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찾는 구도자
진리를 찾는 구도자
  • 김영웅
  • 승인 2018.01.11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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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현대문학, 2013년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현대문학, 2013년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현대문학, 2013년

평일에 팔다리가 피곤해질 때까지 일을 한 사람들에게 휴일은 더욱 축제처럼 느껴진다. 일상을 잃어본 사람은 일상의 위대함에 전율하기 마련이다. 순식간에 망각은 착각이 되고, 착각은 깨달음이 된다. 보람과 성취감, 그리고 경이감, 이름은 다르지만 이들 모두는 우리가 다시 발견하게 된 행복의 조각들이다. 그러나 이런 소중한 순간들은 불청객처럼 우리를 찾아왔다가, 아쉬워할 새도 없이 순례자처럼 사라져 버린다. 깨달음은 어느새 착각으로, 착각은 다시 망각의 세계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 인간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진리를 찾기 위한 인간의 역사는 곧 철학과 신학의 역사다. 진리가 본질적인 가치를 의미한다고 할 때, 인간은 그것을 찾기 위해 모든 방법으로 모든 곳을 뒤졌다. 누군가는 피안의 세계에서, 누군가는 차안의 세계에서 진리를 찾았다. 누군가는 사유만으로, 또 누군가는 감각만으로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누군가는 진리가 사물의 배후에 있다고 하여 눈에 드러난 현상계를 무의미하고 우연한 것이라고 치부하고 경멸했으며, 또 누군가는 사물들 속에 진리의 본질과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는 진리를 찾기 위하여 자아를 벗어나고자 온갖 힘을 다했지만, 누군가는 외부가 아닌 오히려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을 했다. 과연 진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아니면 어디에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진리가 어디에 있든, 진리를 찾기 위해 진지한 발걸음을 내딛는 모든 구도자에겐 그 과정 자체가 인생 전체를 의미할 만큼 절박하고 의미심장할 것이다. 구도자는 그 과정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설 때도 있을 것이며, 고뇌와 희열의 경계에 서서 번뇌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조차 망각과 착각, 그리고 깨달음의 변증법적인 고리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불교의 윤회 사상이 어쩌면 이런 인간의 행로를 잘 설명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여기, 한 구도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싯다르타.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위대한 현인이자 사제, 브라만의 우두머리로 자랄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탁월함은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 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정신적 만족도, 영혼의 안정도 얻지 못한 채 불안해했다. 그의 진리를 갈구하는 목마름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는 늘 고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싯다르타는 출가하여 고행과 명상 등으로 해탈에 이르려는 사문들의 일행에 합류한다. 그에게는 단 하나의 목표만이 있었다. 마음을 비우고, 자기 자신을 죽이고,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래서 자신을 초탈한 경지에서 경이의 세계와 접하는 것이었다. 타고난 재능과 뛰어난 학습능력으로 그는 몰아와 침잠을 익혔다. 단기간 내에 사문들 중에서도 탁월함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3년 뒤 사문 생활도 접기로 결정한다. 몰아의 경지에 이를 줄 안다 해도, 매번 또다시 자아로 되돌아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러한 윤회로부터 고뇌를 느꼈다. 이런 것들이 그저 자아라는 고통에서 잠시 동안만 벗어나게 해주는, 마치 잠시 동안만 의식을 마비시키는 것과 같은 미봉책으로 여겨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원했던 해탈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문들의 방법으로는 결코 열반에 들어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사위성에서 부처인 고타마를 직접 대면하면서 싯다르타는 그 동안 자신이 추구해왔던 소망, 즉 스승의 가르침을 매개로 해탈에 이르려는 마음을 접게 된다. 스승으로부터 배우려고 했던 것, 그러나 그들이 도저히 가르쳐 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자아의 의미와 본질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자아를 벗어나 아트만과 브라만을 추구했지만, 그러다가 자기 자신까지도 잃어버렸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그는 결단한다. 앞으로는 자기 자신한테서 배워서 자기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이며, 자신의 비밀을 알아내겠다고. 싯다르타는 자기 내면으로 향하는 도정에 들어선 것이었다.

본질적인 것이 늘 피안에 있다고 여겨왔으나,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는 더 이상 피안이 아닌 차안의 세계에 머물렀다.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지도 않게 되었고, 소박하고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삶을 시작한다. 예전엔 경멸했었던 현상계의 일부가 되었다. 사유만이 아니라 감각도 중요한 것임을 깨닫는다. 더 이상 외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내면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던 탓일까. 강을 건너고 도시에 이르러 그는 카말라라는 고급 창녀를 만나게 되고, 그 이후로 그 동안의 삶과는 정반대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사색과 기다림, 그리고 단식이었던 그가 점점 세속적으로 변해갔다. 쾌락과 탐욕, 나태함의 노예가 되었다. 부에 대한 욕망이 생겼으며 기어이 도박꾼까지 되었다.

어느 날 싯다르타는 황금 새장 속에서 죽은 새를 집어 던지는 꿈을 꾸게 되는데, 그 순간 그는 그가 던진 새와 함께 자기 내부에 있던 선과 그 밖에 가치 있는 것들까지도 송두리째 내던진 기분을 느낀다.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 덕분에 감각만으로 이루어져왔던 그 동안의 삶의 유희가 끝났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는 과감히 그의 장원과 도시를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예전에 건넜던 강가에 이르렀고 자신에 대한 실망과 인생의 부질없음을 놓고 자살을 생각한다. 그 순간 완성을 의미하는 ‘옴’의 소리를 듣게 되었고, 육신을 소멸시킴으로써 안식을 찾으려는 어린애 같은 욕망만이 크게 자라나버린 자신의 모습에 개탄한다. 그는 옛 자아는 죽었고 새로운 자아가 깨어났음을 깨달았다. 기쁨을 느꼈다.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강가를 나머지 인생의 출발점으로 삼게 된다. 거기엔 바주데바라는 뱃사공이 있었다. 예전에 그 강을 건너 도시로 갈 때 도와주었던 뱃사공이었다. 싯다르타는 그와 함께 동고동락을 하게 되며 자연, 특히 강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기 시작한다.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고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그곳에 존재한다. 언제 어느 때나 똑같은 모습이면서도 매 순간마다 새로운 모습을 띤다. 아래를 향해 나아가고, 가라앉고, 깊이를 추구하는 강물처럼 싯다르타는 바주데바와 함께 깨달음과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다.

고타마의 입적이 다가와 전국에서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왔다. 그 행렬 가운데에 카말라가 있었다. 이미 화류계를 떠나 불제자가 되었었던 카말라는 혼자가 아니었다. 싯다르타의 아들과 함께였다. 불행히도 카말라는 강가에서 뱀에 물려 죽게 되고 아들만 남아 싯다르타가 바주데바와 함께 키우게 된다. 아들이 나타나고부터는 싯다르타 자신도 완전히 어린애 같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 인간 때문에 고민하고, 한 인간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빠져 정신을 잃어버려 바보 천치가 된 것이었다. 그러한 맹목적인 사랑이 일종의 번뇌요,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란 사실을, 그것이 윤회이자 슬픔의 원천이자 시커먼 강물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그는 그것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필수 불가결한 것이며 자신의 본질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건방지고 불손한 아들은 돈을 훔쳐 달아난다.

아들로 얻은 상처는 싯다르타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하지만 그 상처 덕에 사람들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전보다 덜 현명하고 덜 오만해졌다. 대신 전보다 더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생각이나 통찰이 아니라 오로지 충동이나 욕망에 이끌리는 사람들의 삶에도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들과 똑같이 느낄 줄 알게 되었다. 아직 상처는 아물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허영심, 탐욕 등 우스꽝스러운 특성들이 이해가 되었고, 그것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그는 그런 것들이 있기에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것들이 있기에 사람들이 무한한 업적을 이루고, 여행을 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엄청난 고통을 겪고, 엄청난 고통을 견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그는 그들 각각의 열정과 행위들에서 생명, 생동감, 불멸의 브라만을 보았다. 드디어 싯다르타는 완성의 경지에 접근하게 된 것이었다. 얼굴에는 깨달음의 평온이 피어났다.

헤르만 헷세 작품중 (교보문고)
헤르만 헷세 작품중 ⓒ교보문고

현인으로 소문난 뱃사공, 싯다르타를 만나보러 고타마의 제자가 되었던 옛 친구 고빈다가 찾아온다. 그는 여전히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순례의 길에 있었다. 기이한 인생을 살아온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나눈다. 고빈다는 그렇게 말하는 싯다르타에게서 평화를 얻어 해탈의 경지에 이른 모습을 보았다. 다음은 싯다르타의 말이다. “나는 이 세상에 대한 혐오를 그치기 위해,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 세상을 내가 소망하고 상상하는 일종의 완벽한 상태와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위해, 그리고 기꺼이 이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해, 죄악을 저지르고 관능적 쾌락과 허영심에 빠졌으며, 가장 수치스러운 절망 상태에 빠져야 했네. …(중략)... 사물들이 환영이건 실재이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네. 내게는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만이 중요하네. 세상을 깔보지 않고,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고,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의 마음, 외경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중요할 뿐일세.”

소설 ‘싯다르타’는 ‘데미안’이나 ‘수레바퀴 밑에’와 마찬가지로 자아를 발견하고 성찰하고 실현하는 한 인간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소설들을 읽는 독자인 우리들은 ‘싯다르타’의 싯다르타가 되기도 하고,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되기도 하며, ‘수레바퀴 밑에’의 한스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저자 헤르만 헤세의 자아의 반영이었다. 소설이란 영역이 100 퍼센트 상상과 허구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창작의 시작은 저자,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자아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인도 선교사 가문에서 태어난 헤세는 일찍이 인도에 대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도가 사상이 핵심적으로 이 책을 이루는 사상이 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인 내가 읽었을 때 이 책은 기독교의 경건주의와 복음주의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헤세는 어떤 특정한 종교를 필두로 하여 진리를 찾을 수 있다거나 자아실현을 완성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헤세는 종교를 가지든 가지지 않든, 자아실현의 완성은 종교를 넘어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 진리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것은 ‘싯다르타’와 ‘데미안’, 그리고 ‘수레바퀴 밑에’를 읽고 나서 내게 비슷한 잔상이 남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 인간의 다른 이름을 ‘진리를 찾는 구도자’라고 언급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헤세는 인간의 본능과 존재의 이유와 가치에 대해 자신의 인생을 매개로 하여 깊게 성찰한 소설가이자 철학자, 그리고 심리학자가 아닐까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재미있게도 나는 제목부터 불교의 이미지가 진득한 이 책 ‘싯다르타’를 읽으며 기독교인이 살아내야 할 바른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싯다르타가 마침내 이른 결론 (내가 그대로 인용한, 싯다르타가 고빈다에게 한 말)에서 특히, 타인을 공감하며 자신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는 그의 말이 핵심이 되겠다. 물론 도가적인 향이 물씬 풍겨 마치 은둔자의 삶을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자의 정체성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면 이 말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은혜 중 은혜는 나 같은 자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깨끗케 하시고 받아 주신 하나님의 손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게 행해야 하는 삶의 자세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헤세의 작품들도 기대가 된다. 새해가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12권 중 벌써 2권을 먹어 버렸다. 데미안은 작년에 읽었으므로 9권밖에 안남은 셈이다. 속도를 조금 늦춰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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