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영혼, 예술가의 좌절된 사랑의 흔적
깨어진 영혼, 예술가의 좌절된 사랑의 흔적
  • 이진영
  • 승인 2018.01.15 07: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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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의 영화속을 거닐다 - Loving Vincent Living Vincent #3
네덜란드 남부 누에넨(Nuenen)을 찾아서

네덜란드 남부, 노스 브라방 주에 위치한 인구 2만 정도의 작은 도시, 누에넨. 1882년 빈센트 반 고흐 아버지가 이곳 목사로 부임했고, 당시 30세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1883년부터 2년간 이곳에서 지내며, 대작으로 인정받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베틀 짜는 사람, 교회, 수차, 풍차, 정물화 등을 작업했다. 노동의 순수성을 사랑했던 그는, 두껍고 투박한 농부의 손마디와, 뭉툭한 코, 어두운 식탁 조명의 의미까지도 살려냈다.

수차

빈센트 반 고흐의 숨결이 살아있는 도시답게 사방에 그 발자취가 가득했다. 특히 마을 입구에 세워진 그의 동상 아래 새겨져 있는 한 마디를 보면 그가 얼마나 이곳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꿈꾸던 브라방(누에넨이 있는 주)의 모습이, 이곳에서 현실로 느껴져” - 1884515일 테오에게 보낸 빈센트의 편지 중에서 -

마을이 오픈 갤러리처럼 구성되어 있어, 빈센트 반 고흐의 추억이 있는 곳, 실제 그림의 모델이 되었던 장소 앞에는 작은 안내문과 영어/네덜란드어 오디오 서비스도 제공된다. 이 중에서 특히 발길이 머물게 된 곳은, 그가 사랑했던 한 여인이 살던 집이었다. 마가레타 마곳 베게만(1841~1907), 빈센트보다 12살이나 연상이었던 그녀는 빈센트 옆집에 살았다. 빈센트 어머니가 동네에서 옷감 짜기를 가르치던 중 몸을 다쳐 일할 수 없게 되자, 옆집에 살던 그녀가 그 일을 대신 하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친해졌고 사랑에 빠졌다. 그는 그녀에게 청혼까지 하게 된다.

그녀는 신경 쇠약과 우울증으로 힘들어했고, 빈센트 반 고흐도 그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그녀를 더 일찍 만나지 못 한 것이 아쉬워. 10년 전 쯤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녀는, 제대로 관리하지 못 한 크레모나 바이올린(역자 각주: 크레모나 : 바이올린 제작지로 유명한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도시) 같아. 상처가 많은 악기 같거든. 하지만 (역자 설명 : 상처가 있어도 그대로 가치가 있는) 바이올린처럼 그녀는 아주 귀하고 소중한 여자야. - 1884년 앤톤 반 라파르트(1858~1892)에게 보낸 편지 -” (번역 : 이진영)

하지만 결국 그녀는 1884년 자살을 시도한다. (이 둘의 결혼 반대로 죽음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들의 관계도 그렇게 끝났고, 빈센트에겐 또 한 번의 상처로 남았을 뿐이다.

 

베틀짜는 사람
베틀짜는 사람

소박한 농부와 노동자를 사랑했던, 가슴이 따뜻한 예술가 빈센트도 연애 문제만큼은 좌절과 거부당함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1881년 에텐에서 연상의 미망인 보스-스트리커(1846~1918)와 사랑에 빠졌지만 양가의 반대로 헤어졌다. 그 뒤인 1881~1883년 헤이그에서는 시엔(1850~1904)이라는 창녀와 함께 살았다. 임신한 그녀를 불쌍히 여겨 작업실에 들인 것이다. 동생 테오를 제외한 가족 모두와 후원자들은 이를 심하게 반대했고, 그는 결국 그녀를 떠나야 했다.

감자 먹는 사람들
감자 먹는 사람들

심지어, ‘감자 먹는 사람들의 모델이 되기도 했던(그림 중 좌측에서 두 번째), 고르디나 스티언을 임신시켰다는 의심까지 받게 된다. 후일 파리에서는 이탈리아 여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 파리의 카바레 '르 탕부랭'의 주인)과도 사귀었다고 한다. 그가 애정을 느낀 대부분의 여성은 그 시대 사회적 약자인 과부, 매춘부 등이 주를 이뤘고, 모든 관계는 비극으로 끝났다. 그가 일생 후반기를 보낸 아를에서 창녀촌을 드나든 것은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관계에 대한 체념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는 이곳 누에넨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 당시 가까웠던 화가 친구 앤톤 반 라파르트(1858~1892)와는 감자 먹는 사람들그림에 대한 이견으로 등을 돌렸고, 이곳에서 만난 크레모나 바이올린 같은 사랑하는 여인과는 비극적으로 헤어졌으며, 1885년에는 사랑하는 아버지마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심지어 사생아의 아버지라는 억울한 누명으로 쓰고 이곳을 떠나야 했으니, 상실의 시간이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작품에 대한 영감과 열정을 받은 곳 또한 이곳 누에넨이다. 창작의 힘은 갈증에서 온다. 채울 수 없었던 사랑의 빈 공간, 허기진 힘으로 그는 붓을 들지 않았을까.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아니한가. 좌절과 결핍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움직이는 동력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잃는 순간, 그것을 다른 것으로 채우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때로는 폭발적인 힘을 가지며, 그것이 예술과 창조 행위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 예술가의 상실감과 예술혼이 담긴 누에넨의 길을 걷고 또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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