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신학? 먼저 공공의 이슈부터 이해하라
공공신학? 먼저 공공의 이슈부터 이해하라
  • 최소연
  • 승인 2018.03.19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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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홈페이지 갈무리

'공공성', 특히 성서 혹은 신학의 '공공성'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 '성서적', 혹은 '신학적'에 방점을 찍는다. 혹 거기서 더 나가고 싶은 경우 '철학'으로 가기도 한다.

결국,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지점이 '공공선'이라면, '공공'에 대한 인식, 좀 더 분명한 이해, 더 나아가서 '공공성'에 대한 경험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도대체 '공공'(public)', '공공영역'(public realm)이라는 게 뭐고, 어떤 실재와 현상으로 나타나고, 어떻게 형성되고,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삶에서 인식할 때, 나아갈 지표가 좀 더 분명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공공신학의 담론이 한국어권에서 진행되기가 서구권보다 좀 더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공공'/'공공선'/'공공성'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경험이 축적된 시간이 짧아서이지 않을까. 왜냐하면, 역설적이게도, '공공성'이 나름 건강하게 구성되고 자리를 잡으려면 '주체적인 개인'들과 그들 간의 연대가 있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그 두 가지가 현상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내 이민교회를 보면, '주류사회'라는 층위(layer)가 한 겹이 더 있어서, '주류사회'에서의 공공성에 대한 약간의 지식과 감각도 필요하다. 많은 경우 이민 1세대들에게 이런 것까지 기대하기는 쉽지 않고, 2세들부터라도 그런 감각을 키워줄 수 있으면 다행이다.

Courtney E. Martin의 테드 강연 유튜브 화면 갈무리
미국 언론인이며 작가인 Courtney E. Martin의 테드 강연 유튜브 화면 갈무리

아주 구체적인 예는 아니지만. 60년대 한국의 군사정권 시절, 미국에서는 페미니즘, 환경운동, 인권운동 등등에 대한 인식을 가진 '개인'들이 자신이 기반을 둔 커뮤니티에서 풀뿌리 운동들을 시작했다. 그러한 부모 밑에서 자란, 딱 내 또래의 자녀들은 '풀뿌리 운동'을 삶의 일부로 경험하며 자랐다. 최근 본 TED의 페미니스트 강연을 한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다. 십대를 지나 대학 시절, 그 이후로도 내내 '풀뿌리'를 내리는 일을 해왔다고 한다. 그 사람도 물론 그 과정에 있어서 '풀뿌리''큰 나무' 혹은 '큰 숲'을 이루지 못하는 데 대한 좌절을 경험했지만, '풀뿌리 내리는 삶'의 본이 된 그 부모가 다시 삶의 초점에 대해 다시 생각하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공공성''집단주의/전체주의'와도 다르고, '위계질서로 움직이는 집단'과도 다르고, 정치적인 과제를 만들어내는 것과도 다르다. '공공선'이 실천될 수 있는 수준(level)도 수없이 다양하다. 집중할 것은, 큰 그림과 큰 목적보다는, 주체적인 ''의 삶에 와 닿아 있는, 혹은 내가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영역을 관통하는 '공공적'인 이슈들. 그 주제와 배경을 이해하는 지점부터 시작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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