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야 할 것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
사랑해야 할 것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
  • 이진호
  • 승인 2018.01.07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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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 Filippo Lippi , 성 어거스틴의 비전
Fra Filippo Lippi, 성 어거스틴의 비전(1483)

삶이 비루하다고 느꼈다. 아무리 봐도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삶의 여정 속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그다지 없다고 생각됐다. 순수하기에 그리고 이상주의자이기에 아름다운 삶과 세상을 꿈꿨지만 닥쳐온 건 냉혹한 현실과 전쟁 같은 두려움뿐이었다. 약육강식의 사회가 싫던 예민하고 민감한 아이, 사랑으로 촉발된 저항과 반사회성으로 치열하게 살지만 내게 돌아오는 건 안개와도 같은 앞날이었다. 과연 난 살아갈 수 있을까? 며 깨닫는 것들이 많지만 거기에까지 도달하기도 어렵고 겁나는 사람으로, 유약한 존재자로 나는 과연 걸을 수 있을까? 시간이라는 폭력 앞에, 상황이라는 압박 속에, 시선이라는 권력 앞에 삶이라는 신비는 낙관보다 비관에 가까운 암흑 덩어리라는 생각이 매일 밤 들었던 고민이었다.

어려웠기에, 아팠기에, 고통스러웠기에, 더 이상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언제나 죽음을 생각했다. 어둠의 망령이 내 머릿속을 휘저었고, 수많은 감각적 시뮬레이션이 나를 어둠의 늪으로 끌어갔다. 회한과 눈물, 분노와 고통, 두려움과 좌절이 내 어깨를 토닥이던 친구들이었다. 잠깐의 행복을 맛보더라도 그 양면에 드리운 불행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여태껏 삶을 유지한 것은 신의 은총인 것도 있지만 내가 겁쟁이였던 것도 한몫했다. 이 더러운 삶을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는 얄미운 마음이 생을 이끌었다. 아마 크나큰 불행이라 생각되는 삶에 언젠가 필 꽃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나는 이게 절대 내 마음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신의 손길이라고 볼 뿐이었다. 그나마 살게 만드는 건, 신의 사랑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하루살이와 같은 생활로 연명하면서 어디에 인간의 존엄이 있는지 회의가 들었다. 행복해지자고 살아가는 삶이건만, 삶 자체가 크나큰 축복이고,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는 신의 은총이건만 정작 현실은 여기저기에 가치를 평가당하고, 쓸모없는 인간이, 능력 없는 사람이,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버렸다. 돈이라는 것으로 삶을 재단하는 척박한 세상 속에서 나는 불필요하고 무능한 사람이었다. 분명 많은 사람의 기대를 받고, 좋은 조건도 받고, 아름다운 미래를 보장받고 꿈꿨던 나였건만 내가 가진 문제의식과 나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당찬 고백과 선언 이후에 삶은 풍비박산 나버렸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겠다고 선언하며 기존의 사회와 교회에서 나온 내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산산이 부서진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거대한 세게 안에서 좌절했고, 무너졌다. 파스칼이 말했던 인간은 흔들리는 갈대다라는 말을 곱씹으며, 그리고 세계 속에 내던져 구성되었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모르는 괴리 속에 사랑하지 못하는 유약한 사람, 약하고 고민이 많고, 회의를 품고 겁을 먹어 한 발자국 걷기도 힘들었던 아이였다. 나 자신을 이기지 못해 약을 의지하고, 수면제를 복용하며, 술을 먹어야만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비루한 삶을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내 의지와 죽고 싶다는 내 갈망은 내가 겪은 수많은 모순 속에서 능지처참하는 형벌로 내 안에 기생하고 있었다.

이러한 마음들이 서로 간의 영역 다툼을 할 때, 아무 이유 없이 초월적 가치가 필요하다는 직관이 생겼다. 종교의 본질이자 인간의 신비,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형이상학 개념이 지금 나의 삶 속에서 요구되고 있음을 느꼈다. ‘사랑’, ‘정의’, ‘희망’, ‘소망’, ‘행복’, ‘죽음’, ‘이상’, ‘시간등등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제일 맘에 와 닿은 것이 기독교가 지닌 초월적 가치이자 신화 속에 잠재된 의미의 향연이었고, 그것들이 나를 살게 했다. 여하튼 나는 이 초월적 가치가 어떻게 현실 속에 작용하고, 인간 속에서 구현되는지, 그리고 내가 이 가치를 구현하며, 삶을 진정성 있게,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그렇게 2~3년을 살았다. 기독교는 초월적 가치를 제일 잘 드러내고, 보편과 특수, 그리고 절대를 잘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기독교를 믿고 있는 많은 사람은 내가 기대하고 예상했던 그 모든 범주에서 벗어난 죄악을 행했다. 끊임없이 사랑하려고 노력했고, 기독교의 본질과 가치를 알려고 추구하며, 이를 관계 속에서 나타내려 살았건만 정작 돌아온 건 손가락질의 슬픔이었다. 그들을 원망하지 않고 용서하고 싶지만 정작 용납할 수 없었던 건 내가 느낀 부조리와 불합리였다. ‘왜 이리 인생은 처참하고 x같은가?’ ‘왜 때라는 우연성이 날 좌우하는가?’라는 생각이 날 괴롭혔다. 근데 그 상황 속에서 이상하게 신앙에 대한 것은 경계선의 믿음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이 믿음이 너무나도 절망스러웠다. 나를 저주하는 구원인가? 라는 생각이 존재를 휘감았고, 내 기능이 이런 것인가? 라는 고민만 들 뿐이었다.

사랑에 고파서 사랑을 깊이 고찰하지만, 여전히 유아적인 아이. 그게 바로 나였다. 사랑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너무나도 깊이 사랑을 원하던 아이. 더 많이 사랑 하고 싶고, 사랑으로 삶을 아름답게 만들고자 했던 아이. 그것이 바로 나였지만 사랑에 대해 깊이 알면 알수록, 그리고 깨달을수록 나는 절망에 처박혔다. 원망과 감사가 섞인 신의 사랑이 나를 살게 했지만 동시에 터져 나오는 현실의 암울함과 내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와 고통, 아픔이 눈물로 앞을 가렸다. 나는 성서에서 나온 하나님의 사랑, 즉 자기를 내어주면서까지 사랑하고, 그 사랑 속에 놀라운 승리와 행복이 터져 나오는 그것을 믿었지만, 삶이라는 경계 속에서 그 경험과 믿음은 힘을 잃어버릴 때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나마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있었기에 작은 발걸음의 여정들이 나를 더 깊은 곳으로 이끌게 만들었다. 고달픈 생애 속에서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는 사라지고 사랑이라는 놀라운 저 너머의 신비가 나를 끌고 가고 있었다.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매혹된 듯 사랑하고 있었다. 조금씩 나를 알아가고, 내 삶을 사랑하고, 나의 과거를 용납하고 받아들이며, 생각과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신적 사건이 나를 갱신하고 삶을 사랑하게 만드는 선순환 속으로 이끈 것이다. 그렇다. 나는 조금씩 변혁을 맛보고 있었다. 부족하고 여전히 연약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복음의 사랑이 나를 변하게 만들고 있었다. 여전히 실망하고, 무너지고, 회의에 빠져도 사랑이라는 초월은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을 만났다. 사랑으로 깊어지는 그 여정 속에 만난 그 사람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이전의 삶에서 배신당하고 상처받은, 사랑이 허무라고 생각된 그것들을 모두 다 안으리라는 기대와 소망을 가져다주는 사람을 만났다. 신의 사랑을 우연으로 만난 것처럼 그 사람도 우연으로 만났고, 벼락처럼 사랑이 찾아왔다. 나는 매번 그랬던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사랑할 것을, 배신당할지라도 사랑에 투신할 것을, 내가 이전까지 사랑하면서 갱신되었고, 관계를 넘어 지시되는 사랑의 힘이 있음을 느꼈기에 이번에도 사랑으로 변하는 나의 삶을 느끼는, 그리고 사랑하며 새로운 세계를 열자는 마음으로 손을 잡았다.

나는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가 필요하다.’ 본연의 사랑으로써 사랑하겠다고 다짐했고, 판단을 넘어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놀라운 힘으로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사랑을 통해서 나 자신을 사랑하고 타자를 사랑하며 나아가 삶과 세계 그리고 그것의 총화로서 신을 사랑하는 사랑의 능력을 원했다. 존재 자체에 대한 사랑을 추구했고, 그렇게 사랑하는 기술과 능력을 함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신은 내 유아론적인 모습을 알았다. 그 사람은 내게 구원자였다. 내가 그동안 상처받고 아팠던 그 사랑에 대해서 나와 유사하면서 삶으로 나타내려는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내게 왔다. 나의 연약한 모습, 내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려고 하는 모습. 배려하고 존중하며 내 삶의 주인공이 되게끔 만들어주는 희생적인 사랑이 구원을 베풀었다.

내 삶 속에서 사랑을 추구했다고 생각했지만 난 언제나 절망 속에 있었다. 사랑으로 변하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엄청난 회의와 유한하고 불완전한 사랑이 가져다주는 이면의 어둠은 지옥과 같은 무가치한 사람으로,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신의 움직임은 암흑 속에 있는 진짜 너무나도 유약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했고, 그 사랑을 기반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사랑하는 구원자를 만났다. 신의 완전한 사랑을 기반으로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서로의 구원자가 되고, 구원을 이루는 것임을 깨달았다.

신이 존재인 기독교 교리에서 존재에의 참여란 다름 아닌 신에게로 돌아옴곧 구원이라고 말했던 김용규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의 존재와 사랑 받는 이의 존재를 하나로 묶는 존재이다. 사랑을 통해서 나는 의 전재에 비로소 참여하게 되고, 이 존재적 참여가 의 존재도 역시 사랑하는 것이 되게 한다. 그대로 부름으로써 그대가 되는 우리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렇다. 사랑은 우리를 만든다. 사랑함으로써 나와 타자를, 세계와 신을 알아간다는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의 말이 떠오른다. 사랑은 인간의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신비를 지시함을, 비루함과 아름다움 등등의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놀라운 은혜를 지니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사랑해야 할 것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 어거스틴이 말한 상기이상의 현전하는 지금을 사랑해야 한다. 지금을 사랑할 때 모든 생애의 역사와 이상의 가치를 내주하게 만든다. 희생하는 사랑. 그 모든 판단을 멈추고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랑을 배워야 한다. 그 안에서 사랑으로 갱신되고 삶이 더욱 행복해지는 행복의 시간을 느껴야한다. 아직 나는 멀고 먼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희망이 생긴다. 사랑이라는 희망. 희망이라는 사랑. 그리고 이를 이끌어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여전히 나는 무섭고 두렵지만 내겐 신의 선물이 있다. 그 사랑과 함께 사랑을 배워나갈 수 있는 것은 신이 지금주신 축복이자 은혜다. 무의미에 의미를, 행복으로 촉발되는 윤리를, 존재 자체에서 발화하는 희망을, 영원과 지금이라는 신비의 시간을, 생과 죽음을 넘어서는 초월을 나는 그 사람과 사랑으로 배울 거다. 물론 받는 사랑이 아닌 내가 먼저 내어주고, 그로 인해 생명을 나누는 그 사랑. 나는 오늘도 사랑을 배운다.

 

글쓴이 이진호는, 일상과 문화에 관심이 많으며, 일상 가운데 교회가 되고 싶고 교회로 살고 싶은 강한 열망으로 살아가는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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