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개의 얼굴, 하나의 예수, 사랑의 주님
네 개의 얼굴, 하나의 예수, 사랑의 주님
  • 이진호
  • 승인 2018.01.12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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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L. 스트라우스. 네 편의 초상, 한 분의 예수.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17년

마크 L. 스트라우스. 네 편의 초상, 한 분의 예수.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17년
마크 L. 스트라우스. 네 편의 초상, 한 분의 예수. 한국성서유니온선교회, 2017년

어 이건 왜 다르지?’ 고난주간 동안 학생부 자체 내 행했던 기도회의 성서 읽기중 문득 의문이 생겼다. 복음서끼리 달라 보이는 내용이 눈에 밟힌 것이다. 당시엔 성서에 대한 깊은 음미가 없었기에 ‘뭐 그럴 수도 있지‘라는 약간의 찝찝함을 남겨둔 채 기도에 집중했다. 기도가 끝난 후, 목사님에게 상이한 본문의 문제를 질문했던 내게 돌아온 대답은 ‘그냥 믿으면 돼’라는 맹신이었고, 믿음 없음이라는 질책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말이지만 당시에 이를 크나 큰 죄라고 인식하고 의문보다 기도로 믿게 해달라는 자책감에 사로잡혔기에 그 말을 마지못해 수긍했고, 텍스트에서 말하려는 바에 기반을 두지 않는 허상의 믿음을 갖길 기도했다.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이전에 대면했던 그 문제를 다시 직면하게 됐다. 복음서 본문의 상이한 것에서 나온 그 문제, 큰 사건은 공유되지만 꼼꼼한 문체나 상황, 장면에 있어 차이를 보여주는 복음서의 문제가 신앙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 시절에 교리와 조직신앙에 빠져있던 터라 교리의 시선으로 텍스트의 문제를 해석하고 적용하여 해결하려 했건만 오히려 더더욱 늘어가는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텍스트 사이의 간극과 신학, 해석에 대한 틈을 보게 했다.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자꾸만 머리를 헤집어놓으니 몇 날 며칠 밤잠을 못 이뤘고, 명확한 답을 위해 교수를 찾아가 복음서 서로가 상호보완한다는 대답을 들었지만, 보완이라고 보기 어려운 차이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이걸 어떻게 보완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지? 조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 의문만 깊어질 뿐이었다.

끝도 없는 질문은 필자를 성서학이라는 분야로 이끌었다. 공부하며 텍스트에 문학, 역사, 해석, 양식 등등의 다양한 층위들이 본문에 내재되어 있음을 자각게 만들었고, 이것들의 결을 가추하며 읽어 나가는 재미를 느끼게 했다. 그러나 이는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방대한 내용과 보수 교단에서 ‘마귀’라고 불리는 역사, 사상적 흐름을 통과해야 하는 문턱이 자리 잡고 있었고, 다양한 질문들을 통한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마녀사냥 당하기 일 수였다. 공부하기에 쉬운 자료는 부족하며, 한 입장으로 편향된 자료들만 즐비했으며 그나마 쓸모 있다고 판단된 서적들은 어려운 내용을 복잡하게 전달하고, 명료성과 간결성이 결여했기에 전체적인 지형을 파악하기에 좋지 않았다.

최근 들어 좋은 성서학 책들이 출간되며 성서학의 주요한 내용을 접하게 된 요즘, 성서유니온선교회에서 복음서와 관련된 좋은 개론서가 출간됐다. <네 편의 초상, 한 분의 예수>라는 책이다. 보수적 태도를 띄고 있는 저자는 약 1,000페이지의 지면을 통해 복음서와 예수를 살펴보는데 특히, 너무나도 익숙하여 쓸모없다고 여기는 질문들 즉, 복음서는 어떤 책인지, 복음서는 왜 나오게 되었는지? 복음서의 장르는 어떠한지? 등등의 문제를 통해 복음서가 어떠한 책이며, 무엇을 담고 있고, 왜 작성되었는지를 파악하며 텍스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한 성서학 연구들인 비평학에 관한 논지와 이를 활용한 예수와 기독교의 문제를 복음서를 통해 쉽고 명료하면서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다른 개론서들보다 훨씬 쉽고 명료하며 전달성이 강하다. 먼저 가독성이 매우 뛰어난데, 이는 번역자 박규태 목사님의 훌륭한 번역 즉, 우리나라 저자가 쓴 것만큼의 명료한 전달성이 매우 큰 역할을 감당한다. 이와 더불어 책이 지니는 주제를 전달하려는 방식이 신학교 강의 개념으로, 개관과 목표를 명시하고, 논지가 끝날 때마다 내용의 요약을 제공하여 다음 장과의논지와의 연관성과 유기성을 인지하며 책의 내용을 이해하게 되어있다 또한 각 장마다 중요한 자료들을 정리한 도표, 사진, 그림들이 실려있는데, 이는 익숙지 않아 난해한 관념으로 넘어갈 법한 것들을 한데로 묶어 시각화하여서 한 눈에 파악하도록 돕는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책에 나와 있는 그림과 도표, 사진들만 모아놓아 책으로 출간하여 자료로 활용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명료하며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책의 내용은 복음서와 예수, 다양성과 독특성이라는 긴장을 따라 예수의 삶 즉,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이해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저자는 이 내용을 크게 세 장으로 논증하고 있는데 1. 사복음서 소개와 배경 2. 사복음서 내용 3. 역사 속 예수로 설명한다. 책의 첫 시작이자 제일 좋은 장이라고 생각되는 사복음서 소개와 배경은 신약개론과 신약신학에서 다루는 내용 중, 복음서와 관련된 중요 개론을 집약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성서학의 발전으로 이룬 다양한 비평의 흐름과 결과들을 보수적인 태도 즉, 역사, 사회, 문학, 신학적 특징(p.141)을 살피는 특히 복음주의 중 자유주의 학계와 소통하는 세 번째 탐구의 사람으로(p.604) 각 견해를 살펴보고 반박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구축한다. 이러한 대화는 복음서에 깊이 있는 소개를 위한 복음서에 대한 질문과 배경을 통해 그 당시까지 흐름을 형성한 역사, 문화, 정치, 종교적 흐름을 다루면서 당대의 사람들이 어떤 마음과 생각, 기대와 행동을 이야기로 유추하게끔 이끌며 그 중심에 그동안 쉽게 잊혀 왔던 유대교인 이스라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사상을 관찰함으로써 당대 로마 속국으로 종교를 지킨 양식을 고찰하며 복음서 읽기의 터를 닦는다. 두 번째 장인 사복음서 내용은 각 복음서가 지닌 문체와 문학적 특징, 패턴과 주제를 먼저 다루고 이것들이 플룻에 어떻게 쓰이고 반영되었는지? 를 살펴보며 이를 관통하는 신학 주제를고찰하고 텍스트의 기반에 각 복음서의 쓰인 목적, 배경, 계기 등을 추론하고 이를 통해 선언하는 예수를 서술한다. 마지막 장은 각 복음서에 살펴본 내용을 기반으로 저자의 시선으로 먼 곳이라 불릴 수 있는 예수에 대한 소문부터 시작하여 삶, 사역, 죽음, 부활까지 앞에서 살펴본 복음서의 내용을 기반 삼아논지를 펼치며 내용을 전개한다. 여기서 각 장에 타 의견, 대표적으로 합리주의 등의 문제를 간략히 다루고 평가하면서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이어진 보수적 견해가 현실 가능성 있으며, 이해가 가능한 것임을 논증한다

간결하고 명료하며 다양한 입장을 개론적으로 서술하고, 보수적 태도로 연구 결과를 관통하는 크나큰 장점이 있는 이 책에도 아쉬운 부분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로는 첫 장으로 설명하는 사복음서 소개와 배경과 세 번째 장의서술 즉, 역사 속 예수의 내용에서 괴리가 종종 보인다. 저자는 보수적 견해 즉, 기존의 교리를 준수하고, 교리와 해석의 틈을 줄이고자 하는 전제 하에 서술하는 역사 속 예수 안에서 무리하게 작용하는 역사적 확신(특히 누가에 대한 과도한 확신)이나 앞서 살펴본 비평의 도구로 나타난 현상들의 깊이 있는 고찰로의 재구성이 아닌 논리적 비약과 억지로 꿰맞춘 재구성의 모습이 아쉬운 데, 이는 전제를 너무 강조함으로써 그가 나타내려는 방법론에 있어 감탄고토의 실수가 보이고, 미시적 측면의 고찰과 각론적인 것에 대한 단순한 서술과 이해를 나타내어 상당한 취약점을 나타내는 단점으로 보인다. 앞서 본 내용을 주의 깊게 본 독자라면 비약과 전제로 인한 다양성의 통합이 아닌 획일성의 모습이, 그로 인한 각 내용의 특징이 저하되는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로, 역사 속 예수는 결국 세 분야 중 먼저 다룬 두 분야의 내용을 갖고 재구성한 내용 그 이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세 번째 분야인 역사 속 예수의 서론이라 할 수 있는 11장과 12장의 부분들을 제외하곤 앞서 살펴본 내용과 유사하거나 조금만 성서를 주의 깊게 읽고, 고찰한다면 혹은 신학에 관해 관심이 있어 여러 책을 들춰봤다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내용을 다시 한번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 번째로 개론서의 성격이 강하다 보니 그 안의 내재한 중요한 내용, 예를 들면 구전 전승이나 고기독론, 신약의 구약 사용, 정경과 위경의 차이와 정합한 해석 등등을 엄밀한 학문적 탐구와 연구로의 도출된 입장이 아닌 보수적인 견해로 쉽게 단정 짓거나, 전통의 권위를 무조건 따르며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데, 이 내용은 신약학계에서도 충분한 자료와 해석의 논쟁으로 다양한 이론들로 논쟁 중인 부분이고, 이러한 입장들이 복음서의 난제들을 해결하는 다양한 시각과 연구로 작용하고 있음을 그리고 이들이 더 정합성 있는 복음서에 대한 이해로 작용하고 있음을 기억한다면 정밀한 작용이 배제된 입장으로 서술한 각론적 내용은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고, 다양한 전제와 해석으로 대화할 수 있고, 시대와 공동체적으로 전유 되며, 이를 넘어서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이자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면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더 깊이 있는 복음서의 독해와 그로 인한 예수상을 제공하는 입장이라면 이를 통해 복음서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절충되고 해석되고 있는 즉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여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써 그의 사랑으로 알아감에 익숙함과 낯섬을 넘나드는 예수를 살펴보게끔 만들어야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필자는 개론서의 역할로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을 강하게 추천하는 바인데,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기존의 통념을 바꿀만한 내용은 아니지만 방대한 내용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본서의 특징과 보수적인 입장으로 사상사를 꿰며 보수가 지닌 교리와 전통 속에서 진행되는 학문적 논의와 대화, 그리고 재구성한 예수를 통한 이 시대의 예수와 복음서에 대한 논지는 텍스트를 잃어버려 나름의 예수로 각을 세우고,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현시대의 돌파구로 작용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평신도에겐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성서의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형성과 의미를 고찰하고, 각 복음서의 초상을 통한 다양성과 통일성을 느끼며 하나님과 신앙, 삶의 신비를 직면하게끔 그리고 이야기라는 거대서사의 힘으로 각 서사의 의미가 부여되게끔 해주는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읽을 때, 도움이 되는 읽기 방식으로 필자는 먼저 저자의 전제와 입장, 문맥을 확인하고 각 요소를 저자가 평가할 때, 어떤 시선으로 평가했는지를 유추하며 나름의 지형과 말하려는 의도를 추론한다면 그리고 이를 통해 전하려는 당시의 그리스도교 사건, 좁게는 복음서와 예수의 보편과 특수를 나름의 시각과 이해로 이야기를 만들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한다면 앞으로의 복음서 논의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더불어 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읽기 방법은 각 각론에 대한 내용을채워가며 읽는 것이다. 거시적 흐름에 있어 훌륭한 면모(자료나 도표 등)를 보이는 이 책의 행간 속에 숨겨진 사상들의 핵심들을 채우고, 각론들의 주요 논제나 영향사를 채운다면 한 권으로 200년 동안 이어진, 복잡하고 어려운 성서학의 역사를 보수적인 시각으로 관통할 수 있게 도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저자인 슈트라우스가 했던 독해의 방법을 따라가며 자신이 독해하여 재구성한 예수와 대화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며, 공동체로써 삶과 사회의 맥락 속에서 어떻게 발화하고 관계 속에서 재구성할지를 상상하면서 읽는다면 크나큰 유익을 얻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반 신도들은 역사 속 예수를 다루는 장부터 시작하여, 각 복음서의 주제와 플룻을 다루고 있는 두 번째 장을 읽고, 마지막 복음서란 어떤 책인지를 살펴본다면 저명한 신약학자의 재구성 속에서 복음서를 읽는 길을 헤매지 않고 잘 찾아 나설 수 있으리라고 본다.

알랭 바디우가 그의 책 <사랑 예찬>에서 ‘사랑은 새로운 세계(사건)을 여는 문’이라 말했다. 필자는 이를 인용하여 예수의 삶과 사역, 십자가는 완전하고 완성된 세계(사건)을 여는 신의 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수와 기독교의 기원, 복음서와 예수의 문제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난해하여, 흡사 불신앙의 늪으로 빠져드는 듯하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확인되는 것은 너무나도 매혹적인 예수의 모습과 그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의 주님 됨이다. 연구하며 공부할 때마다 역사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 혹은 하나의 관점으로 엮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혹은 이게 정말 맞는가? 라는 의문과 회의가 들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은 신앙과 불신앙을 넘어서는 초월의 하나님을 직면케 하고, 저 너머에 대한 강렬한 열망에 휩싸이게 만든다. 이러한 열망은 단순한 지적 동의를 넘어 자아와 타자, 삶과 세계, 존재자와 존재의 의미를 채색하며 삶을 진리 되게 이끈다. 이것이 텍스트를 통해 선언되는 예수의 사랑이 발화하고, 설명하며, 작용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신비이자 사랑의 힘이다. 네 복음서를 공부하면서 느끼는 것은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다는 감정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 모름이 매혹으로 작용하는 사랑의 신비를 보게 되며 이는 신이 이끄는 섭리 안에 가능한 신앙의 여정을 걷게 하고 그것들이야말로 더더욱 예수와 사랑에 빠진 자들이 보여주는 강렬한 믿음의 여정이라는 것을 아니 우리를 사랑하는 예수의 사랑에 매혹당할 때 보여주는 일련의 모습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놀라운 과정에 동참하는 길은 달라 보이는 복음서를 통해 선언되는 예수를 존재자의 삶으로, 단독자로서구성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거기서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 안에서 살아 숨 쉬며 하나님에게 이끌어간다. 다면적이고 다층적이며 특수하고 다양하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삶과 복음서의 신비 그 이면에 계신 초월의 신비를, 이해를 넘어선 경이를 맛보고 싶다면 들고 읽으라. 그것이 우리를 사랑의 하나님, 상이한 모습 속에 보이는 진실된 예수의 얼굴로 이끌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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