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환] 맘몬의 종됨으로부터의 해방
[이택환] 맘몬의 종됨으로부터의 해방
  • 이택환
  • 승인 2018.01.10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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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환 목사의 설교 - 태초에 하나님이(창 1:1-5)
미켈란젤로, 인간창조
미켈란젤로, 인간창조

새해 첫 번째 주일날 성경 첫 번째 장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교회 개척 11년차임에도 아직껏 주일 예배 때, 창세기 11절을 설교 한 적이 없다는 게 부끄럽습니다. 원래 성경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다양한 저자가 쓴 66권의 책이지요. 하지만 그 66권의 책이 한 권의 성경이 되었다는 것은, 성경엔 분명히 어떤 뚜렷한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오래된 약속(구약)과 새로운 약속(신약)이라는 약속에 관한 책이지요.

성경 신구약 66권은 저마다 첫 문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첫 문장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절입니다. 창세기 저자가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 말씀은 단지 창세기만이 아니라, 성경 66권 전체의 첫 문장이 되었습니다. 원래 첫 문장은 그 책의 방향을 암시합니다. 그렇게 보면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에 대한 약속에 관한 이야기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피조세계가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창조하신 세계라는 점에서, 결국 그 약속은 종말에 가서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우리에게 줍니다.

오늘 창세기 11절로 시작하는 2018년 한 해도 우리 모두에게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기를 소망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런데 그 태초가 언제일까요? 현대 물리학에서는 137억 년 전, 온 우주가 어마어마한 밀도를 가진 한 점, 즉 특이점(singularity)으로 집결된 그 어떤 시점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때가 성경이 말하는 태초인지, 아니면 그 이전에 또 다른 태초가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쨌든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불가능한 그 맨 처음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성경이 말합니다.

그런데 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일찍이 성경 기록의 원칙에 대해 누가가 밝힌 적이 있는데, 그는 말하기를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가 있었다. 또 그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 있었고, 그것을 따라 내가 그 내력을 저술할 때에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하나하나 체계적으로 기록했다고 했습니다(1:1-3). 그런데 창세기 11절은 성경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의 목격자가 없습니다. 오히려 목격자가 있는 게 이상하겠지요.

그러므로 창세기 11절은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선포이고, 창세기를 기록한 사람과 그 말씀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고백’, 즉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 계시의 주체가 하나님인데, 성경말씀에 등장하는 최초의 주어 역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 하나님이라는 히브리 단어 엘로힘은 복수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이 단수 형태의 하나님 이 아니라, 복수 형태의 하나님 엘로힘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를 설명할 길이 없어서 학자들은 장엄의 복수라는 문법용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암시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조하다라는 동사(바라) 역시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창조행위와 관련된 전문용어입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성경의 첫 문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선포는 무엇보다 성경이 독자들에게 복된 소식, 즉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창세기 11절이 태초에 관한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 또는 과학적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라는 오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 말씀은 아주 오래 전부터 유대인들에게 전승되어 왔지만, 최종적으로 그 기록이 완성된 시기는 주전 6세기, 바벨론 포로시절입니다. 1:1은 무엇보다 바벨론 제국의 신학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당시 유대인 포로들이 볼 때, 인간의 미래를 주관하는 존재는 바벨론의 여러 신들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창 1:1 말씀은 그것은 바벨론 신들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시며, 그분만이 당신의 백성들을 감찰하시고, 그들에게 행복을 주시는 창조주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본문은 좌절에 빠진 바벨론 포로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의 생명의 주인이심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 세계관에서 보면 우주만물이 다 인간이 섬겨야 할 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에는 그런 우상 숭배적 세계관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창조의 첫째 날, 빛의 신과 어둠의 신이 거부됩니다. 둘째 날에는 하늘의 신과 바다의 신이 거부됩니다. 셋째 날에는 땅의 신과 채소(농업)의 신이 거부됩니다. 넷째 날에는 태양신과 달신, 별신들이 거부됩니다. 다섯째와 여섯째 날에는 동물들을 신과 연결시키는 행위가 거부됩니다(사자, 황소, 독수리, 뱀 등). 그리고 인간에게도 그 어떤 신성적인 의미가 없습니다. 왕이나 영웅이라도 결코 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지요.

이러한 이야기는 단지 2500년 전 바벨론 시대에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미래를 주관하는 존재를 돈과 인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돈신, 맘몬이 세상을 주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은연중에 이렇게 한탄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일이 잘 안되는가? 돈이 없기 때문이다. 돈으로 형성된 인맥이 없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왜 그렇게 잘 되는가? 돈이 많기 때문이다. 인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돈과 또 그것으로 형성된 인맥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견고한 돈과 인맥을 지녔던 전직 대통령과 그녀의 40년 지기도 한 순간에 갔습니다. 그래도 돈 많은 재벌들은 오래가지 않을까요? 그런데 생각과 달리 십년이상 가는 기업이 많지 않고, 100년 이상 유지되는 기업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고 합니다. 대한상공회의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코스피 상장기업 686개의 평균수명이 약 33년이라고 합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한창 일할 나이에 기업이 죽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매년 50만개의 기업이 탄생하지만 10년 후에는 그중 4%만 살아남는다고 합니다. 세계 500대 기업이라도 그 평균수명은 4~50년 정도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믿기 힘들겠지만, 오늘날에도 창 1:1 말씀은 맘몬, 즉 돈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참된 신이시며, 그분만이 당신의 백성들을 감찰하시고, 그들에게 행복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동일하게 전합니다. 본문은 오늘날 좌절에 빠진 자본주의의 포로가 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창조주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주인이심을 선언합니다. 그러기에 창세기 11절은 2500년 전후 과거 유대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에게 큰 복음이 됩니다.

그 하나님께서 태초에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토후와 보후), 즉 모든 것이 무질서하고 부조리한 상태,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흑암이 깊은 물 위에 드리워있는 상태, 고대 이스라엘에서 깊은 물은 리워야단과 같은 악의 상징이 거처하는 장소였습니다. 다니엘서에서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짐승들이 모두 바다에서 올라옵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친히 바람을 일으키시며,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바람은 곧 루아흐, 하나님의 영을 뜻합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혼돈과 공허와 가득하고, 흑암이 깊은 저 소망 없는 세상 곳곳에서 새로운 창조의 바람을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의 시간대가 우리 시간대와 다르기 때문에, 새 창조의 변화가 너무나도 더디게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아예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변화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나고 보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가령 1987년과 2017년 사이의 30년은 정말 길고도 긴 시간입니다. 그러나 두 시간 사이엔 특정 부분(가령 민주화)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1987년의 눈으로 보면 거의 새 창조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시절을 되돌아볼 수 있는 일정한 나이 대에 들어선 사람들이라면, 한 결 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눈 깜짝할 새였다.”

하나님의 최초의 피조물은 빛이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빛이 있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피조물은 신실하게 응답해야 합니다.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창세기의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과 피조세계를 긍정하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했다(토브)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이 좋다’, ‘선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선한창조 신학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청교도 전통이 강한 한국교회는 세상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할 때가 많습니다. 원죄로 세상이 타락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신약성경 요한복음 316-17절 말씀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세상이 구원받게 하려 하심이라그렇습니다. 창조세계가 타락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선한 창조의 관점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없애버리지 아니하시고, 장차 새롭게 하실 겁니다.

그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칭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첫날이 마무리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우리기 성경을 읽을 때, 종종 헷갈리는 것이 하루가 아침에 해 뜰 때 시작되는지, 아니면 저녁에 해 질 때 시작되는지 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루는 저녁때 해 진후 시작해서 다음 날 해 질 때까지였습니다. 페니키아인과 아테네인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빌론 사람들은 해 뜰 때부터 다음 날 해 뜰 때까지로 하루를 계산했고, 이집트인들과 로마인들은 자정부터 자정까지, 오늘날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하루를 계산했습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창세기 1장을 무슨 역사적 사실이나 과학적 진리를 논하는 책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성경대로 해가 떨어진 후에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루를 지금처럼 일로 시작하면 안 되고, 오히려 충분히 쉬고, 먹고, 자고 난 후에 그렇게 하루의 반나절을 보낸 후, 비로소 일하러 가는 게 맞습니다. 이상한가요? 이는 즉, 성경을 성경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보다 우리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신실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약속의 책입니다.

17, 오늘은 우리 주님의 수세주일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들과 온 피조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세례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이신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할 차례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오늘 말씀을 통해 바벨론 우상들을 떠나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도 이 시대를 지배하는 온갖 우상들, 특히 맘몬에게서 떠나, 우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부르시는 그분의 초청에 신실하게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글쓴이 이택환 목사는 그소망교회 담임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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