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대에서 벌어지는 마녀사냥을 개탄한다
한동대에서 벌어지는 마녀사냥을 개탄한다
  • 최종원
  • 승인 2018.01.05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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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대의 김대옥 교수 재임용 거부를 보면서

그들만의 유토피아에서 벌어지는 마녀사냥을 개탄한다

1. 21세기 마녀사냥의 광기가 어른거린다

새해 벽두부터 마녀사냥에 대한 글을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21세기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마녀사냥의 광기는 눈 감아버리기에는 지나치게 볼썽 사납다. EBS의 한 성소수자를 다룬 프로그램에서 그들을 이해하는 입장을 보였던 방송인 박미선 씨에 대해 ‘일부’ 기독교인들이 거칠게 항의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분이 다니는 교회에 권사직을 박탈하라고 압력을 넣는단다. 한동대 ‘들꽃’이라는 모임에서 주최했던 페미니즘 특강의 후폭풍이 무시무시하다. 관련 교원과 학생에 대한 징계위원회가 열릴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설마 했는데, 그 모임의 배후로 김대옥 교수를 찍어 재임용을 거부했다고 한다. 물론 표면적인 사유를 제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학교나 당사자 모두 동성애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지 않은 것이 문제의 핵심임을 알고 있다.

요즘 신학에서 ‘환대’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것 같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말을 참 좋아한다. 타자에 대한 영접과 수용, 배려라니 얼마나 기독교와 밀접하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환대하는 대상에 결코 끼지 못하는 부류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동성애, 페미니즘, 이슬람 등이겠다. 환대의 기독교를 내세우는 기독교의 또 다른 얼굴은 실상 혐오와 배제이다. 슬프게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기독교인과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몰아붙이는 집단이 찰떡 같이 공조하여 그들을 배척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하고 나서 덜해지기는 했으나 한 동안 한국에서 캐나다의 트뤼도 총리의 인기가 매우 좋았다. 젊고 수려한 외모뿐 아니라 내각의 과반수를 여성으로 채우고,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과거 고통 받았던 인디언 원주민들에 대한 진솔한 사과와 보상 등을 하는 그의 정책은 태평양 넘어 한국인들을 열광시켰다. 그랬던 그도 한국인들에게 공통적으로 경멸을 당한 적이 있다. 두어 달 전쯤 그는 캐나다의 모든 성소수자들에게 정부가 했던 잘못과 과오에 대해 눈물을 보이며 사죄하였다. 그러나 내가 읽어 본 포털의 댓글에서는 응원보다는 비난이 훨씬 많았다. 짐작이지만 그리스도인 역시도 별로 차이가 없었을 것 같다. 내가 불편한 지점은 여기에 있다. 그토록 타자에 대한 공감과 배려를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타자에 포함되지 않는 부류가 왜 그렇게 많을까? 성소수자에 대한 인정은 차치하고, 그들에 대한 긍휼과 연민은 허용될 수 없는 것일까? 누군가를 쏙 빼고 나머지 타자를 사랑하겠다는 것은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모순을 캐나다에 살면서도 본다. 흔히 캐나다의 한인 그리스도인들은 캐나다의 동성애 정책만 빼고 캐나다의 대부분의 인권 정책이 마음에 든다고들 한다. 이 얼마나 비논리적인 진술이란 말인가!

2. 여성, 이브 (Eve)에서 아베 (Ave)로

서유럽의 중세가 끝날 무렵 종말론적 신앙 형태들이 여러 지역에서 분출하였다. 이른바 유토피아를 꿈꾸는 흐름이 사방에서 생겨난 것이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대표적이다. 1516년 출간된 유토피아 (utopia, no-where)는 이 세상에 없는 상상 속의 이상향이란 의미이다. 극복할 수 없는 지독한 현실 세계 속에서 더 나은 대안을 찾아가는 가능성의 세계가 유토피아이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의 삶은 결코 무릉도원에서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바둑 두는 삶은 아니다. 직업의 귀천이 없는 곳에서 일정 시간 노동과 수면이 보장되고, 지적인 생활을 추구하는 삶이 보장되는 누구 말마따나 ‘저녁이 있는 삶’이 유토피아이다. 그가 꿈꾸었던 것은 바로 도덕적 규범을 갖춘 권력이 지배하는 근대 시민사회의 이상이다. 그래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관용과 자유의 정신이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의 정신적 토대라고 평가하였다. 관용이란 종교, 직업, 계급과 인종, 나이 및 정치 성향 등 모든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세 말, 근세 초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유토피아는 이와는 반대로 나아갔다. 16세기 토머스 뮌처와 농민 반란 시기 뮌스터의 재세례파가 추구하는 것은 계급 없고 재산을 공유하는 평등사회였지만 그 사회는 무정부 그 자체였다. 17세기 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청교도 혁명이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실현되는 사건이라고 평가했지만 실제로 크롬웰의 독재와 탄압만이 크게 기억된다.

중세의 질서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질서를 찾아가면서 서유럽과 동유럽, 신대륙을 가릴 것 없이 생겨난 집단 히스테리가 마녀사냥이다. 마녀라는 개념은 중세에도 존재했지만 집단 히스테리로서 마녀 사냥이 등장한 것은 1430년대 이후라고 알려진다. 1450~1750년 사이 유럽과 신대륙에서 최소 4만에서 최대 11만 명이 마녀로 재판을 받고 그 중 절반 가까이 희생 당했다고 알려진다. 근대 초에 발생한 이 일련의 사법 행위의 희생자는 대부분 여성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마법사’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것 같은 친숙한 이미지인데, 마녀는 늘 어둡고 부정적으로 그려졌을까?

근대 초 마녀사냥 연구의 권위자인 제프리 러셀은 마녀사냥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산물이라고 진단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마녀는 새로운 근대 질서를 마련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희생양이었다. 어떠한 면에서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마녀로 규정되게 되었을까? 초대 교부시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여성에 대한 관점은 특히나 부정적이었다. 하와는 모든 인류를 악마에게로 이끈 통로였다. 심지어 어느 교부는 아담의 범죄는 선악과를 먹은 것이 아니라 여자의 말을 들은 것이라고 했다. 이렇듯 철저하게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그마나 여성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은 수녀원이었다. 수녀원이란 합법적으로 여성의 독신이 인정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중세 말 가톨릭 위계가 위기에 처하면서 종교개혁이 성취되기까지 가톨릭 내부 개혁운동인 공의회 운동뿐 아니라, 이단, 신비주의, 데보티오 모데르나 (Devotio Moderna) 등 다양한 종교 흐름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여성 환시가들 (female visionaries)이라고 불리는 여성 신비주의자들의 역할이다. 중세 말 흑사병, 교회대분열, 백년전쟁 등 경제적, 정치적으로 암울한 시기는 결국 성직주의, 스콜라주의, 남성중심 세계관의 한계이기도 했다. 한 가지 대안적 흐름으로 이제 여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대두된다.

이브에서 아베 마리아로의 획기적인 시각 전환이 그것이다. 여성이 죄의 통로에서 이제 대속의 통로가 된 것이다. 12세기 이후 중세 말로 가면서 마리아 숭배에 대한 기록이 활발하게 보이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 모국어 문학이 발전하면서 시에나의 카테리나 (1347-1380), 마저리 켐프 (1373- 1439)와 노리치의 줄리언 (1342-1416) 등과 같이 독자적인 사회 집단으로 등장한 여성 환시가들은 “아무리 바라보아도 어떠한 종류의 진노를 찾을 수 없는” (노리치의 줄리언)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을 강조하였다. 삶에 대한 태도와 영성에서 피상적인 낙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성성에 뿌리 내린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여성의 역할이 강조될수록 남성 중심의 위계 사회에서 긴장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종교개혁이 제시한 새로운 여성상은 중세의 여성의 역할을 단절시켰다. 적어도 수녀원의 독신 생활을 통해 제한적인 자기 실현을 할 수 있던 여성들이 종교개혁 이후에는 가정에서의 아내와 어머니의 모습으로 이상화되어 버린 새로운 구도에 종속되었다. 독신에 대한 부정적 견해와 여성의 사회적 목소리에 대한 혐오가 나타났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마녀사냥이라는 집단적인 광기가 등장했다.

3. 유토피아라는 환각의 제물이 된 마녀

민중들과 같은 주변부의 삶과 태도가 역사의 주제로 대두되면서 역시 주변부로 여겨졌던 마녀사냥이라는 주제가 20세기 말부터 역사학계에서 주목 받는 테마가 되었다. 마녀란 남성이 아닌 여성, 엘리트가 아닌 하층민, 과학이 아닌 미신에 빠진 사람으로 극단적 소외 집단을 상징한다.

도미니크회 수사인 하인리히 크래머와 야콥 스프랭거가 쓴 “마녀의 망치 (Malleus Maleficarum)” (1486)는 마녀 사냥에 대한 지침서이다. 여기에는 “여성들이 결코 만족을 모르는 성적 탐욕”을 가졌기에 그 특성상 마술에 쉽게 감염된다는 스콜라 신학자들의 왜곡된 견해가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이 지침서에는 마녀가 되는 방법과 마녀를 확인하는 방법과 마녀에 대한 재판 방법들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표준적인 모습으로는 마녀들이 악마와 계약을 맺어 그 힘으로 마법을 행하고, 마녀 연회 (Sabbath)에서 악마 숭배를 행하는 것이다. 필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밤에 한 곳에 모이기 위해서 그들은 빗자루를 타고 야간 비행을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 했다.

유럽 대륙에서는 1560~1630년까지 마녀 사냥의 최고 절정기였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17세기의 유럽을 생산성이 감소하고 인구가 하락하고, 전염병과 전쟁 등과 같은 사회적 불안 요소들이 팽배한 위기의 시기였다고 보았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내재된 불안 요인을 완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내부적으로 엘리트와 대중 사이의 문화적, 사회적 갈등 속에서 종교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국가의 안정에 필수적이었다. 이 차원에서 교육 받은 엘리트 지배계층이 문맹인 대중의 신앙을 자신들의 신앙과 세계관으로 통합시키고자 시도했다. 신교, 구교를 할 것 없이 교리 문답, 신앙고백서, 정기적 순회 감찰, 예배 의식의 표준화, 종교 재판소 등이 제도화되어 교육과 감독을 통한 정체성 확립이 시도되었다. 이러한 사회 전반의 ‘규율화’는 외적으로는 종교전쟁과 내부적으로는 마녀사냥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마녀와 악마 숭배를 동일시 하는 사고의 전환은 실제로는 민중들 사이에서 생겨난 것이기 보다 고위성직자, 신학자, 법률가, 정치가 등 지배층의 고안품이었다. 마녀의 체포, 고문, 재판, 처형을 통해 만들어진 마녀의 이미지는 대중들이 마녀의 색출과 처벌을 통해 스스로를 사회 질서와 도덕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하는 정체성을 강화시켰다. 마녀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반종교, 무질서, 타락의 기제는 종교의 영역인 것 같으나 실상은 획일화된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지배 권력의 규정하기였다.

사회적으로 약자인 여성, 그 중에서도 보호받을 수 없는 독신 여성이나 노인, 산파 등은 이러한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제물이 되기 쉬웠다. 1692년 미국 메사추세츠주에서 일어난 “세일럼 (Salem)의 마녀사냥”은 약 140명이 마술에 사로잡혔다는 혐의로 재판에 기소되고 그 중 19명이 교수형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마술에 대한 믿음, 여성에 대한 편견과 사회 집단 사이의 갈등 등에서 비롯된 상징적인 사건이다. 대중들은 평화 (salem)의 유토피아라는 환상 속에서 이 광기를 거들었으나 결과는 혐오, 불관용과 폭력이었다. 마녀사냥은 유토피아적인 사회질서를 원한 지배계급이 그를 완성할 목적으로 여성과 약자를 희생양 삼은 집단 병리 현상의 전형이다.

르네상스, 종교개혁, 유토피아주의는 이 땅에서의 진보와 이상의 구현이라는 목적을 공유한다. 하지만 국가의 지배 이념이나, 특정한 종교적 가치가 유토피아 구현의 중심이 될 수 있는가? 유토피아를 꿈꾼 근대의 대부분의 시도들은 슬프게도 디스토피아로 막을 내렸다. 근대 마녀사냥과 종교적 광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근대 사회 들어가기 위한 통과의례의 혼란이지만, 종교의 관용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나 컸다.

오늘 21세기 혼란의 한국 사회에서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획일화된 가치만을 추구하는 허상을 본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그 자체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척결하고자 하는 마녀사냥이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기생해서 독버섯처럼 자라난 다름에 대한 배제와 혐오는 정치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계 내에서 생겨나는 사회적 약자와 타자에 대한 혐오의 목소리는 위험수위를 넘나든다. 하지만 그것이 복음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을 내세울 때 사람들은 일단 멈칫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지키자’는 것이나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자는 것 모두 전투적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표현하는 점에서 맥락 상 차이가 없다.

물론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동성애를 죄라고 명시한다. 그러니 동성애를 죄라고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동성애나 페미니즘을 반대할 수 있다. 그러한 시각이 존재하고 존중 받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이다. 그렇지만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과 동성애자라고 해서, 혹은 동성애를 옹호한다고 해서 명시적으로 차별을 행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지금 이 사회에서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혹은 그들의 편을 들어준다는 이들이 집단적인 정신적 폭력에 내던져진다.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하루 아침에 멀쩡한 직장을 잃는다. 이것이 2018년 1월 오늘의 현실이다.

더욱 치졸한 현실은 페미니즘이나 동성애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예수께서 심각하게 지적한 종교의 위선과 탐욕의 죄 앞에서는 한 마디 바른 소리를 내지 않는다. 예수 정신을 걸고 혐오와 배제를 행하는 이들에게서 디스토피아가 된 유토피아의 현실을 본다. 엘리트의 고안물로서 등장하는 악마화된 이미지의 타자, 여성혐오, 그리고 페미니즘이 동성애로 가는 길이라는 혐의를 둔 담론들은 한국 기독교의 사회적 효용이 다해감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부끄러운 말기적 현상이다.

4. 유토피아, 다름을 관용한다

내가 주변에 알고 있고 교류하고 있는 한동대 출신 대부분은 목회자와 선교사의 자녀들로서 어려서부터 기독교의 가치를 내밀하게 간직하고자 하는 순수한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주로 모여 있는 공동체이기에 유감스럽게도 타자나 다름에 대한 이해와 고민을 하는 데 제약이 있다. 때문에 공동체 내에서는 타자와 다름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배제하는 것이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라 순수하게 믿을 수 있다. 한동대의 젊은 학부생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페미니즘이나 동성애를 반대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반대하는 것은 어떤 것으로도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존엄과 가치이다. 그 어떤 종교적 도그마도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가치 보다 우위에 설 수 없다.

한 집단의 종교의 가치가 개인의 사상과 자유를 제한하는 순간, 그 집단은 더 이상 지성의 공간이 될 수 없다. 왜 한동대가 기독교 반지성주의의 요람이라는 비판을 받는지 불편하더라도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양한 사고와 토론이 허용되어야 하는 곳, 그곳이 바로 대학이고, 지성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곳에서 교육 받는 이들은 민주주의 사회에 걸 맞는 지성인이 될 수 없다. 만약 그들이 작년 겨울 촛불을 들었더라면, 그 촛불은 자기 만족을 위한 것 그 이상은 아니다. 이번 페미니즘 특강으로 빚어진 일련의 사태의 최고 피해자가 누굴까? 김대옥 교수일까? 표면적으로는 그렇겠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지성인으로서의 비판적 사고와 타자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스스로 거세한 학생들 자신이다. 지금은 그것이 내부 논리의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지켜야 할 가치라고 생각하겠지만, 나중에 졸업하고 더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사람들 속에 살아갈 때를 한 번 그려 보기 바란다.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모습을 무척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확신이 서지 않거든 영화 ‘1987’을 보길 권한다. 젊은이들을 ‘빨갱이’, ‘용공분자’라고 낙인 찍어 내리 눌렀던 그 시대의 지성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느껴 보라. 그러면 지금 한동대의 젊은이들이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알려줄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페미니즘 모임을 주도한 학생들과 교직원의 징계를 요구했다. 아마 그들은 스스로 기독교 진리의 수호자인 양, ‘승리하신 주’께 감사할 지 모른다. 그들에게서 30년 전 체제전복을 기도하는 용공분자들로부터 대한민국을 보호해야 한다는 자들의 논리를 본다. 순결한 한동이 추구한 유토피아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다름에 대한 마녀사냥으로 끝날 수 있다. 시대만 바뀌고 대상만 바뀌었지 본질은 여전하다.

요즘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를 지냈던 로완 윌리암스의 책들이 여럿 소개된다. 낯익은 이름이니 반갑기도 하지만 실은 아주 많이 뜬금없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정서에서 그의 사상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을까 의심되기 때문이다. 그는 영국의 무슬림 공동체를 영국 사회 내로 온전히 통합시키기 위해 이슬람의 ‘샤리아법’을 일정 부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동성애 커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모델일 수 있으며, 동성애자 신부도 주교가 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가 주장하는 예수의 제자 됨을 듣기 좋은 얘기, 수용할 수 있는 담론만 수용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을까? 이슬람, 페미니즘, 동성애를 혐오의 대상으로 마주하는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오히려 그의 사상을 편리하게 순화시킨 버전만 유통되어 본래의 가치를 훼손할까 두렵다.

토머스 모어가 추구한 유토피아의 핵심은 다름이 관용되는 세상이었다. 허나, 이 땅에서 온전한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이들이 지금도 교회 강단에서, 학교 강의실에서 다름에 대한 혐오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핵심은 페미니즘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동성애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가 아니다. 기독교의 순수성이라는 이름으로 타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가 정당화된다는 데 있다. 어떠한 이유로든 신앙의 이름으로 혐오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다름의 문제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고민하면서 해답을 찾아가야 할 것이지, 혐오와 배제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 저열한 역사의 반복을 끊어야 한다.

이제 김대옥 교수의 재임용 거부 건에 대해 한동의 젊은 공동체가 답할 차례이다.

 

글쓴이 최종원교수는,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교회사와 지성사를 강의한다. 인문주의 정신의 존중이 교회 갱신의 핵심이라고 믿고,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회사 재구성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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