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라가 시온에서,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토라가 시온에서,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 임주형
  • 승인 2018.04.06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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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행전의 하나님의 말씀 확장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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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2부작 내러티브는 상당히 독특한 면이 있다. 공관복음 중에서도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에 비해서 마가복음의 구조를 상당히 변형시켜 사용했다. 누가복음의 경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의(9:31; 9:51,53; 13:22; 14:33; 17:11; 18:31; 19:11,28), 사도행전의 경우 예루살렘에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격언처럼 당시 땅끝까지 향하는 거점이었던) 제국의 수도 로마로까지 이르는 여행 모티프가 대단히 강조된다.

잘 알려졌다시피 마태와 마가가 예루살렘에 대해 시종일관 부정적인 인식을 내비치는데 반해 이 누가-행전에서의 예루살렘의 지리적 중심성은 신약성경 중에서도 독특할 정도다. 누가복음의 경우 예수의 유년기 내러티브(2:22-50)에서, 예수께서 새출애굽(exodus; 9:31)을 위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시는 과정에서(9:23; 14:27),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24:13-35)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의 이야기에서 동행따름이라는 주제는 인상적으로 강조된다.(1, 유년기 내러티브의 경우(2:22-50)와 부활 이후 엠마오 내러티브(24:13-35)의 경우 그의 가족 및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동행 실패의 주제가 강조되고 결국 이 내러티브들의 동행 실패의 위기감은 당사자들이 예수를 만나고 그의 정체성이 알려지게 됨으로 해소된다.예수의 공생애 기간의 예루살렘 여행에서는 예수의 말씀을 통해 십자가를 짐의 주제가 2번 강조되면서 예수를 따름에 대한 도전이 제시된다.(9:23; 14:27. 특히 9:23의 경우 다른 공관복음의 병행구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날마다라는 어구가 첨가되어 이 여행 주제를 돋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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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이 새출애굽의 여행 주제는 누가 저자의 독특한 문학적 기교를 통해 강화된다. 누가 저자는 예수를 영원한 왕으로서의 다윗의 후손이요(1:32,33) 신명기에 예언된 모세와 같은 새 출애굽을 이끄는 선지자(3:22,23; 7:37)로 묘사할 뿐만 아니라 출애굽 약속의 땅을 위해 여행을 하던 옛 이스라엘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4:22; 3:22; 9:35) 새 이스라엘 그 자체로서도 묘사한다.(9:31의 변화산에서 일어난 모세와 엘리야와의 대화에서 누가 저자만이 이 대화주제를 예루살렘에서의 출애굽(Exodus: 개역성경에는 별세로 번역)”으로 묘사한다.) 나아가 9:51부터 전개되는 누가만의 독특한 자료(이 부분에서 다른 공관복음인 마태와 마가와의 가장 큰 차이가 나타난다.)의 경우,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의 보도(9:51,53,55,57; 10:38; 13:22,33; 17:11; 18:31; 18:35; 19:11.28,45)와 다른 복음서에서는 대체로 발견하기 어려운 예수의 가르침들이 교차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하여 여행하는 이스라엘의 내러티브와 모세의 율법이 교차되어 나타나는 모세 오경의 구조를 연상케 한다.(2, 실제로 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70인경 신명기의 자료 배열과 누가복음의 자료 배열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이 나타난다.) , 예수께서는 새로운 출애굽을 지도하는 새로운 모세이자 새로운 이스라엘 그 자체이다. 날마다 그 계명을 행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혹은 동행하는) 자기의 백성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해 새창조가 시작될 하늘로 출애굽 하신다.(9:51)

이 여행의 과정을 통하여, 새 모세이신 예수로부터 주어진 혁명적인 가르침들과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통해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며,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지는,(마리아의 찬가에 의하면 권세 있는 자들이 그 위에서 내쳐지고 비천한 자들이 높여지는(1:51-53) 궁극적으로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는(3:5,6) 위대한 대역전들이 일어난다. 당시 천하게 여겨진 여인들의 지위가 격상하고, 스스로 거룩하게 여겼던 바리새인들이 아닌 세리와 죄인들, 군인들이 영접되며, 부정한 이들로 여겨졌던 이방인들이 동일한 성령과 믿음을 통해 깨끗함을 얻는다.(15:9)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교량 역할을 하는 구절인 누가복음24:46,47에서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이 구약성경,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 자신에 대해 예언한 것이었음을 밝힌다. 그가 행하신 이 예루살렘 여행의 목적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기 위한 구약의 소망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선언한다.(3, 여기서 누가복음의 또 한가지 독특한 점을 지적할 수 있는데 누가 저자는 70인경 구약성경의 문체를 따르고 예수님의 구약인용도 모두 70인경에서 인용할 정도로 성경으로서의 70인경의 사용을 당연시 하면서도(예를들어 눅 4:18,19에 인용된 이사야 61:1 이하의 히브리어 본문과 70인경 본문 비교) 24:44-45에서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구약성경의 범위를 유대 성경 구분법을 따라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성문서)’으로 제한하는 듯하다. 그는 자신의 독자들이 행 17:11의 베뢰아 사람들처럼 구약성경을 진지하게 숙고하며 사도들의 말씀을 살펴보기를 원한 듯한데, 당시에 히브리어는 유대 식자층만의 언어였고 당시 세계에 70인경의 사용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구약성경의 대본으로 70인경의 사용을 당연하게 여긴 듯 하다.) 바로 이 요약에 따라 사도행전은 1:8의 프로그램에 의해 하늘로부터 임한 성령을 통해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다. , 예루살렘은 구약의 소망인 새출애굽을 성취하기 위한 첫 여행의 종착점인 동시에(누가복음) 바로 그 예루살렘에서 온 땅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뻗어나가는 새로운 여행의 시작점으로 기능한다.(사도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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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누가-행전의 저자가 마태와 마가복음에서 시종일관 적대적인 공간으로 그려진 예루살렘에 지리적 중요성을 부여한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다른 공관복음서 저자도 그러하겠지만, 누가 저자는 특히 이사야서의 새출애굽과 미래의 소망에 대한 예언의 성취를 더욱 상세하게 서술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 특히 이사야 4:2-6의 미래의 소망에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 초막이라는 익숙한 출애굽의 그림이 나타나는데, 놀랍게도 바로 이 출애굽의 발생 장소로서 시온 산’, 즉 예루살렘이 지목된다. 이새의 뿌리에서 돋아날 한 싹을 통한(11:10-12) 혹은 미리 예언된 신비한 고난 받는 종의 희생을 통해 발생하는(52-54) 새로운 출애굽 사건의 성취를 통해,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자신의 증인으로 세워, 열방의 모든 우상들을 무력화시킬 것이며(41:21-29; 43:8-13) 오직 자신만이 온 땅의 유일한 참 하나님이심을 입증하고 열방의 남은 이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45:20-25; 66:18-21)

더욱 중요하게는 여호와의(혹은 여호와의 종의) 토라, 즉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어 땅끝으로 퍼져나감을 통해(2:2-4; 42:4)(4, 개역성경에는 율법’(2:3), ‘교훈’(42:4)이라는 각기 다른 단어로 번역되었지만 이 두 구절의 원문은 동일한 토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열방으로 확장되는 모티프를 공유한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되는’(11:9) 일이 일어날 것이다. 예루살렘은 영화로워질 것이며(60,62; 2:2) 지리적 경계를 초월하여 온 열방을 얻는 거대한 실체로 변화하고(54:1-3)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새하늘과 새땅이 도래할 것이다.(65:17;66:22) 바로 이 새롭게 함의 과정 가운데에는 성령의 부으심이 결정적인 동인으로 기능하게 된다.(32:15-17) 그러나 이 와중에 이사야서에 암시된 한가지 갈등도 존재한다. 이사야의 때와 같이 기존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둘로 분열되어 한쪽이 다른 한쪽을 핍박하고 반대하게 될 것이다.(64:9-15; 66:2-6) 바로 이러한 이사야의 빛 안에서 볼 때,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는 사도행전의 새로운 내러티브는 이미 전체적인 방향성이 정해진 것과 다름 없다.

사도행전 1:8에서 부활하신 예수는 새 이스라엘인 자신의 제자들을 자신의 증인으로 세움으로 스스로 자신이 여호와의 자리에 서 계심을 암시하신다.(41:21-29; 43:8-13 참고) 그리고 제자들이 전파하는 예수에 대한 증언은 구약성경의 기록들(15:15)과 예수 자신이 전하셨던 말씀과 같이(5:1; 8:11,12,13,15,21; 11:28)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또는 주의 말씀)으로 일컬어지며(4:29, 31; 6:2,7; 8:14,25; 11:1; 12:24; 13:5,7,26,44,46,48,49; 14:3; 15:35,36; 16:32; 17:13; 18:11; 19:10,20) 유대인들에게는 이스라엘 성경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구속사의 절정의 사건으로(2:14-41, 7:2-53, 13:16-41 ) 이방인들에게는 우상을 버리고 참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도전으로 선포되면서(14:15-17; 17:24-31) 지리적 경계를 확장해 나간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내러티브의 흐름은 단순히 등장인물들의 지리적 이동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확장에 따라 다루어진다는 암시가 곳곳에 존재한다.(6:7 8:4,5; 11:1,19,20; 12:24; 13:49; 15:36; 18:11; 19:10, 20; 20:32 )(5, 심지어 18:5; 20:32의 경우 말씀은 살아있는 인격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나아가 이 말씀을 받아들인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처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제한되지 않고 세계 각지의 성도들이 모이는 도상과 집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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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사도행전의 내러티브에서 또 한가지 독특한 점은, 내러티브의 전개에 따라 베드로를 위시한 예루살렘 리더쉽의 중요성이 갈수록 상대화되고 끝내 바울이 부각된다는 사실이다.(이 사실은 위에서 지적한 바 사도행전의 내러티브 흐름이 단순히 등장인물들의 지리적 이동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확장에 따라 다루어진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실제 1장에서 배신한 가룟유다 대신 새로운 사도를 임명함을 통해 12사도의 수를 채우는 것의 중요성과 그들의 명단이 다시금 공개되지만, 실제 활약상과 대사가 나타나는 인물은 베드로와 요한 뿐이며 그들 외의 중요한 리더쉽으로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종종 등장할 뿐이다.(15:13-21; 21:18) 6장에 들어서서는 그 초점이 헬라파 유대인의 대표인 7인 중 두명 스데반과 빌립에게 맞추어지며(비록 이 헬라파의 7인이 구제의 목적으로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도행전의 내러티브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말씀사역에 그 초점을 맞춘다. 6:1-6 참고) 이미 이 시점에서 베드로를 제외한 12사도의 존재감은 공기화된다.

비로소 바울이 등장하고 그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사도행전 중후반부의 초점은 오로지 바울에게 집중된다. 이 사실이 특이한 이유는 바울 자신의 서신들로 미루어 볼 때에 당시 그가 활동하던 헬라 세계 가운데에서도 바울은 예루살렘의 리더쉽들에 비해 그 권위가 인정된 편이 아니었다는 암시를 스스로 하고 있기 때문이며(고전 9, 15, 고후 3, 10-12, 2:6-10)(6, 바울 스스로는 자신이 예루살렘의 리더쉽들에 비해 그 권위가 못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해야 했다. ) 바울 외에도 이방 지역에 복음을 전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자들(아마 그 이름이 잘 알려진 사도들 중에서도)이 틀림없이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행전의 저자에게 있어서 바울은 분명 예수를 제외한 최고의 영웅이었고, 메시야 예수의 고난의 자취를 온전히 따르는 고난의 종으로 예수의 고난을 연상케 하는 수많은 반향을 통해 그려진다.(7, 베드로나 스데반 역시 예수를 본받는 인물로 그려지지만(5:15/4:40-41; 9:36-40/8:51-56; 7:59,60/23:34,46)) 누가-행전의 저자는 사도행전의 바울의 마지막 행보를 예수께서 고난 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모습을 강력하게 반향하는 형태로 그려낸다.(19:21/9:51; 21:11-14/13:31-33; 18:31-33; 예수와 바울의 3번의 재판과 무죄선언(산헤드린: :22:66-71; 23:1-11; 헤롯왕가의 왕 앞에서의 심문: 23:8-11; 26; 총독들 앞에서의 변호: 23:1-7;13-25; 24,25; 무죄선언: 23:4,14,15,22; 23:9,29; 25:18,25,31; 법을 굽게 하는 총독의 불의: 23:23-25; 26,27; 떡을 떼는 예수와 바울: 22:19; 24:30; 27:35) 이러한 수많은 반향을 미루어 짐작할 때에 누가-행전의 저자는 바울이 결국 로마에서 처형당하였음을 잘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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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누가-행전의 저자는 자신의 두번째 저작에서 그 내러티브를 마무리 하는 최고의 영웅의 자리를 바울에게 돌린 것일까? 첫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누가-행전의 저자는 바울의 전승이 강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던 디아스포라 교회의 출신일 것이란 점이다. 누가복음의 예수의 몇몇 전승의 형태는 다른 공관복음서 보다 바울서신에서 언급된 형태와 유사한 형태를 지니는 것들이 있다.(대표적인 것이 최후의 유월절 만찬에서의 예수의 말씀이다. 마태와 마가의 경우 떡에 대해 단지 이것은 내 몸이라는 말이 붙여졌고 잔에 대해서는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는 말이 붙여졌다.(26:26-28; 14:22-24) 중요하게는 마태와 마가 버전의 유월절 만찬에는 기념 명령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가의 버전에서는 떡에 대해 너희를 위하여 주는이라는 수식어와 기념명령이 덧붙여 졌으며, 잔의 의미 역시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이라는 수식어 대신 내 피로 새우는 새언약이라는 말이 덧붙여 졌다. 형태는 동일하지 않지만 누가의 버전은 고린도전서 11:23-26에서 바울이 전한 예수의 전승과 훨씬 형태가 유사하다. 또한 딤전 6:18//10:7 비교)

나아가 누가-행전의 저자는 바울의 사역에서 이사야의 예언, 토라가 시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2:3)에서 나오는 비전에 대한 진정한 성취를 본 것 같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열방을 위한 이사야의 비전은 단지 예루살렘에서의 새 출애굽의 성취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미리 예언된 구원 사건의 성취를 통해,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자신의 증인으로 세워, 온 땅에서 오직 자신만이 유일한 참 하나님이심을 입증하고 토라, 즉 하나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어 땅끝으로 퍼져나감을 통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되는’(11:9) 일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종이라 명명하는 누군가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방의 빛이 되어 여호와의 구원을 땅끝까지 이르게 하는 임무를 맡는다.(49:6) 여호와께서는 이사야 51:4에서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토라(율법)가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라고 선언하시고, 이사야 2:3에 언급된 시온,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와 열방으로 퍼져나갈 토라, 하나님의 말씀은 42:4에서 여호와의 종의 토라로도 일컬어진다.

흥미롭게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지상사역을 기름부음 받는 여호와의 종에 대한 이사야 61:1이하의 말씀으로 시작하셨고(4:16-21; 42:1 비교) 놀랍게도 사도행전에서 바울 자신은 유대인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여호와의 종에게 말씀하시는 여호와 자신의 명령인 이사야 49:6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한다.(13:47) 즉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이사야서의 여호와의 종을 단순히 예수 개인이 아닌 예수로부터 시작되어 자신에게까지 이르는 집합적 인격으로 이해했음이 틀림없다. 이는 바울이 자신의 서신에서 승귀하신 예수를 ’(구약의 여호와를 칭하던 명칭)라 부르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으로 지칭한 자기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누가-행전의 저자가 바울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남아 있던 디아스포라 지역 교회의 출신이며 그가 바울의 사역을 토라-하나님의 말씀을 열방에 전달하는 여호와의 종의 사역으로 보았다면 그가 자신의 내러티브를 바울의 사역으로 종결한 이유가 분명해진다. 바울 자신은 무엇보다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이해하였고(11:13; 2:7,8) 어떤 사도들보다 더 많은 수고를 감당하였기 때문이며(고전 15:10) 더 나아가 누가는 바울이 자신의 사역 동안 남긴 그의 편지들을 토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바울이 편지를 보낸 지역 가운데 바울이 직접 알지 못하고 그의 동역자인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알게 된 골로새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로마, 고린도, 갈라디아, 에베소, 빌립보, 데살로니가)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선교 여행지로 비중있게 다루어진다.(8, 비록 문체나 신학의 이유로 골로새서의 바울저작을 의심하는 이들이 많긴 하지만 이것은 결정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N.T 라이트의 지적처럼 그렇게 볼 경우 개인적인 언급들, 특히 골 4장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의 언급에 대해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워지며 골로새서에는 의심받지 않는 바울서신들(살전, 고전, 고후, , , 로마서 등 7개의 서신)에는 나타나지 않는 언어 용례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모든 어법들의 대부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문체적인 측면에서도 골로새서는 바울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며(먼저 주제를 간략하게 또는 시적으로 제시하고, 그 다음에 그 주제를 보다 더 상세하게 설명하는 방식) 바울 신학의 핵심이 칭의론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라는 점에서 바울의 거의 모든 서신들의 주요 주제들과 연관된다.)

어쩌면 이미 누가-행전의 저자가 자신의 저작을 저술하기로 결심했을 때, 바울의 편지들은 하나님 말씀이라는 권위 문서로서 누가-행전의 저자가 알고 있던 세계 가운데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고,(9, 흔히 학계에 제2 바울서신이라고 분류되는 문서들까지 포) 누가 저자는 이와 관련해 바울에 얽힌 전승까지를 소개해야 할 필요를 느꼈으며,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전승들을 취합하여 현재의 사도행전을 저술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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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정말로 바울이 자신의 편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겼다는 암시가 그의 서신 자체에 존재하는가?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도행전에서 저자가 예수를 증언하는 증인들의 구두 증언을 하나님의 (혹은 주의) 말씀으로 명명하는 것처럼, 바울 역시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자신이 구두로 증거한 복음을(살전 1:5; 2:2,9) 사람의 말이 아닌,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조한다는 것이다.(살전 2:13) 당시 문서기록이 구두전달의 연장선상에 서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적인 편지가 아닌, 사도로서 기록한 그의 편지에 그가 스스로 권위를 부여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예컨대 N.T라이트는 바울이 자신의 편지를 시작할 때 관례처럼 사용하는 은혜와 평강의 인사에 대해 바울은 자신의 서신들이 은혜의 수단이 되기를 원하며, 이 서신을 통해 풍성하고 온전한 평화를 가져오고자 한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참고. 1:11)

어쩌면 고난받는 종들로서 사역한 구약의 선지자들의 선포가 문서기록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듯이 자신의 사명을 그 연장선상에서 생각한 바울은 자신의 서신을 그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문서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례로 바울은 지식과 언변이 풍족하다고 스스로 믿었던(고전 1:5) (그러나 실제로는 무질서했던)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사도의 권위로 그들이 착각하고 있는 은사의 우선순위를 다시 정립하며,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은사인(고전 12:8이하의 은사 목록의 순서 참고)(또한 그들 가운데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인) 십자가의 지혜를 자신의 편지를 통해 가르친다.(고전 1:18-2; 14:6) 심지어 그는 11:37에서 자신의 편지를 주의 명령이라고까지 묘사하며 때로는 편지를 통해 비밀을 선포하기도 한다.(고전 15:51; 참고 11:25) 이렇게 보면 바울은 자신의 편지를 심지어 사도로서의 자신의 분신이라고까지 생각한 듯 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고전 5:3-5의 일견 이상해보이는 구절을 이해할 수 있다.

거기서 바울은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을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 주었으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지금 몸으로는 함께 있을 수 없는 고린도 교회의 공적인 모임에서 이 편지가 낭독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바로 그때에 자신의 분신인 자신의 편지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고린도 교회의 공적인 모임에 사도적 인격으로서 임재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문학적 장치는 구약의 예를 볼 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일례로 에스겔의 경우 여호와께서 주시는 두루마리를 받아먹고(2-3)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는 인간 두루마리가 되며 하나님은 에스겔을 데리고 다니며 그를 선포하신다.(에스겔에서 자주 반복되는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셨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에드가 콘래드(Edgar W. Conrad)3:25-26의 무리가 에스겔의 위에 줄을 동여매고 여호와께서 그의 혀를 입천장에 붙게 하여 말을 못하게 하시는 것을 두루마리가 인봉된 모습의 모티프를 사용한 것으로 설명한다. 나아가 3:27의 올바른 번역을(개역성경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내가 너를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로 수정하는 것이 옳다고 제안한다.(10, 히브리어 이티가 아닌 오티가 쓰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에스겔서에서 등장인물로서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 에스겔과 성경으로서의 에스겔은 사실상 문학적으로 동일 인격화된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도 바울은 출애굽기 34:29-35의 모세가 여호와의 영광을 본 후 이스라엘 군중들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일화를 인용하면서, 어느새 모세를 오경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로서의 모세와 동일시한다.(개역성경에서는 모세의 책이라고 번역했으나 헬라어 원문에서는 단순히 오늘까지 모세를 읽을 때에라고 기록하였다. 고후 3:15. 즉 모세가 자신의 보는 이들 앞에서 수건을 가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듯이, 오경을 읽는 유대인 독자들이 오경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수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정한 영광인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상황을 모세와 모세의 책을 동일시 함으로 풍자한다.)(11, 욥의 경우에도 그는 19:23-24에서 자신의 말이 기록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표출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욥기를 통해 독자들은 기록된 욥의 말을 들을 수 있고 말은 화자의 인격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욥기의 독자는 욥기를 통해 욥의 인격을 맞닥뜨리게 된다.) , 바울에게 있어서 구약의 각 성경에 등장하는 주인공들과 그들 자신의 이름으로 기록된 성경이 동일인격으로 여겨지는 전통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을 것이며,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도 이러한 전통을 그대로 적용했을 것이라고 볼 가능성은 충분하다.

케네스 베일리(kenneth bailey)의 경우 고린도전서의 수사법을 분석하여 고린도전서의 수사법이 선지서들에 나타나는 수사법을 유사하게 모방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는데(12, 베일리 자신은 이를 예언적 수사틀이라고 명명한다.) 이런 증거들을 통해 볼 때에 바울은 사도로서 말씀의 사역자들인 구약선지자들의 연장선상에 서서, 자신이 능통하게 알고 있는 구약의 전승들과 그가 예수께 직접 받았다고 주장하는 복음, 그리고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전해받은 예수의 전승들을 통해 깨닫게 된 하나님의 비밀들을 자신의 편지를 통해 자신의 독자들과 나누면서 해당 교회의 목회적 상황을 지도하고자 하는 것이다.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자신의 편지 마지막에 바울의 편지에 구약성경과 방불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는 이유 역시(벧후 3:15,16) 전술한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7

마지막으로 누가행전의 저자 역시 자신의 글을 이러한 토라-하나님의 말씀의 연장으로 보았을 것이라는 암시가 존재한다. 다른 공관복음에도 병행구절이 존재하는 누가복음 21:3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통해,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예수의 말씀은 권위를 얻게 되며 누가-행전에서 예수의 선포와 사도들의 예수에 대한 증언-구두 선포가 구약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는 하나님의 말씀’(축약형 말씀’(로고스))으로 여겨짐을 이미 살펴보았다.

흥미롭게도 누가-행전의 저자는, 자신의 첫번째 책에서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로고스)의 일꾼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다.’고 전술한 후 자신 역시 그 역사를 주의 깊게 미루어 살펴 이 글을 저술한다는 머리말을 남겼다.(1:1-4) 나아가 사도행전의 머리말에서 그는 데오빌로에 대한 헌정사를 쓰면서 앞선 글, 즉 누가복음을 먼저번 말씀’(프로톤 로곤)이라고 명명한다.(개역성경에는 먼저 쓴 글로 번역) , 이 헌정사로 말미암아 저자는 자신의 첫번째 책 누가복음을 자신이 전하는 첫번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도행전을 두번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획했다는 것이 암시된다. 누가 저자는 신학적 역사가로서 자신이 수집할 수 있는 전승들을 신중히 모아 구약성경에서부터 시작되고 구약성경이 미래의 소망으로 예언한(24:27,44; 24:14;26:22;28:23) 구속 역사의 절정을 저술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 누가-행전2부작을 집필한 것으로 여겨진다.

, 누가 저자는 구약성경에 이미 예언된, 시온에서 나타나게 될 위대한 새 출애굽과 여호와의 말씀-토라가 시온,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와 땅끝까지 전달되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케 되고 그의 영광이 알려질 일들이 나사렛 예수와 그를 따르는 말씀의 일꾼들, 특히 바울 안에서 비로소 그 성취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며, 자신이 기록한 말씀을 통해서 역시 땅끝까지 이르는 그 말씀의 확장이라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계획에 기여하기를 원한 것으로 보인다.

 

글쓴이 임주형 목사는, 20대초부터 성경을 사랑해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온 젊은 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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