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사도적인 교회
[이택환] 사도적인 교회
  • 이택환
  • 승인 2018.05.12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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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행 1:15-17, 21-26

우리교회는 주일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주현절, 사순절, 삼위일체주일, 성령강림주일,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에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는 것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으로 신앙고백 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어떤 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든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구원 및 교회에 대한 기본 교리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도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역사적으로 그것을 고백해온 공동체가 달랐습니다. 사도신경은 750년경부터 서방교회가 널리 사용해 온 신앙고백문입니다. 서방교회란 로만 가톨릭을 포함한 개신교 전체를 말합니다. 반면, 동방교회, 즉 그리스정교, 러시아정교와 같은 정교회는 지금도 사도신경이 아닌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사용합니다. 그러면 왜 동/서 교회가 서로 다른 신경을 사용하게 되었을까요?

원래 고대 교회는 동/서 구분 없이 하나였고 신앙고백문도 하나였습니다. 그런 고대 교회가 통일된 하나의 신앙고백문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였습니다. 그 때 최초의 공동 신앙고백문으로 니케아신경이 제정되었습니다. 그 후 교회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니케아신경을 일부 수정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을 공인합니다. 그런데 약 600년경부터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 지역 교회들이 점차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필리오케’라는 문구를 삽입했습니다.

필리오케란 라틴어로 “그리고 아들로부터”라는 뜻입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 가운데 “우리는 주님이시고, 생명의 부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시고”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서방 지역 교회들이 여기에 ‘필리오케’, 즉 “그리고 아들로부터” 라는 문구를 첨가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성부 하나님뿐 아니라, 성자 그리스도로부터도 나온다는 어거스틴의 신학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서방교회는 이후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보다 사도신경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방 지역의 교회들은 원래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후 1054년, 기독교가 동/서방교회로 갈라질 때, 당시 교회가 분열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신학적으로는 이 필리오케 문제가 가장 결정적인 이슈가 되었습니다. 마치 1959년 한국의 장로교 합동/통합 교단이 분리될 때, 온갖 정치, 경제적 문제들이 있었지만, 겉으로는 에큐메니컬 운동, 즉 교회가 세계교회일치 운동에 참여하느냐 마느냐 하는 신학적 이슈가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기독교의 분열하면 대부분 1517년 마틴 루터 종교개혁만 생각하지만, 이미 그 500년 전, 교회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의 대 분열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상대방이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갔다고 주장하는데, 역사적으로는 당시 세계 5대교구 가운데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디옥이 동방교회에 남고, 로마만 서방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동방정교회는 스스로를 정통보편교회(Orthodox Catholic Church)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서방교회, 즉 천주교회는 로만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교회가 평상시에는 서방교회 전통을 따라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지만, 주현절, 사순절, 삼위일체주일, 성령강림주일,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에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온 세상의 교회가 원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아주 보수적인 개신교회, 그래서 세계 교회와 하나 되기보다는 스스로 분파주의를 택하는 교회 가운데는, 사도신경이 로만 가톨릭의 유산이라 하여 사용하지 않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사도신경을 당연히 사용하고, 또 교회력이 바뀌는 절기에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도 사용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부활절과 성탄절에는 우리교회가 여전히 사도신경을 사용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 때는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아직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이 익숙지 않을 뿐 아니라, 어렵고 깁니다. 사실 어른들에게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어린이-어른 연합예배가 있는 부활절과 성탄절에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익숙한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전 세계의 모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6년간 매년 한 차례 다른 교단, 또는 같은 교단의 다른 교회와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기독교장로회 경동교회, 기독교한국루터회 중앙루터교회, 기독교대한감리교 청파교회, 우리교단의 그빛교회, 기독교대한성결회 더함교회, 그리고 올해는 6월 3일 성령강림주일 후 두 번째 주일에 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 방문예배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성 니콜라스 대성당은 서울에 오직 한 곳 밖에 없는 비잔틴 양식의 성당으로 마포구 아현동, 애오개역 부근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고 특별히 익숙하지 않은 정교회의 역사까지 거론한 것은 단지 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 방문 예배를 앞두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늘 사도행전 말씀과 관련하여,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에 나오는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라는 문구, - 이 문구는 우리교회 주보 1면에 우리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소개하는 첫 번째 모토이기도 합니다. - 그 중에서도 사도적인 교회가 과연 어떤 교회인가를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최초의 교회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했을 때, 성도들이 모여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탄생 시점을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을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마가의 다락방에는 12사도만 모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야고보를 비롯한 예수님의 동생들, 그리고 요셉과 맛디아, 그 외에도 이름 모를 여성들과 많은 무명의 그리스도인들, 모두 합하면 약 120명가량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교회는 처음부터 사도들만 모인 곳이 아니고, 유명한 사람들만 모인 곳, 혹은 남성들만 있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사도가 아닌 사람,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고, 여성들도 꽤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교회는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해 세워진 교회(가령 군인교회 등)가 아닌 한,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교회도 늘 보편교회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요즘은 사업이나 동아리, 친목 활동을 위해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것 중요합니다. 하지만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호모뒤마돈)는 같은 호흡, 같은 열정을 뜻합니다. 호흡이 다르면 엇박자가 됩니다. 열정은 있는데, 방향이 각각 다르면 힘 있는 기도가 되지 못합니다. 현재 우리 시찰 안에도 두 교회가 내부의 문제로 지난 5년, 혹은 그 이상 노회, 총회와 사회 법정을 오가며 끊임없이 분쟁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도 기도는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호흡이 맞지 않고, 열정은 뜨거워도 저마다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교회가 어떤 선한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가 무엇을 위해 한 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했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신 마지막 말씀 -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 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성령은 언제 임하실 것인가? 그 때 교회가 어떤 권능을 받을 것인가? 또 장차 교회가 과연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하면, 마음을 같이하여 전심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일어나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사실 제안이라기보다 시편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에 전하신 말씀, 즉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설교 내용이 유다의 배신과 사망으로 공석이 된 12사도의 한 자리를 채우자는 것이었습니다. 얼핏 보면 많은 사람들이 실망할 내용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교회에 모여서 처음 한 일이 “한마음으로 기도에 힘쓴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기도 후, 그들이 한 일은 전도도 아니고, 병들고 가난한 이웃을 돌본 것도 아니고, 고아와 과부들을 살핀 것도 아니고, 단지 사도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즉 교회의 권력을 정비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사도적 교회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의 기초가 된 12사도의 직무는 옛 이스라엘 12지파가 감당하지 못한 일, 즉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일을 새롭게/참되게 감당할 새 이스라엘/참 이스라엘의 직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이스라엘, 참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12사도의 정체성은 그들이 단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육신의 자손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합니다. 일찍이 이스라엘이 감당하지 못한 일을 그들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시기까지 신실하게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이 이 모든 일을 신실하게 성취하셨다는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그렇게 세상에 새 창조세계의 완성을 향해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해 최초의 교회는 반드시 12사도, 즉 새 이스라엘, 참 이스라엘 12지파를 새롭게 구축해야 했습니다. 교회의 정체성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옛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다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12사도의 빈자리를 채우는 일을, 단지 교회의 권력을 구축하는 행위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얼마 후 야고보 사도가 순교했지만, 예루살렘교회는 야고보를 이을 새로운 사도를 선출하지 않습니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적인 교회는 오늘날 교회 안에 사도직을 계승한 목사나 신부, 또는 21세기 신사도와 같은 존재를 통해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사도성은 오직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이 사도들이 증언에 근거할 때 드러납니다. 따라서 교회가 갑자기 사도의 후계자를 세우자며, 뜬금없이 제비뽑기를 시도한다면 그것은 오늘 본문과 전혀 무관한 내용입니다.

사도들의 증언에는 늘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적인 교회는 늘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를 증거합니다. 그런 교회는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결정적으로 이 땅에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에서 제시된 사도의 전제조건 역시,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22절,

22절,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오늘 우리교회는 공동의회를 통해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됩니다. 우리교회가 사도적인 교회라면, 교회가 결정을 내리는 방식도 사도들이 전한 하나님 나라 방식을 닮아야 합니다. 그것은 먼저 우리가 예수님의 본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특정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그에게 홀로 십자가를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저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고통을 나누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에 좀처럼 없기에, 세상이 보지 못하는, 그래서 세상이 믿지도 못하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새로운 창조를 낳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 흔한 것, 뻔한 것, 그래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과는 다릅니다. 오늘 우리의 결정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절망에서, 죽었던 생명이 다시 부활하는 그런 새로운 창조를 낳는 결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은 홀로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시고, 우리가 그 분의 지체가 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멘.

 

글쓴이 이택환 목사는, 그소망교회 담임 목회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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