 많은 제후들이 루터파를 수용하겠다고 결정한 주요 동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제후에게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맡겼기 때문에 교황교회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을지 낙관할 수 없었다. 개신교 예배에서는 미사의 희생제사적 성격이 폐지되고 설교가 예배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회중찬송을 도입함으로서 사제 중심의 예배로부터 회중과 함께하는 예배로 전환되었다.

개혁세력의 분열 1525년 이후 제국 내의 개혁가들은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가 실체로 현존한다는 루터파와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할 뿐이라는 츠빙글리파로 나뉘어 치열하고 집요한 논쟁을 벌였다. 개혁세력의 항의가 거부된 제 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 이후 헤센의 백작 필립은 개혁세력의 분열을 막고 가톨릭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비텐베르크와 취리히의 개혁가들을 마부르크로 초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으나 기본적인 신앙고백이 모두 일치하지 않으면 신앙의 형제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 루터의 거부로 끝내 화해에 이르지 못했다. 그 후 개혁세력은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에 멜란히톤의 주도하에 루터파 신학의 교리적 기준이 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제출했으나, 스위스의 개혁가들이 이 고백이 보여준 타협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더욱 혁신적인 개혁을 추구함으로서 개혁세력 내의 분열이 더욱 굳어졌다. 루터의 사후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이뤄진 조약에 따라 마침내 루터파는 독일 내에서 가톨릭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게 되었으나 이 조약의 결과 제후들에게만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고 개신교 지역 내에서도 종교의식 및 신조를 절대화하게 되어 자유를 추구하려던 종교개혁은 새로운 형태의 불관용과 동일시되는 역설을 낳게 되었다.

마지막 전투 유대인 문제 루터의 저작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대하여』는 나치 시대 반유대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인종주의적 선전에 활용될 정도로 잔인하고 폭력적이기에 루터를 반유대주의의 아버지로 만들었다. 그는 평생 반유대주의로 일관했으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루터는 유대인들이 동일한 성경을 사용하면서도 자신과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거나 용납할 수 없었으며, 그들도 잘못을 알지만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또한 루터는 교회를 공격하는 교황주의자, 열광주의자, 투르크인, 유대인 등을 악마의 종어로 지목하면서 임박한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은 최선을 다해 그 적들을 물리치고 교회를 방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터에게 유대인은 그리스도교 세계를 파괴하는 악마의 세속 대리인이었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께 거부된 자들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루터의 인식이 16세기 전반 유럽인의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 있던 것은 아닐지라도, 복음의 정신에 일치하거나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부합한다고 인정하기는 어렵다. 루터는 약점도 많았고 특히 노년에 가까울수록 절제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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