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가 없어지더라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천지가 없어지더라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 임주형
  • 승인 2018.01.07 07: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태복음의 자증적 권위 주장에 대한 고찰
리처드 보컴, 예수와 그 목격자들 목격자들의 증언인 복음서, 새물결플러스, 2015년
리처드 보컴, 예수와 그 목격자들 목격자들의 증언인 복음서, 새물결플러스, 2015년

(1) 마태복음은 참으로 흥미로운 책이다. 신약성경의 첫번째 책으로 배열됨과 함께 그 안에 담긴 유명한 가르침들 때문에 교회역사에서 특별히 사랑받아온 복음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목할 만하게도 리챠드 보캄(Richard Bauckham) 은 그의 저서 [예수와 그 목격자들](새물결플러스, 2015년)에서 파피아스의 증언과 당대 그리스 전기의 문학적 구조를 복음서와 비교하면서, 다른 세 복음서(마가, 누가, 요한)에 대해서는 목격자의 증언이 그 기초에 놓여 있음을 주장한데 비해 마태복음의 저자 문제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하였다. 흔히 마가복음 2:14이하에 등장하는 세리 레위를 부르는 기사가 마태복음 9:9이하에 등장하는 병행 기사에서 레위의 이름이 마태로 바뀐 것으로 인해 레위와 마태가 동일인물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지만, 보캄은 이 둘이 전혀 별개의 인물일 것이라고 보는 시각을 택한다. 먼저 마가복음 3:13 이하의 열두 제자 명단에는 레위가 등장하지 않고 마태의 이름만이 나타나며, 마가복음의 명단에는 마태가 세리였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어떠한 단서조차 없다.(누가복음의 명단도 마찬가지이다.)

(2) 둘째, 보캄은 제 2성전기의 인명에 대한 연구를 병행하면서 마태와 레위가 동일인이라면, 이 사례는 팔레스타인 유대인으로서 흔한 셈어 이름을 동시에 두 개나 가졌던 유례를 찾기 힘든 현상이 될 거라고 논평한다. 실제 세리인 레위를 부르는 마가복음의 기사(2:14이하)와 세리였던 마태를 부르는 마태복음의 기사(9:9이하)는 사실상 동일한 내용이지만 아주 작은 차이가 하나 더 존재한다. 마가복음의 경우 예수께서 '그의 집(레위의 집)'에서 식사하셨음을 이야기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그냥 ''에서 식사하셨다고 묘사하고 있다.(마태복음 원문에는 소유격이 없다. 개역성경에는 '마태의 집'이라고 번역되었지만, ESV와 루터 성경 역시 마태복음의 기사의 ''에는 소유격이 존재하지 않는다.) 9:9의 세리인 마태를 부르는 기사와 9:10의 예수께서 세리의 집에서 식사하신 기사를 역사적으로 연결되는 기사로 보지 않아도 되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캄은 이런 변형의 이유를 분석하기를 이 복음서의 저자가 마태가 세리였음은 알았지만, 그와 관련된 이 복음서 안에서 마태가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를 서술하고 싶었음에도 그 이야기를 알지 못해 결국 마가복음의 이야기를 가져다 쓰면서 레위를 마태로 바꾸어놓았다고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논평한다.(실제 마태복음 10장의 열두 제자 명단은 마가복음과 달리 마태를 세리로 명시하고 있다. 이것은 누가복음의 명단과 비교해보았을 때도 독특한 현상이다.) 즉 이 이야기가 아주 간결하고 보편성을 띄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제자로 부르신 어떤 세리에게도 들어맞는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보캄의 결론은 마태복음 저자가 이 복음서와 사도 마태를 결합시키려 했지만, 이 마태복음의 저자는 사도 마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마태복음의 저자가 사도 마태라면, 레위가 제자로 부름 받은 일을 기록한 마가복음의 이야기를 가져다 쓸 필요 없이 자신이 부름 받은 일을 서술할 수 있었을 것이란 말이다.)

 

(3) 보캄의 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만약 그렇다면(마태복음의 저자가 사도도 아니요, 스스로 목격자로서의 정체성도 가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마태복음의 정경성은 일찍부터 논의의 여지 없이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우리는 마태복음의 저자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복음서의 저자는 마태에 대해 다른 복음서에서는 전혀 기울이지 않는 관심을 나타낸다. ,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마태가 본래 세리였음을 명시하는 것이다.(9:9; 10:3) 주지하다시피 세리의 칭호는 전혀 명예스러운 것이 아니다.(9:1011, 18:17; 21:32) 즉 이 복음서의 저자는 그가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알려지지 않았을 마태의 세리로서의 과거를 폭로하고 있다. 나아가 이 저자는 자신을 '사도나 목격자'로서의 정체성이 아닌 성경을 필사하고 가르치던 '서기관'으로의 정체성을 가진 자로 드러내는 것 같다. 신약성경에 '서기관'은 대체로 예수의 대적들로 드러나거나 다소 중립적인 위치를 가진 자들로 종종 등장하지만 예수의 추종자로서 묘사되는 본문은 오직 마태복음 뿐이다. 다른 공관복음서의 병행구절에는 존재하지 않는 '서기관'이라는 말이 마 23:34의 예수의 말씀에 등장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그리고 마 13:52에서는 예수께서 그 유명한 천국비유를 마치신 후에 의미심장한 결미를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4) 그렇다면 마태복음서의 저자는 자신이 어떤 류의 서기관이라고 생각했을까? 그에 대한 암시가 마태복음에 등장할까?

마태복음을 다른 공관복음서들과 비교하면 마가복음과 가장 큰 유사성이 존재한다. 프란스는 마태복음의 대략 45%가 마가복음에서 유사한 형태가 발견되는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고 순서도 거의 동일할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사용된 단어 자체가 완전히 똑같다고 분석하였다. 마태는 구약을 인용하거나 암시할 때 칠십인역 뿐 아니라 히브리어 본문을 자유롭게 그리고 독립적으로 사용하는데 마가로부터 공식적인 인용을 취하고 있는 곳은 이에 대한 예외라고 한다.(대체로 칠십인역 사용) 단지 대략 35%만이 마태의 독특한 공헌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점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마태복음의 경우 내러티브 사이에 "예수께서 ...을 마치시자"라는 말로 끝나는 5개의 주제별로 잘 정리된 광대한 예수님의 어록이 나온다는 사실이다.(5-7장의 산상설교, 10장의 제자파송강화, 13장의 천국비유, 18장의 제자 공동체에 관한 강화, 24-25장의 성전파괴와 종말론 강화) , 마태복음은 조금 거칠게 표현하면 마가복음을 베이스로 서론부와 결말부가 확장된 채 이 예수의 어록 묶음이 추가된 책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물론 마태저자의 신학적 의도에 따라 약간의 변형이 추가되어 있다.) 그러면 이 어록의 묶음을 통해 마태저자의 서기관적 정체성을 엿볼수 있는 부분이 있을까?

 

(5) 아래의 사진은 2010년 분석해본 마태복음의 구조이다. 보다시피 마태복음은 15:1-28의 예수께서 이스라엘 장로들의 유전을 거부하시고, 가나안(!) 여인의 청을 들어주시는 이야기를 중심축(N)으로 하여 전체가 광대한 인클루지오의 구조로 짜여져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L)과 칠병이어(?)의 기적(L')이 짝을 이루고 있으며 9:27이하에서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본격화 하시며 두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F)과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시기 직전 여리고에서 두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F')이 역시 짝을 이루고 있다.(마태복음의 이런 거대 인클루지오 구조는 다른 공관복음서와 비교할 때도 특히 명확하게 나타난다.) 다만 이 균형을 깨는 가르침이 마태복음 13장의 천국비유 가르침인데, 구약의 일반적인 기대와는 다르게 시작된 도래하기 시작한 천국의 의외성이라는 신학적인 의미와 무관하지 않으리라.(이 천국 비유는 예수께서 경고하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즉 가르침 16:5-12)과 병행을 이룬다.)

어쨌든 여기서 특히 주목해 보고 싶은 것은 I (12:1-21)I' (16:21-17:21)의 병행이다. 먼저 I' (16:21-17:21)를 살펴보면 이 장면은 복음서에서 보기 드문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기록한 변화산 사건 장면이다.("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17:5)) 그리고 I (12:1-21) 단락에는 이와 유사한 내용이 등장하는데 의미심장하게도 이사야서 42:1 이하의 종의 노래 단락이다. "보라 내가 택한 종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12:18) 예수를 지칭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이 두 병행 단락에 등장하는데 의미심장하게도 한 부분은 마가복음에 등장하는(파피아스의 말에 의하면 베드로의 목격자 증언을 기초로 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다른 짝을 이루는 부분은 이미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권위가 인정된 구약성경 이사야의 하나님의 말씀이다.('율법과 선지자' 5:17) , 마태복음의 저자는 당대 유대인들에게 신성불가침의 권위로 인정된 구약성경의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와 그의 3명의 제자들만이 목격했다고 알려진 변화산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동일권위 선상에 올려놓는 것이다.

(6) 나아가 마태복음의 예수 어록을 살펴보면 더욱 흥미로운 사실이 나타난다. 마가복음과 가장 두드러진 차이인 마태복음의 예수 어록은 5-7장의 산상설교(D)에서 시작하여 23-25장의 성전파괴와 종말론 강화(D')로 종결된다. 그런데 이 5-7장과 23-25장 역시 마태복음 전체의 문학적 구조에서 인클루지오의 짝을 담당한다. 예수의 어록 묶음의 시작부분인 산상설교가 5장의 팔복으로 시작한다면 예수의 어록 묶음을 종결하는 성전파괴와 종말론 강화는 23장의 7개의 화의 선언으로 시작된다. 이 두 단락에는 거짓선지자들에 대한 경고가 담겨 있고(7:15-20; 23:23-27) 예수 자신이 재판관으로 오게 되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엄중한 경고로 마무리된다.(7:21-27; 25:31-46)

 

갈릴리 어부들

그런데 이 예수 어록의 시작과 끝 부분을 담당하는 이 두 괄호와 같은 부분에 의미심장한 병행이 한 가지 더 존재한다. 5:17-18"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확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24:34,3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의 병행이다.(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이 어구의 유사성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 마태저자는 예수의 어록의 시작부분을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성경의 신적 권위의 인정으로 시작하면서 예수의 어록을 닫는 부분에서 예수의 말씀을 구약성경의 신적 권위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 말씀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참고로 마태복음의 이 율법과 선지자’, 혹은 율법은 당연히 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하는 말이 틀림없을 것이다. - 5:17율법과 선지자18절에서 단순히 율법으로 지칭된다. - 24:15에서 성문서의 마지막 책 가운데 한권인 다니엘서 역시도 예수의 입을 통해 선지자로서의 권위가 부여되고, 23:35의 예수의 말씀인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역시 이것이 구약성경의 첫번째 책인 창세기의 첫번째 순교자 아벨과 마지막 책, 성문서인 역대기의 선지자로서의 마지막 순교자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의미한다고 볼 때만 의미가 통한다. 물론 바라갸의 아들 스가랴는 12선지서의 한 화자의 이름이지만, 일종의 유대주석 방법을 통해 구약정경 전체에 선지자의 권위를 부여하는 당대 통용되는 방식으로 보인다. , 이런 방식으로 서기관의 정체성을 지닌 마태저자는 구약전체 정경 목록에 대한 암시를 우리에게 남겨준다.)

실제로 예수의 산상설교의 말씀은 구약의 선지서와 비교해 볼 때 놀라운 권위가 부여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야웨께서 말씀하시되"라는 신언공식을 사용한 반면 예수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자신의 말씀에 스스로 권위를 부여한다. 심지어 위에서 살펴본 23:34 역시(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중에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구약성경에서 자신의 종들과 선지자들을 보내시는 야웨의 말씀과 동일한 구문이다.(7:25,26; 대하 36:15,16 ) , 마태복음에서 구약성경, 변화산(혹은 예수의 세례)에서의 하나님의 말씀, 예수의 말씀은 동일한 신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즉 마태복음에서 이미 요한복음과 방불한 고기독론의 암시를 확인할 수 있다.)

 

갈릴리 호수 가까운 요단 물가의 목자

(7) 이쯤에서 고대의 책들은 단지 눈으로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청중들 앞에 '낭독'되기 위해 쓰여 졌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신명기를 읽을 때 누가 그 책을 읽더라도 청중은 모압 평야의 현장으로 초청되어 약속의 땅을 앞둔 출애굽 이후의 세대에게 설교하는 모세의 음성을 듣게 된다. , 마태복음을 기록한 서기관은 자신의 이 책이 낭독될 때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신적 존재이신 예수의 음성이, 또 마가복음을 기초로 한 예수의 행적이 재현되는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 요한이 '증인'의 정체성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했다면 마태 저자는 '예수의 말씀'을 성경으로서 보존하려는 '서기관'의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했을 뿐이다. 이 둘은 모두 예수의 신적 정체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고 자신의 책을 통해 예수의 역사가 청중들 앞에 재현되기를 바란 것이다.

 

(8) 유세비우스의 인용에 의하면 파피아스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기원에 대해 다루며 다음과 같은 언급을 남겼다.

"베드로는 그의 가르침들을 일화(chreiai) 형태로 제시하곤 했지만, 주의 로기아(logia)를 질서 있게 배열한 것을(syntaxin) 제시하려는 뜻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가는 그(베드로?)가 기억을 되살려 이야기한 그대로 몇몇 개별적 사항을 기록했으며, 이 때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들었던 것을 생략하거나 어떤 것을 왜곡하는데는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파피아스의 말대로 마가복음이 베드로의 사도와 목격자로서의 권위에 기반했던 것이 확실하다면(보캄은 마가복음의 예수와 제자들을 가리키는 3인칭 주어(그들)의 문장의 어색함을 지적하며 이것을 우리를 의미하는 1인칭으로 변환했을 때 더 자연스러움을 들어 파피아스의 주장의 설득력을 변호하였다.) 마태저자 자신이 사도나 목격자가 아니더라도 그가 자신의 복음서의 베이스를 마가복음에서 그대로 가져오면서 자신의 글에 신적 권위를 주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해가 된다. 어쩌면 마태저자가 이 복음서를 기록, 혹은 편집했을 당시에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사도권을 기반하여 이미 예수를 믿는 공동체 가운데 권위문서로서 널리 인정되고 있었고 마태 저자는 거기에 자신의 신학적인 관심과 더불어 추가적 보충을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아니 그럴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하겠다. 위에 지적한 마태복음 24: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막 13:31에서 동일한 병행구절을 가지며 위에 언급한 마태복음의 권위의 원천 역시 마가복음에 역으로 적용된다. 로버트 슈타인 역시 마가복음이 이미 일찍이 신성한 권위문서로 인정받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마태저자가 서기관으로서 성경을 저술하고 있음을 의식하면서, 마가복음의 최종형태와 구조를 최대한 존중한 상태에서 예수의 어록을 추가하고 자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신학을 통해 어느 정도의 변형을 시도할 수 있었는지도 설명이 된다. 이것은 구약에서 동일한 기사들이(예컨대 히스기야에 대한 왕하 18, 대하 32, 이사야 36장의 전승) 기본 형태는 동일하지만 신학적 관심사에 의해 조금씩의 차이를 보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갈릴리 지방의 들녁의 농부들

마태 저자는 기존의 거룩한 전승에 대한 이러한 변형을 가한 자료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역시 권위를 가지고 있는 다른 성경을 저술했던 고대의 방식을 충분히 알았을 가능성이 크다. 누가복음의 저자 역시도 21:33의 동일한 병행구절(24:35; 13:31)을 통해 자신의 작품이 거룩한 글의 권위를 가짐을 처음부터 의식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마태복음에 비해 누가복음이 마가복음을 베이스로 하되 상당한 구조적인 변형을 시도한 것 역시 저자의 정체성 차이를 보여주는 예시일 수 있다.(마태의 서기관으로서, 누가는 역사가로서) , 누가복음의 저자가 자신의 복음서 1:3에서 자신의 글이 역사성에 충실히 기반한 것임을 먼저 소개하는 것 역시 자신이 이 작품을 쓰며 앞선 거룩한 저술을 상당히 변형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일 수 있다.)

또한 파피아스의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하여 마태는 그 로기아를 질서 있게 배열하여(synetaxato) 히브리어로(hebraidi dialect) 적었으나, 각 사람이 능력껏 최선을 다해 그것을 해석(혹은 번역)했습니다.(유세비우스, [교회사] 3.39.14-16)

어쩌면 사도 마태가 히브리어로 배열한 주의 로기아라는 것은 마태복음에 나타나 있는 것과 유사하게 잘 정리된 예수의 어록 묶음은 아닐까?(혹은 Q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리고 마태복음 저자는 (그가 사도 마태 자신이 아니라면) 그의 뜻을 어느 정도 계승한 자로서 마가복음 베이스에 마태가 남긴 그 로기아를 추가적으로 잘 정리하여(헬라어로 번역하여) 이 복음서를 남긴 건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마태 저자는 예수의 말씀에 이미 하나님의 말씀과 구약성경과 동일한 신적 권위를 부여했고,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이들은 이렇게 예수의 말씀이 그들에게 신성불가침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졌던 구약성경과 동일한 신적 지위를 얻게 된 이유에 합당한 대답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또한 예수의 말씀이 어떤 형태로 전승되었다 할지라도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의 공통 자료들에서 발견되는 정도의 차이 이상으로 그 전승이 과도하게 변형되지 않게끔 공동체의 통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말씀은 구약성경과 동일한 신적 권위를 일찍부터 확인받았기 때문이다.

마태저자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으로 정의하면서 자신이 새것(예수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나타난 성취의 새 시대)과 옛것(율법과 선지자가 펼쳐 보여주는 하나님의 뜻)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13:52)으로 이 복음서를 기록하였던 것이다.

 

글쓴이 임주형 목사는, 20대초부터 성경을 사랑해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온 젊은 목사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