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다 성경』의 '엘리야의 까마귀' 해석, 유감
​​​​​​​『열린다 성경』의 '엘리야의 까마귀' 해석, 유감
  • 김동문
  • 승인 2018.03.18 07: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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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모세, '열린다 성경: 동물 이야기' 다시 읽기
어디에나 사는, 덩치가 큰쪽에 속하는 까마귀는 '공중의 새'로 일컬어지곤 했다. ⓒ김동문

성경을 읽을 때 동물, 식물, 장소, 사람, 개념이 가끔씩 궁금하게 만들거나 과도한 상상력을 펴는 꺼리가 되기도 한다. 당사자들이 느끼고 공유했을 의미보다 우리들이 직간접적으로 갖고 있는 무의식이 반영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왜 까마귀를 시켜 엘리야를 먹이셨을까?

많은 이들이 궁금해할만한 질문으로 '열린다 성경: 동물 이야기' 중 한 꼭지 글을 이어간다. 또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의할 만한 아래와 같은 주장이 그 뒤를 잇는다. '까마귀, 부정하고 시체를 먹는 새', 우리에게 익숙한 고정관념이다. 저자인 류모세 목사도 동일한 생각을 입장을 갖고 있는 듯하다. 결국 독자들은 '하나님은 왜 부정하고 시체를 먹는 까마귀를 시켜 엘리야를 먹이셨을까?'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왕상17:3~4).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왕상17:6).

 

까마귀의 검은색은, 혐오의 색? 아름다움의 상징?

저자는 까마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입증하려는 것 같다. 글의 처음부터 까마귀의 어둡고 검은 색을 주목하고 있다. 저자는 '검은 색'을 부정적인 가치로 평가하고 있는 듯하다.

까마귀는 히브리어로 '오렙'이라고 하는데, 어둠이 내려오는 '저녁'을 가리키는 '에렙'과 어근이 같다. 까마귀는 어둡고 검은색을 띤다. - 류모세, 열린다 성경:동물 이야기, 두란노, 2010년, p.221.

고대 이스라엘에서 검은 색은 아름다움의 상징색이기도 했다. ⓒ김동문

그러나 저자의 이러한 근거는 그의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적절한 근거가 아니다. 저자의 주장처럼 까마귀와 저녁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같은 철자를 갖고 있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같은 어근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같은 그림 언어로 이해하는 것은 더더욱 무리가 있다. 다른 어근을 갖고 있어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른 철자로 표기되고, 같은 철자로 표현된 다른 뜻의 단어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히브리어는 모음 부호가 사용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여야 한다. 또한 무게를 재는 말과 동물 말, 사람의 말이 있는 것처럼 히브리어나 고대 셈계 언어에도 유사한 사례는 많다.

저녁에 서쪽(서해, 지중해, 대해)으로 해가 지고 있다. ⓒ김동문

고대 히브리어에서 저녁, 해가 짐, 서쪽을 뜻하는 단어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 사실 해가 지는 곳, 해가지는 시간이 같은 방향을 뜻하기에,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서쪽은 마아랍(maʿarav), '해가 짐'(일몰)은 마아립(maʿariv), 저녁은 에레브(erev)이다. 해가 지는 곳, 해가 짐과 연관되어 있다. 검은 색 같은 색감과는 무관하다. 사실 해가 지는 저녁 시간의 색감은 검은 색이 아니다. 또한 원시 셈어에서는 '아'(ayin) 철자가 '가'(ghayin)으로 표기되곤 했다.

머리는 순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 같이 검구나”(5:11).

류모세, 열린다 성경:동물 이야기, 두란노, 2010년
류모세, 열린다 성경:동물 이야기, 두란노, 2010년

이 본문에서, 머리, 머리털의 모양, 머리털의 색이 강조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본문의 '까마귀'는 정결규정상의 까마귀의 존재감이나 동물로서의 어떤 속성이 아니다. 검은 색의 까마귀의 '검은 색'을 단순하게 떠올린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또한 이 검은색은 아름다움을 뜻하는 색이었다. 시인은 '진짜 너의 머리카락은 완전히 검구나' 하며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까마귀는 부정한 짐승? 

까마귀는 '부정하다', 시체를 먹는 습성때문이다?

부정하고 시체를 먹는 까마귀의 습성으로 인해 성경에 나오는 까마귀의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 - 류모세, 열린다 성경:동물 이야기, 두란노, 2010년, p.221.

그런데 저자의 이런 주장은 맞는 듯 틀린 듯, 뒤엉켜져 있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정한' 짐승, '부정한' 짐승은, 동물 자체의 가치 평가가 아니다. '먹도록 허용된' 동물이냐,  '먹는 것이 금지된' 동물이냐 하는, 허용과 금지의 개념일 뿐이다. 레위기의 관련 규정을 조금더 살펴보자.

너희는 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레위기 11:8)

먹도록 허용된 정한 동물 가운데는 생긴 것, 속성이 더러운 동물들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먹는 것이 금지된 새들의 종류를 보라.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말똥가리와 말똥가리 종류와 까마귀 종류와 타조와 타흐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와 가마우지와 부엉이와 흰 올빼미와 사다새와 너새와 황새와 백로 종류와 오디새와 박쥐니라. (11:13-19)

또한 일부에서 생각하는, '부정한 동물은 만지지도 말라'고 성경이 규정하고 있다는 생각은 오해이다. 레위기와 신명기의 부정한 동물에 관한 규정은, 단지 '주검을 만지지 말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들 새 종류는 그 수가 많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까마귀의 가치 평가인가 속성 묘사인가?

하나님은 왜 하필 부정하고 잔인한 속성을 지닌 까마귀를 보내 선지자 엘리야를 먹이셨을까? 이에 대해 유대학자 메추다트 다비드(Metzudat David)는 독특하고 재미있는 해석을 내 놓았다. 하나님은 일부러 잔인한 까마귀에게 하나님의 자비로움을 전하는 심부름을 시켰는데, 이처럼 엘리야도 배교하고 방종한 이스라엘을 너무 거칠고 잔인하게 다루지 말고 자비와 친절로 다루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는 해석이다. - 류모세, 열린다 성경:동물 이야기, 두란노, 2010년, p.222.

저자의 이런 주장을 대하면서 조금 더 낯설었다. 저자의 성경 해석에는 개신교 신학자들보다 유대학자들이 더 많이 등장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대학자 메추다트 다비드는 유대교 랍비 David Altschuler(1687~1769)를 말한다. 자료에 따르면 이베리아 반도의 Galicia 지역 출신으로, 동유럽에 자리한 폴란드의 Jaworów에서 일한 것으로 보인다. 메추다트 다비드의 풍유적 해석이 은혜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바른 해석일 수는 없다.

노아의 방주 사건 기록 가운데 창세기 8장에 등장하는 까마귀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본문 어디에도 까마귀나 비둘기에 대한 가치 평가가 담겨 있지 않다. 그 동물로서의 속성, 능력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맞다. 까마귀는 비둘기보다 더 멀리 날고 오래 견디는 그런 속성 말이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8:7), "비둘기가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8:9)왔다고 서술하고 있다. 노아의 초기 정탐 활동에 비둘기가 아닌 까마귀가 더 요긴하게 쓰였다.

주로 황량하고 바위가 많은 지역에 둥지를 틀기 때문에 파괴와 황폐화를 상징하는 표현에 까마귀가 종종 등장한다. - 류모세, 열린다 성경:동물 이야기, 두란노, 2010년, p.221.

그릿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요단강변의 까마귀 떼. ⓒ김동문

까마귀의 서식지는 다양하다. 주로 황량하고 바위가 많은 지역에 둥지를 튼다는 저자의 주장은 검토가 필요하다. 주거 지역이나 밭, 성 안이나 밖, 산이나 골짜기, 들판, 숲과 강, 바닷가 할 것 없이 까마귀는 다양한 환경에 서식한다.

당아새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에 살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우실 것인즉”(이사야 34:11).

요르단 남부 에돔 산지의 광야 풍경(페트라 주변 지역) ⓒ김동문

이 본문은 에돔 지역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에 나오는 것이다. 에돔 땅이 광야가 될 것이라는 표현에 나오는 '까마귀'는 광야의 그림 언어를 보여주는 하나일 뿐 까마귀의 속성이나 가치 평가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릿 시내는 황량하고 바위가 많은 지역?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와디와 황량하고 바위가 많은 지역에 사는 까마귀에게 엘리야가 숨어있던 그릿 시내(와디)는 그리 낯설지 않은 환경이었을 것이다. - 류모세, 열린다 성경:동물 이야기, 두란노, 2010년, p.222.

ⓒGoogle Maps

와디는 땅의 형세 즉 지형과는 다소 무관하다. 저자가 언급하듯이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시내 즉 마른 시내를 뜻한다. 그러나 이 마른 시내(와디)는 완만한 평지에도, 가파른 골짜기에도 형성된다.

저자는 그릿 시내로 보이는 요르단의 와디 아르-라이얀(Wadi Ar Rayyan, 다른 이름으로는 하류 지역인 와디 알-야비스 Wadi Al Yabis로도 부른다)의 형편에 대해 무관심하다. 황량하고 바위가 많은 지역이라는 표현은 저자의 상상일 뿐이다. 시내가 흐르지 않는다고 그곳이 황폐한 곳은 아니다. 나무도 숲도 들판도 존재한다.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열왕기상 17:3-5)

ⓒGoogle Maps

또한 위에서 인용한 성경의 표현에 따르면, 엘리야가 머물렀던 장소는 요단강 가까운 쪽의 그릿 시내이다. 그릿 시내 중 요단강에 가까운 하류 지역인 것이다. 엘리야의 고향은 길르앗 지방의 디셉이다. 오늘날 요르단의 '텔 마르 엘리야스' 가까운 곳의 리스팁이다.

까마귀의 잔인한 습성?

까마귀는 또한 시체의 눈을 파먹는 잔인한 습성이 있다.- 류모세, 열린다 성경:동물 이야기, 두란노, 2010년, p.222.

까마귀의 잔인한 습성? 저자는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아래와 같이 성경 본문(p.222)을 논거로 제시하고 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잠언 30:17)

그러나 이 본문은 장례를 치루지도 못하고 들판에 버려져 새들의 먹이가 될 것이라는 저주가 담긴 관용적 표현이다. 그 비슷한 표현으로 아래와 같은 본문이 기억날 것이다.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하니 (열왕기상 21:23, 24)

결국 앞서서 저자가 인용한 성경 본문은 까마귀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 가치 판단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아래와 같이 성경 본문을 논거로 제시하고 있다.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38:41).

그러나 이 본문은 아래의 본문과 같이 비교해보라. 까마귀 새끼의 어떤 면이 다가오는가까마귀 새끼의 절절한 울음소리와 먹을 것달라고 둥지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 (시편 147:9)

위의 두 본문 속에서 먹을 것을 제공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두 분문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그림 언어로 그 절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까마귀 둥지의 새끼 까마귀가 먹을 것 달라고 졸라대는 풍경을 보지 못한 이들은, 제비집이나 새집에서 어린 새끼들이 어미가 먹을 것을 입에 넣어주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풍경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까마귀의 울음소리는 애절하게 다가왔기에, 그 장면을 배경으로 시인은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본문은 까마귀에 대한 어떤 가치 판단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물어다 준 음식은

울퉁불퉁한 바위틈에 여분의 음식물을 저장하는 까마귀의 습관은 엘리야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주로 썩은 고기를 먹는 까마귀는 대추야자와 같은 과일도 먹는데, 엘리야가 먹은 것은 아마도 대추야자가 아닐까 싶다- 류모세, 열린다 성경:동물 이야기, 두란노, 2010년, p.222

미국 감리교단의 은퇴목사인 Frank L. Hoffman 목사의 설교문(1991721)에 아래 내용이 언급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곡식과 무화과나 대추야자(종려나무 열매) 같은 작고 신선한 과일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야 엘리야가 정결법을 위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전제이다. 그러나 이 설교문에 반영된 이 같은 주장의 1차 출처는 찾지 못했다.

그릿 시내에서 가까운 여리고, 종려의 성읍으로 불리는 여리고는 종려나무가 많았다. 까마귀는 종려 열매를 엘리야에게 물어다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 류모세, 열린다 성경:동물 이야기, 두란노, 2010년, p.225.

ⓒGoogle Maps

여리고와 그릿 시냇가 그리고 까마귀를 굳이 연결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물리적인 거리가 8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다. 문득 '까마귀 같은 인생이 되지 말라'는 식의 설교가 떠오른다. 그런데, 왜 아무도 이 본문을 두고는 "선지자를 공궤한 까마귀를 본받읍시다" 하는 식의 설교는 하지 않을까 궁금하다..

까마귀에 대한 유대인들의 재미있는 해석이 아벨의 죽음과 관련해서 나온다. 까마귀는 배우자가 죽으면 땅을 파서 묻고 흙을 덮는데, 아담과 하와는 아벨이 죽은 후 슬퍼하다가 까마귀의 행동을 보고 시체를 매장해 주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죽은 자를 매장해 주는 것은 최고의 선행과 자비에 속한다. - 류모세, 열린다 성경:동물 이야기, 두란노, 2010년, p.224.

Pirkê de Rabbi Eliezer
gerald friedlander, Pirkê de Rabbi Eliezer

이 내용은 꾸란 531, 32(al-Ma'idah 5:31-32)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까마귀 매장 이야기는 고대 유대 문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이 유대 민속 이야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가장 일반적으로 아래 4개의 출처를 언급한다. the Targum of Jonathan ben Uzziel, the Targum Yerushalmi I (aka Targum Jonathan or the Targum of Pseudo-Jonathan), the Pirke De-Rabbi Eli'ezer, the Midrash Tanhuma. 1916년 Gerald Friedlander(1871-1923)가 펴낸 Pirke De-Rabbi Eli'ezer156쪽에서 재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4세기 이전의 유대 민속 이야기에 바탕은 둔 타후마 미드라쉬(the Midrash Tanhuma)가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평가된다그런데 왜 이런 독특한 유대 배경의 이야기를 성경 해석에 활용해야 하는지 낯설다.

공중의 새 까마귀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12:24).

이 본문의 평행 구절은 마태복음 6:26절이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6)

고대 이스라엘 지역에서, 사람들의 생활공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조금 높게 나는, 조금 큰 새 종류가 까마귀였다. 그래서 '공중의 새'라고 불렀다. 매나 독수리는 도시 지역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다. 그 서식지가 대부분 민가에서 멀고, 지형이 험한 곳이기 때문이다.

코넬대학교 조류학연구소 © 2017 Cornell University
코넬대학교 조류학연구소 © 2017 Cornell University

예수님은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더 이상 염려하지 말 것을 가르치시면서 까마귀를 비유로 말씀하셨다. 부정하고 하찮은 까마귀마저 하나님이 먹이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어떠하겠는가'라는 과장법적 비유인 것이다. - 류모세, 열린다 성경:동물 이야기, 두란노, 2010년, p.224.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의 메시지도 까마귀에 대한 가치 평가를 깔고 있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부정하고', '하찮은'은 존재로서 공중의 새, 까마귀를 가리킨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하찮은 까마귀'는 오히려 로마 황제를 풍자 또는 조롱하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최소한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어서 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할 수도, 무엇을 마셔야 할지 염려할 수도 없는 처지의 백성들을 위로하는 메시지로 볼 수는 없는 것일까앞서서 짚어 본 욥기(38:41)와 시편(147:9)에서 묘사된 것처럼, 하나님이 공중의 새 까마귀도 돌보시는 사실을 예수께서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도록 도우시는 것이 아닌가?

성경 독자는 물론 성경을 가르치는 이들이 갖고 있는 까마귀라는 존재를 부정한 존재, 더러운 존재라는 왜곡된 생각에, 까마귀가 물어다 준 떡과 고기가 더러운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전제가 류 목사의 글에 깔려 있다고 본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다소 억지스런 해석을 하고 있는 이유도 이 같은 전제 때문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까마귀가 만지면 부정타는 불결한 새가 아니라 먹는 것이 금지된 새라는 것에 다시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까마귀가 먹는 음식은 다 불결하고 부정한 음식이라는 것도 넘어서야할 편견이다.

성경 독자들은 엘리야의 다음과 같은 선포를 기억할 것이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열왕기상 17:1)

 그 뒤에 이어지는 다음 본문을 오해한다. 어떤 것이 오해일까?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열왕기상 18:7)

그릿 시내의 상류지역, 석류나무와 숲으로 골짜기(와디)가 이어진다.
그릿 시내의 상류지역, 석류나무와 숲으로 골짜기(와디)가 이어진다. ⓒ김동문

북왕국 이스라엘 지역의 가뭄이 요단강 동편쪽 길르앗 지방에도 똑같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절기상 겨울 우기가 끝났음을 표현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른 것은 여름이 가까와진 계절임을 보여준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열왕기상 17:6)

왜 이 본문(내러티브)에서 엘리야에게 먹고 마실 것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까마귀라는 동물과 까마귀가 물어다 주었을 떡과 고기의 정체에 집착하는 것인가? 잘 모르겠다. 위 본문을 먹을 것이 있는 사람들이 2끼 식사를 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셨다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인가? 또한 보리나 밀로 만든 빵 한쪽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던 이들이 많던 그 시절에, 식사로 떡과 고기를 먹는다는 것, 그것을 제공하셨다는 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다시 되짚어봐야 한다. 마치 우리 식으로 바꾼다면,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 끼니마다 진수성찬을 베풀어주셨다는 뜻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인가?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여주셨다는 뜻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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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렸다성경 2021-04-19 03:06:41
도대체 무슨 말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