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보수' ‘정통’ 교회가 꼭 읽어야 할 책
한국의 ‘보수' ‘정통’ 교회가 꼭 읽어야 할 책
  • 정한욱
  • 승인 2018.01.03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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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로슬라프 펠리칸, 성서, 역사와 만나다 민족의 경전에서 인류의 고전으로, 비아, 2017년
야로슬라프 펠리칸, 성서, 역사와 만나다 민족의 경전에서 인류의 고전으로, 비아, 2017년
야로슬라프 펠리칸, 성서, 역사와 만나다 민족의 경전에서 인류의 고전으로, 비아, 2017년

금세기를 대표하는 그리스도교 역사학자로 예일대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교리사의 고전으로 꼽히는 그리스도교 전통의 저자이기도 한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Pelikan, 1923~2006), 이 매력적인 책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번역되었으며 어떻게 제작되고 유통되어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읽히고 이해되어 왔으며 어떻게 당대의 문화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류의 고전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친절하게 서술한다. 한 마디로 '서방 프로테스탄트 교회'라는 협소한 시야에 갇혀 있는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의 성서 이해를 성서 시대 전체성서의 백성 모두그리고 서구문화사 전체로 넓혀 주면서, 한 민족의 경전이었던 성서가 모든 인류의 고전으로 자리잡아가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낸 '성서의 문화사'라 할 수 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여러 분야 - 교회사와 일반 역사 기독교와 유대교 사본학과 성서(비평)주석학과 성서 언어 고문서학과 인쇄술 문화사와 선교 - 중 하나를 이 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세하고 권위 있게 다룬 책들은 많이 있다. 그리고 신학을 전공했거나 책 좀 읽는다는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들 중 일부에 대해서 아주 자세히 접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두를 성서라는 주제 아래 이토록 박식하고 매력적이며 품위 있는 한 권의 텍스트 안으로 모아들일 수 있는 저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이 책을 읽은 후의 우리는 성서라는 광대한 행성에서 자신이 속한 일부 지역만을 열심히 탐사하다가 우주선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처음으로 그 행성 전체를 조망하게 된 탐험가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 흥미진진한 책의 결론에서 성서의 '소유권'을 논하거나 성서는 누구의 것인가?’ 라고 묻는 것은 그 자체로 주제넘은 일이자 신성모독 행위이며, 오늘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전 교파 및 비신앙의 눈으로성서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는 성서의 일시적인 소유자이자 종신 세입자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성서의 주 독자였으며 성서연구를 자신들의 근본적인 과업으로 여겨 왔던 모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19:6)”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화해를 호소하면서 이 책을 마치고 있다. 55권으로 이루어진 영문판 루터 저작선를 편집한 루터교 목사였으나, 말년에 정교회로 옮긴 뒤 평신도로 세상을 떠났으며, 자신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한 미국 유대신학교에 이 책을 헌정한 저자의 다채로운 이력과 잘 어울리는 결론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성경의 문자를 종이 교황으로 숭배하고, ‘오직 말씀으로라는 모토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가며, 성경의 영원하고 독점적인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국의 보수' ‘정통교회는 이 넓은 시야와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현자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많아 보인다. 놓치기 아까운 부분이 많아 인상적인 몇몇 구절들을 옮겨보기로 한다.

 

본문 엿보기

70인역과 고대세계의 영웅모세

세부 내용에 어떤 문제가 있든, 유대교 공동체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했든 간에 70인역(히브리어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판)이 탄생함으로서 성서는 세계 문학의 일부가 되었다. 이방인 독자들은 70인역에 쓰인 그리스어를 다소 낯설어했지만 기본적으로 오뒷세이아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출애굽기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70인역으로 인해 모세는 그리스어로 말할 수 있게되었고 글자를 읽을 수 있는 많은 이가 모세의 말과 명령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모세는 만신전에 있는 세계의 영웅들과 어깨를 나눌 만큼 유명해졌다. .....모세의 생애에서 필론은 왕과 율법 제정자가 되는 이야기, 그리고 예언자 혹은 성직자가 되는 이야기를 함께 서술함으로써 모세를 그리스인들이 조화를 이루려 노력했던 삶의 두 방식, 즉 활동적인 삶(vita activa)과 관조적인 삶(vita contemplativa)을 모두 살아낸 인물로 조명했다. 그리스어판 오경의 친숙한 어휘 덕분에 필론은 모세의 일대기를 완성하면서 그를 낯선 고대 근동 종교의 이국적인 예언자가 아니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고전적인 네 가지 덕(지혜, 절제, 용기, 정의)을 온전히 구현한 인물로 그릴 수 있었다.

기록된 전승과 기록되지 않은 전승

아주 옛날부터 신성한 토라를 충실하게 관리했던 유대교 서기관들은 스승이 제자에게 불러주는 글자 그대로, 문서 그대로 내용을 보존하는 전통을 이어갔다. 이 때 제자는 본문의 의미, 이야기와 관련된 스승의 관습, 가르침과 관련된 다양한 전승도 전수받았다. 이것은 토라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전승 중 일부였고 이러한 전승 모음이 탈무드의 기초가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토라와 타낙(구약성서)를 받아들이고 여기에 신양을 더해 그리스도교 성서를 만들어낸 후에도 이러한 전승은 끝나지 않았다. 4세기 신학자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우스는 성호경을 긋거나 동쪽을 향해 기도하는 것과 같은 성스러운 행동은 어느 것도 성서에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신자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관습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이러한 행동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사도 시대부터 전해진, 일중의 기록되지 않은 전승이기 때문에 성서에 기록된 사도전승보다 결코 권위가 덜하지 않다. 입으로 전달되든, 기록으로 전달되든 기록되지 않은 전승과 기록된 성서는 모두 하나의 그리스도교 전통이고 규범의 지위를 갖고 있다

성서, ‘역사신앙고백사이

타낙(구약성서)에 있는 몇몇 개별 이야기와 인물은 다른 고대 문헌에 기록된 역사 정보와 일치한다. 고레스, 다리우스, 느부갓네살등 성서 이야기에 자주 나오는 인물들은 고대 다른 문헌에서도 손쉽게 발견되고 고대 역사가들이 자주 다루는 유명한 군주들이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타낙에서 나오는 역사 이야기와 이집트,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시리아, 그리스의 역사 기록을 맞추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둘을 끼워 맞추려고 하면 대부분은 결과가 멋대로 나오거나 가설에 그치고 만다. 실제로 성서에서 제공하는 역사 정보와 고대 근동 역사를 완전히 일치시키려는 시도는 성서의 권위나 무오를 입증, 혹은 반증하기 위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많은 경우 신학적으로 편향되어 있다. 이는 성서를 이루는 요소들에 대해 근본적인 사실을 알려주는데, 바로 성서 이야기는 역사 연대기를 목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으며 절대자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신앙고백이라는 성서의 저술 의도는 타낙의 구조, 형식, 내용을 지배한다. 유대교(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성서를 읽는 적합한 방법은 신앙 고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히에로니무스와 불가타 성서

성서 일부 혹은 전체를 라틴어로 번역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성서 원어와 라틴어의 간극을 메워서 확정적인 역본(불가타, Vulgata)을 만드는 과제를 떠맡은 이는 4세기 말에서 5세기에 활동했던 에우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였다. 르네상스 시대와 종교개혁 시기에는 히에로니무스의 번역본(불가타)에 나오는 오류와 기이한 표현, 그리고 그 표현을 기초로 진행된 당대의 공식 신학 해석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가타 성서가 미친 기념비적인 영향력, 즉 불가타 성서가 지닌 엄청난 문학적, 종교적 힘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히에로니무스는 한때 꿈에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닌 키케로의 제자라며 하느님의 질책을 들었을 정도로 라틴어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불가타 성서를 베르길리우스와 키케로라는 배경 아래 접근하면 그 안에 담긴 역사적 서술은 생생한 표현으로 넘치고 있음을, 시는 서정적이면서도 감동적이며 예언서는 천둥이 치는 풍경처럼 강렬한 수사로 가득 차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 불가타 성서를 수놓은 라틴어들을 제대로 익힌 이들은 로마 고전과 로마법 등 다른 라틴 문물에 조금이나마 접근할 수 있었다. 일종의 문화적 부산물이었다. 그렇게 습득한 지식은 서양 문물을 계승하는 하나의 통로가 되었다.

종교개혁과 성서

종교개혁 시기 신학자들은 자신들을 다른 무엇보다 성서신학자로 규정했다. 그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석사학위를 받은 거룩한 책을 전례 없는 강도로 연구했다. 영문판 루터 저작선의 절반 이상은 성서 주해로 이루어져 있다.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장 칼뱅을 따라 자신들을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개혁된 교회라고 규정한 칼뱅파는 루터교보다 더 성서의 권위를 확장했다. 칼뱅은 요한의 묵시록을 제외하고 성서를 이루는 모든 문헌에 관한 주석서를 썼다. 1536년 처음 시작한 방대한 저작 <그리스도교 강요>를 시작하며 나는 우리가 성서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만 논할 것이다라고 썼다. 이러한 전제를 갖고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 과정을 개편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교육에서는 교회법이나 전례학과 같은 전통적인 과목들보다 성서를 절별로 주해하는 훈련을 더 중시했다. 종교개혁가들이 생각한 지적인 교역자는 성서 언어를 잘 익혀서 신구약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 이를 바탕으로 강해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목자를 뜻했다.

오직 성서와 트리엔트 공의회

트리엔트 공의회에 따르면 오랜 시간 교회가 소중히 여긴 불가타 성서는 기록된 전승과 기록되지 않은 전통이라는 종합적 권위 체계의 일부였다. 이러한 넓은 체계에 성서를 배치함으로서 트리엔트 공의회는 솔라 스크립투라’, 오직 성서라는 생각에 근본적인 비판을 제기했다. 역사적 사실들을 엄밀히 검토해보든 신학적으로 엄밀히 따져보든 간에 실제로 그리스도교의 성서는 오직이었던 적이 없다. 그리스도교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성서는 타낙(대부분의 경우 70인역)이었고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예수에 대해 선포함으로서 이를 완성했다. 이후 이러한 선포들이 글로 기록되어 신약성서로 묶였을 때 교회는 이와 더불어 신경과 전례를 갖고 있었고 이를 통해 타낙과 신약성서가 그리스도교인의 신앙과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결정했다 ...... 성서는 교회와 전통에 대항하는 무기로 쓰였지만 실제로 그 무기를 보관한 무기고는 교회였으며 이를 보존하고 보호한 것은 전통이었다.

역사비평학과 근본주의

토머스 제퍼슨은 날카로운 면도날을 손에 쥐고 이신론의 원칙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복음서 본문에서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그 외 여러 가지 기적, 예수의 수많은 어록, 특히 요한의 복음서에 기록된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를 주장하는 이야기를 잘라냈다. 원칙적으로 제퍼슨이 그린 예수상, 그가 추린 예수의 가르침은 유대교인이든 이교도든 어떠한 독자가 보더라도 거부감이 없었다 ....... 수술 도구였든, 성형 도구였든, 혹은 치명적인 무기였던 간에 제퍼슨이 사용한 면도날은 성서가 권위 있고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문헌임을 인정하면서도 최상의 문헌학적 도구들을 활용해 연구하는 것이 정당하고,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오래된 생각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루터와 동료개혁가들이 교황의 수위권 주장이나 성사제도 등 중세 교회가 소중히 여기던 전통과 교리에 갖다 댄 도구와 동일한 도구를 역사비평가들은 교회가 시작된 시기에도 갖다 댔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사도적이라고 불렸던 1세기조차 그들에게 예외가 될 수 없었다 ....... 제믈러를 비롯한 개신교 비평가들이 행한 지속적인 작업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역사적 검토를 피할 수 없는 성서에 대한 특정 결론이 아니라 성서를 분석하는 학문적 연구 방법론, 혹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방법론을 성서에 적용하는 것의 정당성을 항구화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 몇몇 개신교 교파에서는 이러한 방법론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역사비평이 제기한 답뿐 아니라 질문 자체를 거부하는 이른바 근본주의자들이 나타났고 이로 인해 다시 분열이 일어났다.

라이마루스의 예수의 생애와 바흐의 마태 수난곡

바흐의 방대한 성악곡들과 칸타타, 무엇보다 <B단조 미사><수난곡>은 헤르만 사무엘 라이마루스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어느 시골 사람이 라이마루스가 읽던 것과 같은 성서를 어떠한 방식으로 읽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권위를 훼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가르침을 기리기 위해서 읽었다 ...... 바흐의 손길을 통해 그리스도의 절규는 지상에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다 좌절한 메시아의 절망 어린 음성이 아닌 자신들을 대신해 희생당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자의 신뢰를 신비롭게 담아낸 선언으로 바뀌었다. 비평가들의 연구가 독자들로 하여금 성서를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난공불락의 장벽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면 바흐의 <마태 수난곡>은 성서에 대한 깊은 묵상을 바탕으로 수난 이야기를 담담하게 재구성하고 비상하는 영광송을 그려냄으로서 복음을 수 세대에 결쳐 살아 움직이게 했다. 러시아계 미국인 정교회 신학자 알렉산더 슈메만은 말했다. “마태 수난곡, 특히 시온의 딸들의 울음이나 마지막 코랄과 같은 대목을 들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이런 음악이 탄생하고 연주되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믿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위대한 선교의 세기와 성서번역의 문제

서양 문화가 이른바 제국주의식민주의를 통해 세계 도처에서 세력을 확장할 때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곳곳마다 복음을, 곧 복음서와 성서를 전했다. 성서는 전례 없는 수준과 속도로 번역되었고 이윽고 수백, 수천 개의 번역본이 나왔다 ......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갑작스럽게 전혀 다른 근본 전제를 가진 문화로 들어갔다. 그들이 처음 이러한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선교와 사목 수행은 엄청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혼란과 논란을 일으킨 대표적인 문제는 일부다처제였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은 첫 아내를 제외한 모든 아내를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는 여러 아내를 거느렸음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가 모든 믿는 사람의 조상”(4:11)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한 유일한 구약성서 인물이 아니던가? 새로운 성서를 번역해 새로운 문화로 편입시키는 과정에 이러한 어려움이 가득했다.

성서연구와 홀로코스트

구체적인 통계 자료는 없으나 19세기보다 20세기에 로마 가톨릭 교회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성서를 더 많이 연구했음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유례없이 성서를 열심히 읽은 이 시대에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이 일어났으며 박해가 만연했고 집단 학살이 빈번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20세기에 어울리는 성서 은유는 이집트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고 탈출하는 모습이 아닌, 요한의 묵시록에 기록된 말 탄 네 사람(전쟁, 기근, 역병, 죽음)일지 모른다. 성서의 백성곧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의 관계라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를 두고 보았을 때 나치 홀로코스트는 둘의 불행한 역사 중에서도 최악의 순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 시대의 이단, 심미주의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이단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시대의 이단은 심미주의일지 모른다. 심미주의에 빠진 현대인들은 미술과 음악에서 초월의 궁극적인 신비, “두려움과 매혹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신비를 찾는다. 분명히 이 작품들은 우리를 이 세계 너머로 안내할 수 있는 신비로운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거룩하신 하느님, 모든 인류의 심판관 앞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키에르케고어의 비유를 따르자면 성서의 언어는 수술대와 벽에 가지런히 놓은 치과의사의 도구들에 견줄 수 있다. 치과를 찾는 환자는 현대문명의 기술을 집약한 시설과 도구들에 감탄할 수 있다. 그러나 의사가 치료를 시작하고 본래의 목적을 위해 도구들을 사용하면 그 감탄은 이내 공포로 바뀔 것이다. 새로 번역한 성서를 읽어 보라. 진부한 표현들을 뚫고 나와 당신에게 신선한 말을 건낼 것이다. 실제로 성서를 열심히 읽는다면 그때 맞딱뜨리게 되는 세계는 회당이나 교회를 거쳐 만나는 세계보다 훨씬 더 낯설며 훨씬 더 충격적일 것이다.

성서의 메시지와 과학적세계관

도 바울로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을 찬미하는 위대한 노래를 마무리하며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었다”(2:11)고 말했다. 이 구절은 우주가 삼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당대의 사고를 반영한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문자주의적인 성서 해석가들도 이 세계관까지 동의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자연과 우주에 대한 성서의 진술을 근대 자연과학이 발생하기 이전의 산물이지만, 내부에 있는 영원한 메시지만 솎아내고 껍질을 버릴 수는 없다. 바울로의 그리스도 찬가가 보여주듯 이러한 세계관은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메시지와 긴밀하게 엮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교든 그리스도교든 성서 주석과 해석의 역사를 살펴보면 성서에 담긴 근대 자연과학의 등장 이전의 세계관, 우주상은 이후 등장한 무수한 과학적세계관에 적응했다. 성서의 옛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서의 메시지를 적용할 수 없는 과학적 혹은 철학적 세계관이란 없으며 동시에 성서의 메시지에 완전히 부합하는 과학적 혹은 철학적 세계관이란 없다. 그 덕에 성서에 담긴 우주론은 시대마다 그 시대의 언어로 이해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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