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바울에게 부활은 무엇인가?
[곽건용] 바울에게 부활은 무엇인가?
  • 곽건용
  • 승인 2017.11.06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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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2 - 고린도전서 15:12-22
CARAVAGGIO, THE CONVERSION OF ST. PAUL, 1600-1601
Caravaggio, The Conversion of St. Paul, 1600-1601

 

지난 주일에 했던 바울에 대한 첫 설교에서 저는 크게 두 가지를 얘기했습니다. 첫째는 루터의 종교개혁뿐 아니라 초대교회 형성기에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바울은 처음부터 논란 없이 그렇게 된 게 아니라 2천 년 교회역사 내내 논란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바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에 대한 네 가지 오해를 불식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네 가지 오해는 이런 것들입니다. 로마서,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등 일곱 개의 진정한 바울 서신들은 모두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보다 먼저 쓰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반대로 알고 있다는 점이 첫째이고, 둘째는 내용상으로는 바울행전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분량을 바울의 행적에 할애하고 있는 사도행전은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기록은 아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바울의 일생을 재구성해서는 안 된다는 점과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후자에 우선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바울서신은 예외 없이 서신을 수신하는 지역의 교회가 당면한 특정한 사안에 대한 대답이므로 그것을 일반화해서 언제, 어디서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교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고, 넷째는 바울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생활했던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사도들 및 예수님 동생 야고보와는 달리 예수님 살아생전에는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고 부활한 예수님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자신을 부르셨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을 통해 사도가 됐다는 점을 간과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오해를 불식하는 일은 바울 이해에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바울은 비정치적이고 친제국적인 인물인가?

여기까지가 지난주일 설교의 요약이고 오늘은 바울에게 부활은 무엇이었나?’를 얘기할 텐데 그 전에 두 가지 오해를 더 얘기하고 부활에 대한 얘기는 문제를 제기하는 정도만 하겠습니다. 제가 작년 11월에 한국 방문했을 때 벙커원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이 교회는 신학생이며 유명한 팟캐스트 진행자인 김용민 씨가 목회하는 독특한 교회입니다. 저도 이런 교회는 처음 방문했기에 기대가 컸습니다. 이 교회는 주일설교를 팟캐스트에 올려놓기에 몇 편을 들어봤습니다. 예상대로 매우 현실 참여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지가 대부분이었고 목회자가 아닌 운동권사람이 설교자로 나서서 통상 설교와는 형식과 내용이 다른 얘기도 하더군요. 물론 한국 상황과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는 그게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는 촛불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이었습니다. 제가 이곳 LAX를 떠났을 때와 인천공항에 도착했던 때는 한국사회가 크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교회에서 선포된 것들과 비슷한 내용을 얘기하는 것보다 제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고백에 가까운 얘기를 주로 했습니다. 이런저런 경우에 여러 번 얘기하기도 했고 글로도 썼던 내용입니다. 저는 그런대로 설교를 잘 했다고 생각했고 참석자들도 경청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상당히 시간이 흘렀는데 제 설교가 팟캐스트에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김용민 씨에게 문자로 물었더니 그 동안 바빠서 작업을 못했다면서 곧 올리겠다고 말하더군요.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시시각각 정국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때였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끝내 설교는 올라오지 않았고 저도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생각해봤습니다. 왜 그랬을까? 내가 그렇게 설교를 못 했나? 거기 올리지 못할 정도로 설교를 못했나? 그랬기보다는 제 설교가 정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야흐로 촛불정국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는데 저는 그것과는 직접 관계가 없는 설교를 했으니 말입니다.

저는 오늘 처음으로 이 얘기를 합니다. 제 설교를 올리지 않은 데 대해서 크게 섭섭하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얘기를 하는 까닭은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바울서신들을 찬찬히 읽어보고 느낀 게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바울을 비정치적이고 심지어 친로마적이고 친제국주의적인 인물로 여깁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한 인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는 얘기를 지난 주일에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는 그와는 정반대의 인물입니다. 그는 위험할 정도로 정치적인 인물이었고 반제국적 성향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하느님나라 복음을 왜곡한 인물이 아니라 실천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학자들은 바울을 오해할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그가 정치적인 메시지를 표현하는 방식이 많은 경우 언뜻 보면 비정치적으로 보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오랫동안 바울을 읽어온 학자들의 편견 때문입니다. 중세와 근대를 거쳐 최근까지도 바울 연구는 주로 서구의 백인, 중산층, 남자 신학자들이 독점하다시피 해왔는데 많은 경우에 이들은 자기들의 정치적인 입장을 바울에 투영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조건 권력에 순종하라는 식의 권력지향형 인물로 해석되거나 최소한 정치와는 무관하게 개인의 영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신학자로 해석되어왔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한 가지 에를 들겠습니다. 사람들은 바울복음의 중심메시지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영어로 말하면 ‘justification by faith’라고 이해해왔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본래는 의롭지 않은 사람을 하느님이 그의 믿음을 보고 봐줘서 의롭게 여겨준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율법의 모든 조항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어차피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고 그랬다가는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하느님이 이를 긍휼히 여기시어 믿음만 갖고 있으면 의롭다고 여겨주기로 하셨다는 겁니다. 이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이런 뜻으로 이해되어왔습니다.

루터가 이 문장을 종교개혁의 모토로 삼은 까닭은 당시 가톨릭교회가 지나치게 예전(ritual)과 전통(tradition)에 치우쳐서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와 믿음을 주변으로 밀어냈다고 여겼기 때문인데 이런 점도 간과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성서에서 의롭다는 말이 어떤 뜻을 갖고 있는지를 따져보면 이 말은 의롭게 여겨지다는 뜻이 아니라 정의를 행하다란 뜻입니다. 시간 관계로 길게 설명하고 예를 들 수는 없지만 결론은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가 아니라 믿음으로 정의로워진다또는 믿음으로 정의를 행하다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겁니다. 영어로 하면 ‘justification by faith’가 아니라 ‘justice by faith’ 또는 ‘doing justice by faith’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 얘기는 나중에 더 상세히 애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또 하나의 오해는 이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인물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를 압니다. ‘나는 아직 모르는데...’라고 생각하며 겸손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시대 사람들에 비해서 우리는 바울은 잘 압니다. 바울시대에 바울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았고 그가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아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의 사상을, 그의 복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유대인과 로마인은 말할 것도 없고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조차 바울과 그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각각 다른 이유로 바울의 복음에 동의하지 않거나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갈등도 많았는데 그 일부가 바울서신이 전해집니다. 사도행전은 가능한 한 이 갈등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게 성령의 인도로 순조롭게 전개됐다고 서술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역사적 가치로 보면 사도행전이 바울서신에 뒤지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점들을 명심하고 바울을 읽어야 합니다. 바울을 가능하면 낯설게 읽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가능하면 그와 그의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털어내고 그의 서신들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바울이 낯선 사람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는 낯설게 읽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은 실제 바울이 아니라 오랫동안 교회가 이해해온 바울, 실제와는 달리 순화되고 길들여진 바울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바울은 율법을 해치는 심각한 배교자였고 로마의 사상가들에게는 몸의 부활을 주장하는 터무니없는 돌팔이 사상가였으며 교회지도자들에게는 율법과 할례와 같이 적당히 타협해도 될 문제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해서 쓸데없는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이 되려는 이방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할레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율법이 나쁩니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율법 규정들을 지키는 게 왜 문제가 된다고 바울은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 귀화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그토록 반대했던 걸까요? 바울은 이런 주장을 복음을 망가뜨리는 짓이라며 적극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복음서들이 부활을 증언하는 방법

이런 점들을 감안하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바울을 읽어보겠습니다. 오늘 하려는 얘기는 바울에게 부활은 무엇인가?’인데 시간이 많이 갔으므로 오늘은 문제만 던져놓고 답은 다음주일에 찾아보겠습니다. 최초로 쓰인 마가복음 161-8절은 예수의 부활을 이렇게 전합니다.

안식일이 지났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가서 예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래서 이레의 첫날 새벽, 해가 막 돋은 때에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그 돌을 무덤 어귀에서 굴려내 주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그런데 눈을 들어서 보니 그 돌덩이는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 돌은 엄청나게 컸다. 그 여자들은 무덤 안으로 들어가서 웬 젊은 남자가 흰 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 그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놀라지 마시오.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살아나셨소.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소. 보시오, 그를 안장했던 곳이오. 그러니 그대들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니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거기에서 그를 볼 것이라고 하시오." 그들은 뛰쳐나와서 무덤에서 도망하였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못하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본래 마가복음은 여기서 끝난다고 봅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마가복음은 9-20절이 더 있지만 이 대목은 후대에 덧붙여졌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났고 마리아는 그 얘기를 제자들에게 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고 결국 나중에 예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서 그들의 불신앙을 꾸짖었으며 그들에게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다는 얘기가 이어지는데 사실은 이 얘기들은 후대에 덧붙여졌다는 겁니다. 오래 된 사본들 중에 이 부분이 빠져 있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도 이를 입증합니다.

마태와 누가, 요한복음에는 부활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난 다양한 얘기들이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들 얘기들에는 서로 일치하지 않은 점들이 많습니다. 세 여자들이 무덤에 갔었다고 전하는 마가와는 달리 마태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두 명만 무덤에 갔다고 전합니다. 이보다 더 큰 차이도 있습니다. 이들이 무덤에 갔을 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고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에 다가와서 그 돌을 굴려 내고 돌 위에 앉았다고 합니다. 마가에서는 여인들이 누가 돌을 치워줄까 걱정했는데 가보니까 이미 돌이 굴려져 있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천사가 그걸 했다는 겁니다. 마가에는 없는 지진 얘기도 있고요. 마태에서도 천사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걸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말하지만 마가와는 달리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났다는 얘기를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자들에게 평안하시오?”라고 물었고 여자들은 다가가서 예수의 발을 붙잡고 그에게 절을 했다는데 이런 얘기는 마가에는 없습니다. 누가와 요한도 마가, 마태와는 다른 얘기들을 전합니다. 누가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얘기가 나옵니다. 요한에는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얘기, 어부였던 제자들이 생업으로 돌아갔는데 그 자리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생선을 구워준 얘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대가 나를 사랑합니까?”라고 세 번 물으셨다는 얘기 등이 전해집니다.

이렇듯 네 복음서는 각기 다른 부활 얘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각 복음서가 서로 다른 얘기를 전하는 까닭은 그들이 전해 받은 부활 얘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이런 차이들을 조화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큰 차이를 무슨 수로 조화시키겠습니까.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대목은 왜 이 복음서들이 부활한 예수님이 여러 사람들에게 몸을 갖고 나타났다고 말하느냐는 점입니다. 왜 이들은 이토록 힘써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몸으로 나타나셨다고 말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들 복음서들이 기록됐을 당시에는, 곧 기원후 70년에서 100년 사이에는 예수님의 육체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지 않았는데 제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해서 신자들을 교란시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해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 강조했던 겁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땠을까요? 바울서신에는 딱 한 군데를 제외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눈에 보이게 나타났음을 말하는 구절이 없습니다. 곧 바울에게는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부활이 중요하지 않았던 겁니다. 바울에게 부활은 복음서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이고 왜 이런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래서 바울에게 부활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분의 궁금증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후에 다음주일에 얘기하겠습니다. 제가 읽어보라고 얘기한 바울의 서신들, 곧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를 정독하면 제 얘기를 더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글쓴이 곽건용목사는 LA 지역의 나성향린교회 담임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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