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훈] 희망제작소
[최주훈] 희망제작소
  • 최주훈
  • 승인 2017.11.08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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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11-19
Washington Allston(1779-1843), 'Christ Healing the Sick'(1813), Worcester Art Museum
Washington Allston(1779-1843), 'Christ Healing the Sick'(1813), Worcester Art Museum

우리 교회는 오늘 이 시간을 감사절로 지킵니다. 감사절 마다 같은 복음서 본문으로 설교하기 때문에 무슨 내용인지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치료받았지만 한 사람만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했다는 내용이지요. 나병은 우리가 문둥병, 또는 한센병이라고 부르는 피부 조직이 괴사해 들어가는 병입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 모두 치료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명만 돌아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이상합니다. 왜 한 사람만 돌아왔을까요? 나머지 아홉은 어디로 갔을까요? 17절에서 예수님이 바로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퍼뜩 드는 생각은 돌아온 한 사람만 착하고, 나머지 아홉은 나쁜 놈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은 아홉은 진짜 나쁜 놈들일까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만일 저기 치료받은 열 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면,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를 좀 멀찌감치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 볼까요. 14절 말씀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치료해 주신 것이 아니라 제사장에게 보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나병을 하늘이 저주한 병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치료 할 수 있다고 여겼고, 그렇기에 혹여 완치된 것처럼 보여도 그 확인은 오직 성전에 있는 제사장만 완치 판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율법에 이것을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이 제사장에게 가라고 명령하신 말씀은 냉정히 말해서 그저 율법에 정한 통상적인 답변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열 명이 어떤 기분으로 그 자리를 떴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곧장 예수에게서 발길을 돌이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던 길에 치유되었다는 점이지요.

이제 나병환자들 입장에서 한 번 생각을 해봅시다. 예수를 찾아가면 그 자리에서 치료받을 줄 알고 찾아갔는데, 엉뚱한 곳으로 가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치료된 것을 알아차립니다. 나병 환자 입장에서 보면, 누가 치료했는지 정확히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죠. 그러니 굳이 예수님을 찾아가 감사할 이유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성경은 나병환자들이 그렇게 예수님 말씀을 듣고 어디론지 떠났고, 그 다음, 갑자기 장면이 바뀌어 버립니다. 그런 다음 성경은 열 명 전체가 아니라 돌아온 한 사람에게만 포커스는 집중됩니다.

이 지점 부터가 중요합니다. 돌아온 사람의 정체가 누구인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입니까?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홉은 어디 갔을까요?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에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추측을 해보자면, 치료된 기쁨 때문에 환호하며 그 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에게로, 동네 사람에게로 돌아갔을 수도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린 무조건 이 아홉을 무조건 나쁜 놈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게 생각할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이 아홉은 예수님 말씀대로, 그리고 율법이 정한대로 제사장에게로 간 것은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을 나쁜 놈들이라고 비난할 이유는 궁색해집니다. 게다가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성경이 아홉의 행방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한, 알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복음서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 핵심은 돌아오지 않은 아홉이 나쁜 놈이라는 데 있지 않고, 오직 한 가지, 돌아온 사람이 이스라엘 땅에선 사람대접 받지 못하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데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18절 말씀으로 미루어보면, 분명히 나머지 아홉은 모두 유대인이고, 돌아온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 대목이 기가 막힌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상종하지 않는 게 보통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의 땅으로 들어갈 수도 게다가 유대 땅에 있는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가만 생각해 보면,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원래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이 함께 있었고, 함께 예수님께 치료해 달라고 소리를 외쳤습니다.

고통과 시련 가운데 있을 땐 서로가 서로를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관습과 생각, 역사가 달라도 동일한 고통 가운데 놓이면 사람들은 하나가 됩니다. 시련 가운데 하나가 되어 한 목소리를 내고, 함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나 치료가 되자마자 이들은 서로 갈라집니다. 방금 전 까지 아픔을 함께 나누고 의지하던 사람들이 아픔이 사라지자 다시 서로를 구분하게 됩니다. 우리네 삶을 돌아봐도 그렇지요. 자연재해나 국가에 시련이 다가오면 모두가 하나가 됩니다. 국가부도 사태가 있던 IMF 때를 떠 올려보십시오. 당시엔 모두가 하나 되었습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가락지며 금이빨이며, 아이들까지 돼지저금통 배를 갈라 나라 살리자는 마음으로 하나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시련은 그렇게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듭니다. 아픔을 공감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아픔의 기억이 사라지면 어떻게 됩니까? 치료 받은 저 열 명의 나병 환자들처럼 원점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것이 뼈아픈 우리의 현실입니다. 아픔을 공감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드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아픔을 공감하지 않고 제3자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본문에서 사라진 아홉을 나쁜 놈들이라고 욕할 최소한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돌아와서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아픔을 기억하지도, 공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성경은 이웃의 아픔을 기억하고 공감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가 봅시다. 돌아온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이 사람은 돌아올 수밖에 없는 처지가 분명합니다. 만일 아홉 명 유대인이 사라진 이유를 모두 감사하기 위해 계속 길을 걸어갔다고 생각해본다면, 그 아홉이 달려간 곳은 분명히 제사장이 있는 성전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던 길에 치료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 치료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 감격을 가지고 성전을 향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처지가 다르지요. 그 역시 불치병에서 나은 감격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주 받은 사마리아인이기 때문에 유대 땅 안으로 더 들어갈 수도, 더군다나 유대인의 성전 안으로는 들어갈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입니다. 정확히 말해 이 사람은 갈 곳이 없습니다. 이 감격이든 아픔이든 속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을 어딘가에 터트려야 하지만 아무 곳도 없습니다. 나병에 걸려 아파할 때는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어차피 정상인들이 살아가는 도성 안에선 살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생존의 권리를 빼앗긴 처지이니 신분이나 혈통 같은 구별과 차별이 없었는데, 몸이 다시 성해지니 갑자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구별과 차별이 생겨 버렸습니다. 그러니 사마리아인은 아홉과 함께 갈 수 없는 처지에 놓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갈 곳 없는 사람에게도 아직 기댈 곳이 한 곳 남아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디 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선포되는 복음입니다. 갈 곳 없는 사람, 의지 할 곳 없는 사람, 절망한 사람들이 기댈 최후의 보루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그리고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그렇게 찾아온 사람에게 예수님은 결정적인 말씀을 주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예수님의 치유, 그리고 구원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단지 치료받은 기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 새로운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것’,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구원입니다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 공동체라면 이렇듯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경청하면서 서로에게 기댈 곳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상호 후견인이 되어야 합니다. 정결한 부인은 매춘부의 후견인이 되어야 하고, 경건한 시의원은 도적의 후견인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자를 위해 피조되었고, 그 일을 위해 태어났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모두 빼앗기게 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교회 공동체라면 이와 같은 일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참조. 루터, WA 21, 346,21)

예수를 따르는 제자 공동체, 주님의 몸이라고 자부하는 교회 공동체가 바로 이런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와서 예수님께 기댈 수 있는 곳, 서로가 서로에게 제사장이요 그리스도가 되어주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세상에서 내몰린 비주류,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 희망이 끊어져 탄식의 소리를 드높이는 사람에게도 문턱이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누구나 육체의 아픔, 영혼의 아픔, 시대의 아픔을 공감하며 공유하고, 서로 의지하며 일어서게 만드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곳에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항상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 있고, 그 분의 말씀과 성령이 우리 모두를 새로운 미래로 일어나 걸어 나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교회는 희망 제작소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공유하고 회복하는 그리스도의 희망 제작소이기 때문에, 이곳은 감사의 원천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한 해의 신앙을 돌아보며 갈무리하는 감사절입니다. 지난 한 해를 어떤 삶의 자세로 살아오셨습니까?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교회를 찾아오셨습니까? 오늘 이 자리엔 감사와 기쁨, 반가움의 마음으로 오신 분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분은 나병환자 열 명처럼 무너져버린 몸과 영혼을 끌고 오셨을 것이고, 또 어떤 분은 치료받은 한 명의 사마리아인처럼 속마음을 털어 놓을 곳이 없어서 이 자리에 오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잘 오셨습니다. 바로 이곳에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찾아온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다시 한 번 복음의 말씀을 선언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주님의 이 말씀이 우리의 감사제목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갈 곳 없던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께 찾아왔듯이 교회란 누구나 들어와 하나님의 위로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곳입니다. 오늘 이곳에 오신 모든 분들이 이 복음의 감격으로 감사의 열매가 충만한 일상을 만들어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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