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를 재발견하다
루터를 재발견하다
  • 박진아
  • 승인 2017.11.09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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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훈, 루터의 재발견 질문, 저항, 소통, 새로운 공동체, 복있는사람, 2017년
최주훈, 루터의 재발견 질문, 저항, 소통, 새로운 공동체, 복있는사람, 2017년
최주훈, 루터의 재발견 질문, 저항, 소통, 새로운 공동체, 복있는사람, 2017년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무척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이 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표지 때문이었다. 시선을 확 끄는 황금빛 표지는 여심을 출렁이게 하기에 충분했고 (지극히 개인적 취향), 찢어진(?) 황금빛 장막 뒤에 가려진 듯 드러나 있는 루터의 얼굴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뭔가 비밀을 품고 있는 사나이 같았다. 책 제목 또한 '루터의 재발견'이었기에, 나는 이 책이 그동안 우리가 종교개혁자로서 알고 있던 루터가 아닌 뭔가 더 인간적이고 복잡한 역사를 가진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써 조명을 할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가면서 나는 깨달았다. 종교개혁자 루터조차도 제대로 몰랐다는 사실을 말이다. 마르틴 루터만큼 친숙하면서도 낯선 이가 또 있을까? 너무나 많이 회자되는 만큼, 사람들은 자신들이 루터에 대해 꽤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나 또한 그런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다. '루터의 재발견'을 읽으면서 나는 정말 제목대로 루터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저자 최주훈 목사는 총 9개의 장을 통해 루터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 루터의 성장배경 및 그가 수도사로 서언하게 된 과정, 그리고 95개조 논제를 발표하게 된 전후 상황, 그 과정에서 루터의 영향력이 폭발적으로 전 독일에 미치게 된 이유, 루터의 교회론과 예술에 대한 이해, 루터의 신학에 대해 논한다. 아마도 제4장 저항까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충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자주성가한 아버지의 욕심 아래 루터는 법학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어느 비 오던 날, 집을 방문했다가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바로 옆에 떨어진 벼락을 피하며 루터는 성 안나에게 "살려만 주시면 평생을 성직자로 살겠노라"고 맹세했고, 그 맹세대로 그 길로 가장 엄격하기로 소문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갔다.

엄격한 수도 생활을 했지만, 더욱 자신을 엄격하게 채찍질할수록 구원의 확신에 대한 루터의 갈증은 커져만 갔다. 동시에 견학 차 방문했던 로마에서 루터는 청빈한 수도원 생활과는 정반대로 온갖 호화 음식과 성 유물들로 가득 찬, 돈이면 다 되는 로마 가톨릭의 민낯을 보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특히 알브레히트 대주교가 면죄부를 통해 가난한 백성들의 돈마저 착취하자, 그에 분개하여 그 유명한 95개조 논제를 쓰게 된다. 여기까지가 4장 저항에 대한 내용이다.

그러나 나의 흥미를 가장 끌었던 부분은 바로 다음 장인 제5'소통'이었다. 루터가 살고 있던 시대에 교회에서 오직 유일하고 합법적인 언어는 라틴어였다. 그 당시 엘리트 인문주의자들은 모두 라틴어로 소통했다. 그러나 루터는 엘리트들의 소유물이었던 언어를 평범한 시민들의 언어로 환언하고, 소통의 대상을 확장한다. 또한 루터는 당시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던 구텐베르크(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 추르 라덴 춤 구텐베르크, Johannes Gensfleisch zur Laden zum Gutenberg, 1398~1468) 금속활자를 십분 활용한다. 문맹률이 높았던 사회이니만큼, 루터는 많은 말 대신 직관적인 그림과 음악을 사용한다.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루터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바를 받아들일 수 있었고, 루터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마른 들판에 불 번지듯 전독일 지역을 강타했다. 저자는 이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소통혁명이다" (p. 124).

저자의 이 한 마디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와서 박혔다. 루터는 고위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성서를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게 만들었고,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아 여자든 아이든 할 것 없이 누구나 읽고 쓰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왔다. 모든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모든 성자가 스스로 성경을 읽고 생각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교회는 어떤지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른다고 하지만 실상은 목사와 신학자들만의 성을 쌓고, 언어의 게토(ghetto)화를 통해 그 성벽을 더욱 높이 쌓고 있지는 않는가? 신학공부하지 않은 이는 쉽게 대화의 장에 끼지 못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부분에 대해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루터의 그 유명한 "두 통치설"이었다. 보통 "두 통치설" 하면 쉽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적 영역 (교회)""세상의 왕이 다스리는 세상의 영역 (국가)"로 생각한다. 여기서 많은 이들이 루터를 오해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사람들이 이를 루터가 "성과 속"의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말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루터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그리스도인은 이 두 왕국에 모두 '동시에' 속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은 현실 속에서 세상의 영역과 영적인 영역이 충돌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이 두 영역 모두 하나님에게 속한 영역이었고, 따라서 이는 옳고 그름의 충돌이 아니라 옳음과 옳음 사이의 갈등이 된다. (p. 294).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루터는 이렇게 대답한다. "용감하게 죄를 지어라. 그러나 더 담대히 그리스도를 신뢰하라." (p. 294). 이 말은 다음의 내용을 전제하고 있다. 첫째, "자기 자신에게만 닥친 일이라면 그리스도인은 그 고난을 인내해야 한다. 그러나 이웃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p. 296). 둘째, 선한 미래를 도모하는 일이어야 한다 (p.296). 셋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일이다. (p. 297). 즉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영적 영역과 세상적 영역 모두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세상에서 불의한 일이 닥쳤을 때 그것이 이웃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저항해야 하며, 그것을 통해 선한 미래를 도모해야 하고 자신이 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분의 긍휼하심을 신뢰함과 동시에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서 설 것을 생각하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루터의 "두 통치설"이다.

'루터의 재발견'에는 앞서 이야기한 것보다 더 풍성한 내용이 책 곳곳을 가득 채우고 있다. 특히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던 건축물과 그림을 담은 사진들은 더욱 더 생생하게 루터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저자의 해박한 지식은 친절한 설명과 또 나름의 문제제기들을 통해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의 표지에 적힌 네 가지의 키워드인 "질문," "저항," "소통," "새로운 공동체"에 걸맞게 루터는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질문하고 저항하며 소통하고 그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고자 힘썼다.

이제 루터는 지나간 시대의 장막 뒤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묻는 듯하다. "당신은 어떠한가? 질문하고 저항하고 소통하여 또 다른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가? 그럴 각오가 되어 있는가?" 라고 말이다.

 

글쓴이 박진아는, 목회학 석사(M.Div) 과정 졸업을 앞둔 고민많은 신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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