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교회인가 '그것'의 교회인가?
'너'의 교회인가 '그것'의 교회인가?
  • 박진아
  • 승인 2018.04.16 0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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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여!"라는 부름과 그에 대한 응답이 울려 퍼지는 교회를

언젠가부터 교회가 싫어졌었다. 이상하게 교회만 생각하면 화가 나고 교회 안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교회는 항상 최대한 빨리 떠나고 싶은 곳이었고, 도망치고 싶은 곳이었다. 이런 반응이 내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심한 것 같아서, 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교회에 대한 나의 이런 부정적인 반응은 어떤 결정적인 사건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 네 살 무렵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겪었던 목사님들과 교회 사람들에 대한 어떤 분노와 실망감들이 진흙더미처럼 소리 없이, 그러나 매우 무겁게 차근차근 쌓여 굳어버린 결과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뉴스를 통해 들려지는 교회에 대한 여러 이야기는 굳어버린 진흙 벽에 시멘트를 부어 버리는 것 같은 작용을 했다. 특히 뉴스를 통해 교회 관련해 여러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비록 내가 그 사건의 직접적 당사자는 아닐지라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서 그 안에 연결된 나 또한 직접적인 정신적 상해를 입는 것과 같은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나는 교회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마르틴 부버의 <너와 나>를 읽기 전까지 나는 그것이 단지 교회의 부조리한 모습들, 권위주의적인 모습들, 목사와 교인들의 표리부동한 모습들 때문에 화가 났고 실망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왜 교회를 이렇게까지 싫어하게 된 건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가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닌 '나와 그것'의 관계로 점철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교회 자체가 '그것'의 장이었다. 그것이 교회란 대체 본질에서 무엇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그런 고민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그곳이 정말로 부자연스럽게 느껴졌고, 비현실적 공간으로 느껴졌고 그 안에 있을 때의 나는 마치 삐걱 소리가 나는 구체관절인형이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빠지고 만 것이다.

'영원한 너'가 임재하는 그곳이, 그래서 존재와 존재의 순수한 만남이 이루어져 천국과 같은 기쁨이 흘러넘쳐야 할 곳이 하나의 경험과 이용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그것들의 요란함만 가득한 곳이었기에 그토록 괴로웠다. "''!"라고 부르고 싶었고, "''!"라는 부름에 답하고 싶었다.

교회는 그런 만남의 장이기를 마음속 깊숙이 바랐고, 교회는 그런 곳이라 생각했었고, 또 그런 곳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가 경험했던 교회는 컨베이어 벨트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시스템 속에서 흘러가는 대로 내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따라가면 언젠가는 만남의 순간이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그것은 언제나 또 다른 실망으로 찾아올 뿐이었다.

새가족반을 수료하고, 등반하고, 셀 모임에 참석하고, 알파 코스를 하고, 유치부 교사를 하고, 찬양팀을 했지만 언제나 나는 새가족반의 새로운 사람이었고, 매주 있는 등반을 하는 불특정다수 중의 하나였고, 알파 코스에 참석하는 청년 중의 하나였고, 유치부 교사 봉사 활동을 하는 교인 중의 하나였고, 찬양팀의 일원이었을 뿐 그 수많은 모임에서 "''!"라고 부름을 받은 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나 또한 부른 적이 없었지만) 그런 만남의 장을 찾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말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아. 교회라고 뭐 다르겠어? 하나님만 바라보고 신앙생활 하는 거지, 사람보고 하는 거 아냐. 신앙이란 그러면 안 되는 거야."

그러나 그렇기에 그곳이 그렇게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만일 하나님과 합일하는 그 풍요한 순간이 이 구차한 지상의 순간과 아무런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 세계에서 아직도 피나는 생활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는 나에게 그것이 무슨 의의를 지니게 된다는 말인가?" (마르틴 부버, 나와 너, 대한기독교서회(2001), p.121)

마르틴 부버의 이 물음은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지금까지도 교회에 대한 나의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다. 신학을 하면서 신학 함의 자유와 또 신학함의 빚짐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있다. 빚짐은 언제나 교회와 연관이 되었다. 교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교회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으로 전락한 교회로 들어가 또 다른 '그것'이 되는 것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다른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고 순수하게 홀로 마주 서 있는 나와 너의 만남이 일어날 때, 공중에 찬란히 흩뿌려지는 존재의 입자들이 멈춰진 과거를 생동감 넘치는 현재로 바꿀 때, 그때 비로소 나와 네가 현존하게 되는 그 장이, 교회이기를 바란다. '영원한 너'의 품 안에서 그 모든 만남이 울려 퍼지는 종소리처럼 일어나기를 바란다. "''!"라는 부름과 그에 대한 응답이 천사들의 합창처럼 울려 퍼지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에서 과연 그런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이 큰 의문이다. 나는 또 그렇게 누군가를 부를 수 있을까?

 

글쓴이 박진아는, 목회학 석사(M.Div) 과정을 막 마친 고민많은 그리스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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