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 서진
  • 승인 2018.01.06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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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죄와 벌(Along With the Gods: The Two Worlds)
ⓒ영화 '신과함께'

신과 함께: 죄와 벌(Along With the Gods: The Two Worlds)라는 영화가 천만관객을 돌파했다고 한다. 나도 어제 아내와 그 천만 대열에 끼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생각이 많아졌다.

 

1. 죄를 다룬 영화

그 영화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끌고 가는 핵심에는 가 있다. 환생이라는 주제가 기독교 안에서 자라온 내게는 약간 낯설지만.. 그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포인트는 죄와 용서이다.

"살아서도 못한 것을 죽어서 하려고 하느냐.."

"모든 사람은 이승에서 사는 동안 죄를 짓는다, 그 중에 용기 있는 일부만이 용서를 구하고, 그 중에 일부만이 진정한 용서를 받는다."

"이승에서 용서받은 죄에 대해서는 저승에서는 그 값을 묻지 않는다."

이 명대사들을 통해 그 영화를 보며,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원한을 쌓는 것에 대해서 7명의 심판관들이 엄중히 심판하는 것을 보며, 사람이 소중하구나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면 미처 몰랐다가 깨닫게 되는 죄에 대해서 나 역시 죄인임을 새삼 인정하게 됐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픈 마음을 갖게 했다. 감동적이고, 어지간한 전도 집회 설교보다 낫다 싶었다. 나는 이런 설교를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레 내 자신이 돌아봐지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용기 내어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을 나올때 주변의 사람들도 눈물을 닦는 것을 보았다. 그 영화를 통해서 완악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죄인됨의 동의와 반성하는 새 마음을 불러일으킨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영화 신과함께
ⓒ영화 '신과함께'

2. 영화의 교훈은 맞지만, 영화는 틀렸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처럼 정말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다. 자신의 죄인됨을 돌아보고, 나 때문에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 용기 내어 용서를 구해야 한다. 정말 사람이니까, 사람이니까 그래야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틀렸다. 자연 현상을 보며 이론을 만들었지만, 실제로 작동하는 원리를 왜곡했다고 본다. 그리고 더 크게 염려하는 것은, 나는 이 영화가 사람들을 다시 절망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죄를 언급하며.. 죄책감으로 이 모든 이야기를 끌고 가기 때문이다. 도교, 불교적인 세계관이 섞여있는 이 영화의 배경이 잘 진단이 되질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냥 사람들의 공감대를 끌어내고 감동을 준 픽션으로서의 웹툰일 뿐, 어떤 심오한 종교의 체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3. 죄는 어떻게 해결되는가?

영화를 보고나서 내가 주목한 핵심은, 죄와 용서의 방법이다. 죄는 분명 우리가 마주해야 할 대상이다. 나의 죄 됨을 인식하지 못하면 사람은 더 큰 죄를 흡수하며 괴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자고 영화에서처럼 원귀를 찾아 용서를 구할 수도, 원귀를 우리가 어떻게 소멸할지 알지도 못한다. 아마 현실적으로는 그저 심판이 두려워하며, 혹은 나에게 악을 행한 자들이 그 심판을 받을 것을 기대하고 자위하며 용기를 내볼까를 망설일 것이다. 성경에서도 죄를 중요하게 다룬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다.(6:23) 그래서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삶을 살며(롬 5:17),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자로 산다.(롬 8:15) 사실, 좀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성경이 말하는 죄는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한다. 교리적인 정의로.. 죄를 과녁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과 바꾸어서.. 불의로 진노를 쌓은 것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의 시작이고, 만물의 타락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람에게도 그 존재됨에 합당하게 대하기를 잃어버리고, 살인하고 폭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죄를 해결하기 위해.. 구약 시대에 복잡한 제사법을 만들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다. 아니 사실은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에서 죄 없는 자에게 이 세상 모든 죄를 담당시키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가 용서 받았다고 하고, 주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너희도 그리하라(골 3:13) 말한다. 성경 속에도 죄가 있고, 죄책감도 있고, 그에 따른 심판도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죄의 해결은 영화처럼 죄 값을 받아 형벌에 이르거나, 이승의 용서에 기인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 입은 죄사함에 합당한 삶, 회복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4. 기독교에서 오해되는 용서

물론, 이런 기독교의 용서의 개념을 너무 표면적으로 이해하여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았으니, 사람들에게는 용서를 구하지 않는 태도로 나타나기도 했다. (영화 밀양에서 제기하는 용서의 문제, 누가 누구를 용서하나? 용서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용서를 구할 때 구원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먼저 이 죄를 사할 길을 열어주셨다. 그리고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요구하셨고, 기다리신다. 이런 하나님을 생각하다보면, 내 삶이 여전히 죄가 많아 부끄러워지고, 그 죄를 담당하신 주님께 감사가 나온다. 그리고 잘 살고 싶어진다. 사랑 받고 싶던 마음에서 사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작은 변화가 일어난다.

 

ⓒ영화 '신과함께'
ⓒ영화 '신과함께'

5. 그리고 죄와 고난에 대한 오해

성경에서.. 죄에 대한 오해를 가진 부분이 나온다. 바로 하나님 앞에 온전하다고 평가받고 오히려 고난을 당한 욥에 대한 친구의 고발이 그 일부이다. 욥기 4:6에서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고발한다.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이 고발 앞에 내가 죄가 없다, 나는 정직하다답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자신의 모습을 모르는 고집불통 바보이든지, 예수님뿐이지 않을까 싶다. 엘리바스는 여기서 기인한 죄책감을 하나님의 주권에 연결해서 욥의 과거의 삶을 언급하며, 욥을 박살내버리려 한다.

누가 자네에게 말을 걸면 자넨 짜증이 나겠지? 그렇지만 누가 말하지 않고 물러서 있겠는가전에 네가 여러 사람들을 훈계하고, 그 과정에서 늘어진 자를 강하게, 넘어지는 자를 넘어지지 않게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했었는데..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하고 놀라는구나?" (욥 4:2)-5"(우리말성경)

자신이 말하는 것을 짜증스럽게 받을 거라고 예상하면서도 참지 못하고 말한다. 누구라도 말할 수밖에 없다고 정의롭게 나서서는.. 네가 과거에 했던 말들과 행동대로 네가 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죄책감을 증폭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약간 애매하게 6절에서는,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고, 네 소망이 온전한 길이 아니었느냐"고 묻기까지 한다. 욥이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했던 것,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살았던 것(2장에서 아내가 지금도 온전함을 지키겠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할 정도로 온전하게 살았던)이 지금 욥이 견딜 수 있는 무엇인가로 나타나야 할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엘리바스는 죄는 반드시 보응 받고, 하나님이 그 죄를 심판하신다는 점을 강조하며, 인간이 의롭다고 해도 결국 하나님이 더 의로우시니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삶을 겸허히 받아들이라고 한다. 이런 엘리바스가 기독교 내에는 참 많다. 하나님을 안다는 자들이 하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이것은 분명 오해이다.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6. 복음이란 누구를 위한 무엇인가?

엘리바스가 하는 말들 하나하나는 문자적으로 옳지만,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사람을 살리는 복음으로 사람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욥기 2장에서 욥의 고난의 소식을 듣고 위로하려고 찾아온 친구 엘리바스, 욥의 고통의 소리를 듣고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함께 있어주던 그 좋은 친구 엘리베스가 아주 날카로운 검사가 되어 욥의 죄인됨을 고발하려는 것만 같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죄책감을 중심으로 끌고가는 세계관의 한계이다. 우리는 분명 죄인이고,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해 심판하실 것이다. 사망이 약속된 결과이고, 육신의 사망 너머 둘째 사망이 이르기 전에도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고난이 주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단순 권선징악이 복음이 아니고 성공이 복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은 그런게 아니다. 복음은.. 죄인으로 도저히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우리가 하나님 은혜로 죄 사함 받아 다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 누리는 샬롬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어 다스리게 두신 것이 복음스럽지 않은가? 애초에 복음이라 부르는 샬롬은 창조 때에 이미 주어졌던 것이고, 죄로 인해 그 샬롬을 잃어버리고 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회복하신 것이다. 실제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에 대해 사랑으로 대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 욥이 마주한 고난 역시 사람 욥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누리는 샬롬에 대한 질문이자 더 깊은 샬롬으로 이끄는 과정이었다. 욥기 서두에 그 정황을 독자들에게 밝혀두었듯이, 사단의 의심과 시험에 대한 하나님의 신뢰에서 시작된, 욥의 온전함을 인정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고통을 마주할 때,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그 고통을 함께하고. 그리 할 수 없는 우리의 한계를 마주할 때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지 않을까 싶다.

 

ⓒ영화 '신과함께'
ⓒ영화 '신과함께'

7. 나가며: 신과 함께(Along with Gods)가 아닌 신(God)과 함께

다시 정리하고 싶던 핵심에 집중하자면, 우리는 다 죄인이다. 그 죄를 해결하지 못하면 죽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죄의 해결은 단순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다시 반복하게 되고 죄책감에 짓눌려 살기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질문에서 끌어오는 죄책감은 좀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미 그 질문의 답은 예수님이 하셨다

아무 죄 없는 인간으로 삶을 사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완전히 망했다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모든 자들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2:9-10)

신과 함께’(죄와 벌) 영화를 본 천만 관객과 아직 보지 못한 이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죽은 망자를 이끌어 염라대왕 앞으로 이끄는 신들과 함께 죄책감을 되짚으며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주신 죄사함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고, 그 받은 은혜를 실감하며 하나님과 함께 사랑하고 싶어지는 삶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 샬롬이기 때문이다. 샬롬!

 

글쓴이 서진 목사는, 청년대학생사역, 복음, 공동체를 연구하는 샬롬복음연구소 연구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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