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영] 우리 주변의 호모 사케르는 누구인가?
[김택영] 우리 주변의 호모 사케르는 누구인가?
  • 김택영
  • 승인 2018.05.1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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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의 호모 사케르는 누구인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3:28)

오늘날, 교회가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심지어 개독이라는 말이 회자되며,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신뢰를 받기보다 잃게 되는 조건이 되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의 교회는 적대자들에게조차 윤리적으로 인정을 받는 공동체였다. 일본 순사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교인들을 색출해낼 때조차도, 예배가 끝나고 교회 문 밖에서 교인들에게 독립 운동을 하는 지만 물어봐도 충분하다는 상부의 지침을 받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도 이미 주지의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적대자의 인정은커녕 점점 더 불신의 기호가 되고 있다. 우리의 직장이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히는 것은 점점 더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움츠려 들었고 기독교의 신앙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공적 신앙보다 내 자신과 삶을 위로하는데 그치는 개인적 신앙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의 신앙이 개인적 신앙이 아닌 공적 신앙임을 선언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하신 일이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공적인 일임을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는 그 당시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장 큰 갈등 가운데 있었던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의 하나됨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셨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과 헬라인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가 없는 두 그룹이었다. 이는 단순히 인종적 이슈가 아니었다. 이는 종교적 신념에 관한 차이였다. 오늘날 아랍인과 미국인의 차이처럼 종교적 신념은 관계에 깊은 골이 패이게 한다. 그렇기에 이 두 그룹을 하나가 되게 할 접점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또한 종과 자유인 이 두 그룹의 관계를 하나가 되게 할 접점은 없었다. 자유인들이 종들의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들의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고대 로마에는 가장 소외된 자들이 있었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 76)은 이런 사람들을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고 부른다. 호모 사케르는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여도 되는 생명이다. 이는 호모 사케르가 처한 이중 배제의 상황을 묘사한다. 이들은 인간 법질서 외부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여도 상관없다. 하지만 희생 제의에 사용되는 제물들처럼 완전히 인간 법질서를 떠나 신의 질서로 편입되지도 않는다. 거칠게 말하자면, 법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사회 안에 존재하고 활용을 당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호모 사케르가 있어야 국가 권력을 유지할 수 있고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독일 나치는 유대인들을 배제시키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게르만 민족으로써의 정체성을 드높였다. 동시에 필요한 노동력을 유대인들에게 착취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중 배제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우리는 어떤 이들에 대해 뒷 담화를 하면서 우리의 자존감을 세운다. 왜냐하면 뒷담화를 하는 심리적인 기본 전제가 내가 그 사람보다 낫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 사람을 뒷담화를 통해 배제하고 비지니스 상 유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또 다시 배제시킨다.

 

빈센트 반 고흐, 씨뿌리는 이
빈센트 반 고흐, 씨뿌리는 이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호모 사케르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 호모 사케르는 야만적인 고대에만 있었던 것인가? 오늘 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도 법적인 신분은 없지만, 사회에 속해있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 앞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그분들이 법적인 신분이 없어 존재하는 이유만으로 국민들은 상대적으로 국민으로써의 정체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국가는 교묘한 방식으로 법적인 신분이 없는 상태로 그분들의 노동력을 이용한다. 이와 같이 어떤 면에 있어서 문명은 발전했지만, 어떤 면에 있어서는 문명은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배제하는 자들과 배제당하는 자들의 갈등을 더욱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절망스러운 상황 가운데 약 10년 전부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몇몇 영향력 있는 철학자들이 더 이상 어떠한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에 소망이 없음을 발견하고 신학적인 전회(theological turn)”을 이루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는 철학자인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 69), 그리고 알렝 바디우(Alain Badiou, 81)가 사도 바울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모두가 무신론자라는 사실 또한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특별히 알렝 바디우는 <사도 바울>이라는 책을 펴내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인간의 사상은 아무리 소외되고 있는 사람을 고려한다고 할지라도 자기중심적인 사상이 될 수밖에 없고 타자를 소외시킬 수밖에 없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라는 철학자는 위대한 모순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하이데거는 그 당시 누구보다 니체의 관점주의의 () 개념을 적용하여 본래적인 실존을 추구하며 타자를 십분 고려하는 철학을 하였지만, 결국 나치즘에 동조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모든 사상은 그 사상을 만드는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전체 사상이 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사상은 의도치 않게 타자를 배제시키고 소외시킬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와 같은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 사상은 폭력이 될 수도 있다. 200629살의 한 청년이 아르헨티나로 휴가를 가서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을 보았다. 아이들의 발에는 물집이 잡혀 상처가 나있었다. 봉사 단체의 기부에만 의존하다 보니 신발 수요에 공급을 맞출 수 없었고, 아이들한테 맞는 사이즈의 신발을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청년은 신발이 한 켤레씩 팔릴 때마다 신발이 없는 아이들에게 새 신발을 한 켤레씩 주는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다. 바로 이 신발 회사가 내일의 신발(Tomorrow’s Shoes)’라는 뜻의 탐스(TOMS)의 시작이었다. 1년이 지나지 않아 그는 아르헨티나의 아이들에게 1만 켤레의 신발을 기부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20137, 탐스가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에게 나눠준 신발은 1000만 켤레를 넘어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젝트는 도리어 현지 산업기반을 무너뜨리게 되었다. 이와 맥을 같이하여 나이지리아에서는 기증된 헌 옷 때문에 1992년부터 2006년 사이 일자리가 543000개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와 같이 타자를 위한다는 사상은 도리어 폭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디우는 이러한 배제와 소외를 낳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보편적 진리를 찾는다.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보편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특별히 보편적 개별성이라는 개념으로 개별성이 파괴되지 않으면서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연구한다. 바디우는 진리가 있다면 언어로 다 표현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언어로 다 설명될 수 있는 진리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진리는 교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더 큰 것이다. 하나님을 과학적으로 다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진리는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명기 29:29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진리에는 감추어 두신 신비와 계시된 말씀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17:3)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진리를 영원토록 알아가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바디우는 진리를 언어로 다 설명하려는 사상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건으로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사건이다. 진리-사건은 이 세상에서의 사상이나 이미지에서 따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중심적 사상으로 다른 사람들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무엇인가를 말하기 시작한다면 나의 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디우가 특별히 집중하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이 세상의 자연법칙에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상징이기에 언어를 뛰어넘는 보편적 진리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브라함, 이삭,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알려주신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이스라엘의 삶에 개입하신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사건들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하신다. 또한 비유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하신다. 비유는 비유하는 대상을 한 번에 규정해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의미를 찾아가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3:14)”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떤 한 인간의 언어에 규정될 수 없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어떤 의미에도 의존하지 않으신 영광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나 바디우가 놓치고 있는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이 보편적 진리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보편적 진리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은 신학이 아닌 신앙이 제공해주는 힘이다. 유대인과 헬라인을 하나가 되게 하도록 하는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답의 신비가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초점을 집중하여 행하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구속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지금도 예수님께서 못 박히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못박혀야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선언해주고 있다.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나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적대자였다(1:28). 이것이 민족과 계층을 뛰어넘는 우리의 보편적인 실존인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러한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사건은 우리 안에 보편적인 사랑을 일으키신다. 이로써 우리는 조건 없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동안 배제하는 당하는 자와 배제하는 자가 하나가 될 수 없었던 이유는 하나가 되기 위한 조건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사회에 있어야할 교회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십자가의 사건에서 경험하여 무조건적으로 호모 사케르와 함께 하고 섬기는 보편 교회이다. 이는 국가, 민족, 그리고 심지어 교회를 위해 진리를 설명하며 이용하는 것에서 벗어나 십자가의 사건으로 주어진 외부적인 은총을 누리는 것으로 가능한 것이다. 진리는 국가, 민족, 교회 중심적 논리에 갇힐 수 없는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에 선교사로 있었던 2005년에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NGO 소속으로 알마티에 있는 소년원에 출입하며 수감되어 있는 아이들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1년이 되지 못해서 현지 법무부에서는 출소하는 아이들을 국가 기관이 아니라 우리 NGO에 맡겼다. 당시로서는 보호 감찰 기간에 있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파격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총기 살인, 마약 판매 등의 강력 범죄에 연루되어 있었던 아이들이 가끔 위협을 하였기 때문에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노동을 하였고, 함께 웃었고 함께 울었다. 이 청소년들이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라고 고백할 때마다 거론되는 사실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갈등의 골이 깊은 카작인, 우즈벡인, 고려인, 러시아인, 타타르인, 그리고 한국인까지 한 건물에 모여서 살아간다는 사실이었다. 친구들의 그러한 나눔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보편적인 진리대로 살아갈 수 있는 이 힘이 바로 십자가의 보편적인 사랑이라고 고백하곤 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자체가 메시지가 되어 많은 현지인들이 하나가 되는 진리를 경험하곤 하였다. 국가가 할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을 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인 것이다. 그래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비폭력 저항으로 이끌었던 인권운동은 단순히 흑인들 만을 위한 해방 운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성경의 보편적 진리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인권의 회복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 아시안인들 또한 비자를 발급을 받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이 십자가의 보편적 사랑은 시간에 관해서도 보편적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영원하다. 왜냐하면 죽음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기(5:8)” 때문에 우리의 사랑도 죽음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사랑을 해야겠다는 부담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를 그의 책, <산상설교집>에서 기독교의 영광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영광이라고 선언한다. 구소련의 철의 장막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가운데 무너진 것도 사실이지만, 내부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의 목숨 건 사랑으로 인해 이데올로기의 균열이 생긴 것이다.

혹한의 겨울밤이었다.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매서운 바람을 뚫고 한 그리스도인이 도망을 치고 있었다. 뒤에는 어두움의 정적을 깨는 총성과 함께 KGB 비밀경찰이 따라오고 있었다. 한 참을 도망을 가다가 갑자기 풍덩하는 소리를 그리스도인은 듣게 되었다. 급하게 뒤를 돌아보니 자신을 따라오던 적대자가 살얼음판을 잘못 밟아 그만 물에 빠지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순간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윽고 차디찬 물에서 새파랗게 죽어가는 그가 눈에 밟혔고 가던 길을 돌이켜 자신의 적대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는 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원수 되었던 자신을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형벌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었다. KGB 비밀경찰을 그리스도인의 손을 잡고 나왔지만, 나오자마자 그리스도인을 붙잡아 총살을 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목숨 건 사랑은 여러 형태로 공산당 간부들의 가슴을 울렸다. 이윽고 그들은 자신들이 신봉하고 있었던 이데올로기에 생명을 다해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힘이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고 적지 않은 공산당 간부들이 옷을 벗고 신앙을 갖게 되는 일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십자가의 보편적 사랑은 철의 장막과도 같았던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렸던 것이다. 이 십자가의 보편적 사랑은 또 하나의 어떠한 이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심지어 적대자들을 위해 생명을 다한 사랑 그 자체이다. 죽음도 막을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인 것이다.

남측공연단의 공연을 감상중인 북한 관람객
남측공연단의 공연을 감상중인 북한 관람객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졌고, 612일에 싱가포르에서 개최되는 북미정상회담을 우리 민족은 앞두고 있다. 이러한 세계사적 변화 앞에 있는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더 이상 인간의 자기 중심적인 사상이나 이데올로기가 다른 이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키지 못하도록 국가보다 먼저 이중 배제를 겪고 있는 호모 사케르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십자가의 보편적 사랑에 침몰하여 섣부른 도움과 원조가 아닌 호모 사케르와 함께 웃고 함께 울어야 한다. 지젝이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는 쉽게 이데올로기의 결핍을 인정하지 않고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빠지는 결핍된 존재이다. 수정된 자본주의든, 사회 민주주의든 자기중심적으로 구성되어 타자를 배제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물론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는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아직의 변증법적 긴장 가운데 보편 교회는 끊임없이 이데올로기의 환상에 저항하고 이중 배제 가운데 처해있는 호모 사케르와 함께 하여야 한다. 그러할 때 교회는 교회의 빛과 소금이 아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은 죄책감을 떨어버리거나 문제해결과 소원성취를 위한 개인적 신앙이 아닌 갈등의 회복의 공공선을 추구하는 공적 신앙인 것이다. 우리 주변의 호모 사케르는 누구인가? 십자가의 보편적 사랑으로 그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며 함께 살아가자. 우리 모두 그들에게 죽음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손을 내밀자. 그렇게 공론장으로 나아가서 세상의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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