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춤추고, 꿈꾸기를 멈추지 말 것
계속해서 춤추고, 꿈꾸기를 멈추지 말 것
  • 최은
  • 승인 2018.04.06 23: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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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상황 328호 최은의 시네마 플러스] 지미스 홀(2014)

역사는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은 치열한 독립운동과 내전을 치르던 1920년 전후 아일랜드의 이야기입니다. 의사인 동생 데미안(킬리언 머피)은 신학을 공부한 형 테디(페드레익 들러니)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합니다. 폭압과 밀고, 배신과 처벌 끝에 아일랜드와 영국은 휴전을 선언하게 되는데요. 192112월 영국 연방자치령으로 아일랜드자유국이 설립됩니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독립군은 이 일로 휴전 찬성파와 반대파, 두 갈래로 나뉘어요. 테디가 찬성파인 자유국군에 합류하고 데미안이 저항군에 남으면서, 생사를 걸고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데미안과 테디 형제는 이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어야 합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에 휘말린 한 가족과 개인의 비극이지요.

그런데 이 영화가 드러낸 아일랜드 공동체의 갈등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한때 성직자의 길을 가려했던 테디는 지주와 자본가들로부터 독립군 지원금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착취를 눈감아주어야 한다고 믿는 쪽이었습니다. 반면 데미안은 아일랜드 재판국의 판결대로 악덕 자본가는 처벌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데미안은 또 교회가 늘 권력과 부자들의 편이었다고 비난하며 신부의 강론 도중에 성당을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이처럼 휴전 협정 이전에 이미 균열을 보인 두 형제의 신념은 당대 아일랜드를 곤란하게 했던 종교와 정치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폭로합니다. 데미안처럼 교회를 비판하고 민중의 편에 섰던 독립 운동가들은 빨갱이에 적그리스도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어요. 예나 지금이나, 유럽이나 대한민국이나 종북 프레임과 이단 딱지는 권력의 편에 선 이들에게는 가장 강력한 와일드카드였던 모양입니다. 2006년 제작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켄 로치에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겨주었습니다.

 

두 개의 춤: 희망과 해원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감독 켄 로치는 2014년에 다시 한 번 아일랜드 공동체를 다룬 영화 지미스 홀을 만듭니다. 영화의 배경인 1932년은 데미안 형제의 독립투쟁이 가족살해의 비극으로 막을 내린 지 10년 후입니다. 좌파 정권이 갓 들어서서 해외로 망명했던 좌파 인사들이 돌아오고 갇혔던 이들이 풀려나던 희망의 때였죠. 하지만 보수 가톨릭 사회에서는 여전히 빨갱이와 적그리스도가 교회의 가장 큰 적이자 공동체의 해악이었어요. <지미스 홀>은 쫓기다시피 미국으로 떠났던 지미(베리 워드)1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지미의 귀환은 즉각 두 가지 반응을 일으킵니다. 셰리단 신부(짐 노튼)와 자유국군은 어떻게든 지미를 다시 몰아내려고 합니다. 반면 저항군 시절 동료들과 젊은이들은 지미를 열렬히 환영합니다. 10년 전 마을회관을 세우고 주민들에게 춤과 노래, 시와 미술을 가르쳤던 지미의 존재는 그들에게 이미 전설이었어요. 땅을 일구며 조용히 살겠다는 지미에게 청년들은 교회의 감시 없이 마음껏 춤출 수 있는공간이 필요하다며, 폐쇄된 마을회관을 다시 열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렇게 해서 마을회관이 열리고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고 지주에 맞서 소작농을 돕는 일에 앞장서고 교회와 권력의 핍박을 받고 마을회관이 닫히고 쫓겨나는 사건이 지미의 삶에 10년을 두고 정확하게 반복됩니다. 사랑하는 여인 우나(시모네 커비)를 두고 떠나야 하는 비극도 되풀이됐지요.

하지만 달라진 점이 더 중요합니다. 81세의 켄 로치는 이제 희망을 이야기하거든요. 영화 초반에 도로에서 지미를 막아섰던 청년 마리(아이슬링 프란쵸시)는 마지막에 추방당하는 지미를 뒤따르며 이렇게 외칩니다. “계속해서 춤을 출게요. 꿈꾸기를 멈추지 않을게요.” 흥미롭게도 마리는 원수의 딸입니다. 그의 부친은 지미의 추방에 앞장 선 오키프(브라이언 F. 오바이런)였어요. 영화는 지미를 태운 차를 향해 경의를 표하는 청년들의 스틸 이미지로 지미의 이야기를 마감합니다.

 

갇힌 현실의 출구, 춤과 노래

지난 10년을 지켜온 우나와의 로맨스에는 낭만적인 춤 장면이 추가되었습니다. 뉴욕에서 돌아온 지미는 우나에게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선물하는데요. 어느 날 밤 우나가 그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오로지 달빛에 의지해서 둘은 춤을 춥니다. 혁명을 꿈꾸었던 그 마을회관에서요. 젊은 시절에도 허락되지 않았던 둘 만의 시간이었고 남편과 두 아이를 둔 우나로서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 춤이었습니다. 그 춤은 마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연인 데미안과 시네드를 향한 위로처럼 보입니다. 구조적인 악과 역사의 힘에 맞섰던 연인들과 젊은 영혼들에게 늦게나마 제대로 도달한 편지라고나 할까요.

요컨대 지미스 홀에는 두 여성의 이미지로 표상된 두 개의 춤이 있습니다. 마리의 춤이 미래를 향하고 있다면, 우나와의 춤은 과거를 껴안고 있지요. 켄 로치가 두 여성을 갇힌이미지로 그려낸 점이 인상적입니다. 10년 전 함께 떠나자는 지미에게 우나는 내가 외동딸이 아니라면, 늙은 아버지와 아픈 엄마에게 붙들려있지(trapped) 않다면이라고 말하며 울먹입니다. 마리와 청년들은 마을회관을 열어달라고 요청하며 자신들이 이 마을에 갇혀(trapped) 있다고 말해요. 그들은 비록 덫에 갇힌 듯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들에게 춤이 있었기에, 마리도 우나도 기꺼이 지미를 떠나보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갈등과 폭력이 있던 곳에 총성대신 음악이 울리는 낭만적이고 낙관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현실 가운데서도 춤과 노래로 출구를 열어놓는 것, 그 자체가 승리이고 치열한 투쟁입니다. 우리 삶과 역사의 비밀이겠지요. 다만, 노장 켄 로치를 따라, 과거의 상처와 원통함을 돌보는 일에도 미래의 희망과 동일한 의미가 있다고 말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셰리단 신부를 떠올려 봅니다. 그는 민중을 교육하는 권한은 오로지 교회에만 있다고 믿으면서도 지미를 적장으로서 예우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지미가 지혜롭고 강직하며, 뇌물도 통하지 않을 만큼 사심이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어요. 함부로 조롱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도요. 간혹 오늘날 막장정치판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예의를 보이고 있어서, 고백하자면 저로서는 잠시 존경의 마음까지 들 뻔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를 알아보고 그의 옳음을 인정하는 것이, 가진 것을 포기하고 그를 따르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빌라도처럼, 그도 젠틀하지만 비겁했습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그리운 세상이지만, 갈등을 무화(無化)한 젠틀함과 침묵이 평화는 아니겠지요. 사실 그것은 진짜 예의도 아닐 겁니다.

 

* 이 글은 복음과상황 328호(2018년 3월호)에 실린 것을 옮겨실은 것입니다.

글쓴이 최은은,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이론을 공부했고(영화예술학 박사), 중앙대와 청어람아카데미 등에서 강의했다. 영화 연구자로 대중영화가 동시대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에 관한 책을 집필하면서, 부르심에 따라 비정규직 말쟁이 글쟁이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와 사회(공저), 알고 누리는 영상문화(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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