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페미니즘을 기대하며"
"건강한 페미니즘을 기대하며"
  • 이진영
  • 승인 2018.01.21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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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목사의 복빛교회 목회단상

 

Marle Hugues, “Ruth in the Field” (1876)
Marle Hugues, “Ruth in the Field” (1876)

룻기를 여섯 차례에 걸쳐 강해하면서 저는 고대 근동 지역 사회에서 아니 하나님의 언약으로 세워진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있어 여성의 사회적 위치는 어떤 것이었는지를 평소보다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성도 여러분에게도 같은 기회가 있었을지 모르겠네요. 특히 지난 해 말에 공동의회를 거쳐 권사 직분을 신설하고 이어서 새해 첫 주였던 지난 주일에는 당회가 세 분의 권사를 추천하고 두 분의 은퇴 권사를 임명하면서 여러 생각의 언저리들이 계속 서로 겹쳐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부장적인 한인 사회에서 (그것도 이민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이미 그리고 오랜 동안 학습된 남성과 여성의 역할 구분이 때로는 복음을 이해하는데 적잖은 어려움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군에 있을 때 일들을 자주 말씀드리게 되네요. 훈육관으로 복무하던 시절에 공군의 역사상 처음으로 여군 장교 후보생이 입대했었습니다. 제가 공군학사사관후보생 104기 출신이고 그 친구들이 105기였으니까 바로 한 기수 선후배 관계이지만 어쨌든 저는 훈육관이었고 그네들은 후보생이라는 흔히 말하는 애비와 새끼의 관계로 얽힌 것이었지요. 참 독특한 인연이지요. 그런데 이네들을 훈육하는 과정에서 제가 한 번 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야간사격 훈련 때였습니다. 바로 옆에 여 후보생들 소대가 있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남 후보생들과 농담을 주고받다가 그만 음담패설을 내뱉는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저를 훈련시킨 교관들이 아무렇지 않게 제게 주입시켰던 것을 저도 아무런 생각 없이 마치 교안을 외듯 반복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식은땀이 날 정도로 부끄러운 말이었고,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한동안 성인 남성들만의 리그였던 군인사회의 폐쇄적인 특성상 음담패설과 여성 비하적 언행은 너무나도 평범하고도 익숙하게 자리잡아온 문화적 부작용인데 그 속에서 훈련을 받고 장교가 된 저 역시 많은 영향을 부지불식간에 받았던가 봅니다. 제가 내 뱉은 말이 여 후보생들의 귀에 들렸고 후보생들은 그들의 소대장 겸 중대장이기도 하고 제 선배이기도 한 정OO 대위님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정대위님은 여 후보생 훈육을 위해 육군에서 차출되어 전군한 뛰어난 여장교였습니다. 평소에 후배인 저를 귀하게 여겨 잘 챙겨 주시던 분이기도 했습니다.

정대위님이 어느 날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해서 따라 나가서 맛있게 저녁 대접을 받았습니다. 식사 후 간단하게 차를 한 잔하면서 어렵게 제게 그 일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후배를 아끼는 마음으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서 얘기를 해주셨는데도 저는 그 순간이 얼마나 부끄럽고 힘겨웠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부지불식간에 학습된 문화의 일부라지만, 분명한 잘못이고 언어폭력이었습니다. 경우에 따라 사람에게 큰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더구나 사관교육대 안에 제가 신자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말이죠. 며칠 동안 마음이 무겁고 괴로워서 제대로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기에 제가 당직 사관을 서던 밤에 여 후보생들의 일석점호(日夕點呼)를 기회로 삼아 사과의 마음을 표현하기로 했습니다. 점호시간이 되어 따로 마련되어 있는 여 후보생들의 숙소 건물에 들어가니 내무반장들이 복도에 나와 점호를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인원보고 및 점호 일체를 마무리 한 후에 전 중대원을 복도에 모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야간사격 훈련 시 제가 범한 몰염치한 언어폭력에 대해서 죄송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하얀 다이아몬드 하나가 수놓아져 있는 빨간 교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모자를 쓰고 중대를 해산시킨 후에 숙소를 빠져나왔습니다. 당직사관실로 걸어가는 제 발걸음이 30분쯤 전에 숙소로 걸어가던 걸음의 열 배는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최근에 보수 개혁주의 교회 안에서도 불식간에 자리 잡아온 남녀 간 불평등의 문화가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언약의 본질로 보자면 너무나 당연한 존중과 예의이자 평등의 문제인 것을 왜곡된 신학과 신앙을 핑계 삼아 불평등과 심지어 폭력의 문화로 자리 잡은 것들이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우리는 유명한 미국의 주류 정치인과 방송인들이 성희롱과 폭력의 전적이 드러나 몰락하는 것을 목격했고, 멀리 한국 교회와 이민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됩니다.

기존의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통념을 거스러서 모압 여인 룻의 보호자가 되어 주고 그의 언약적 정체성을 높여 존대해 주었던 보아스의 헌신을 되새깁니다. 보아스에게 그것은 전통과 관습과 거대한 일상의 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위험한 모험이었습니다. 자기 자신과 나오미와 룻이라는 여인에게 부여된 언약적 정체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감히 나설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요컨데, 저는 개혁주의 장로교의 신학에도 건강한 페미니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이 함께 나누게 될 소통을 통해 앞으로 구체화해 가야할 하나의 큰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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