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하는 거지?
뭐하는 거지?
  • 김기현
  • 승인 2018.01.0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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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 목사의 성경읽기 - 사도행전 1장 12-26절

1. 나는 성경을 읽을 때 질문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이해가 되어야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신앙은 맹목과 독단에 빠지기 쉽다. 물론, 나는 신앙이 이해의 전제라고 본다. 그 전제가 다르면 이해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아무튼, 오늘 본문을 읽자마자 내 버릇 어쩔 수 없나보다, 질문부터 떠오른다. 소소한 것들도 있다. 올리브 산이 어디냐, 왜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 라는 것을 유독 강조했을까, 등등안 중요한 질문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오늘 읽은 전체 단락을 꿸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그 줄기를 붙잡고 밀어붙여야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다. 올리브 산에 대해서는 그냥 네이버에게 물어보면 된다.’ 그래서는 본문과 대화를 제대로 나눌 수 없다.

내 질문은 이것이다. 이 사람들, 지금 뭐하는 거지? 조금 신경질적으로 말하면, 뭐하는 거야? 이 질문은 성경을 비롯한 모든 텍스트 읽기와 해석의 제일 원칙인 문맥(context)에서 나온 것이다. 11-11절은 증인이 되라고 하고 승천한 이야기다. 그리고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고 명령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모여 함께 기도하는 행동은 적절하다. 그렇지만, 왜 가룟 유다가 툭 튀어나오고, 그의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느냐 말이다. 그게 뭣이 중헌디복음서에서 익히 보았던 제자들의 황당한 행동의 재판이 아닐까? 예수님이 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러 예루살렘 간다, 라고 하자, 서로 누가 높냐, 누가 오른 쪽, 왼쪽에 앉을 거냐, 를 두고 열정적으로 논쟁하고 권력 투쟁을 벌이던 그들이 아닌가.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인 것을 보고도 주님이 누룩 이야기하자, 아이코, 빵 안 챙겼다고 혼내키시는구나, 라는 기상천외한, 어쩌면 우리네 보통 사람 수준의 반응을 보였던 그들이 아닌가. 십자가 앞에서 도망치기 바빴던 그들이 아닌가. 또 엉뚱한 짓을 하는 게 아닐까, 그런 호기심 어린 질문이 아니라 까칠한 의문이 든다. 다시 묻는다. 왜 이런 행동을 할까?

2. 앞에서 말했던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은 조금 뒤에 말하고, 가룟 유다로부터 시작하자나는 가룟 유다, 라는 단어만 보면, 내 얼굴이 포개진다. 출판된 지 약 10년 정도 된 내 책, 가룟 유다 딜레마(IVP) 때문이다. 내가 가룟 유다이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유다가 애틋하다. 안쓰럽다. 괜스레 눈물 난다. 참 불쌍한 사람이다생각해 보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제자들은 적어도 3년 반 동안 동고동락했다. 자기네 살림살이를 도맡았던 일꾼이다. 예수님이 누가복음에 의하면, 밤새 기도하고 특채한 12명의 사도 중 한 사람이 그다. 죽으시고 부활하신지 대략 40여일이 흘렀다. 그러니까 한 달 보름 전에, 그들은 절친한 동지이었고 친구들이었다. 그런 그가 죽었다. 스승을 배신하고 비극적 방식으로 죽었다. 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이입해서 읽어서 그런가, 제자들은 유다에 대해 양가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그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섭섭함을 넘어서서 분노하기. 가룟 유다를 어찌 하오리까,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어떻게 내 마음 속에서 떠나보내야 하나, 등등. 기도하고 기도하면서도 그 벗에 대한 엉킨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고 싶지 않았을까?

3. 기도하는 중간에, 그러니까 적어도 하루나 이틀, 사나흘이 지나지 않았을까, 함께 기도를 시작한지. 기도하면서 그들은 성경을 읽었음에 틀림없다.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말을 보면 그렇다. 다윗이 남긴 시편을 읽었는지, 아니면 하도 읽어서 외우다시피하고 있어서 자기들 상황과 딱 맞아떨어진다고 퍼뜩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그건 상상에 맡긴다. 아무려면 어떠리오그 시편이 유다의 배신과 죽음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 시편의 구약 혹은 시편에서의 뜻과 다시 제자들의 정황에 재해석되는 과정에 대한 엄밀한 연구는 학자들의 손에 맡기자. 그리고 조금 뒤에(약속의 실현), 그리고 성령 강림을 설명하기 위해 요엘 선지자의 말씀을 언급, 인용한 베드로의 설교 부분에서 다루지 싶다.

요는, 자신들이 겪은 어려움을 그들은 성경으로 해석해 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토록 열심히 기도하는 중간 중간에 서로 감지했을지는 모르겠다만, 유다에 대해 기도하면서 눈물과 한숨이 나왔을 법하다. 이건 만고 내 생각이다. 아무튼, 성경으로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시대라서 저런 모습을 보면 위험해 보인다. 아전인수가 아닐까 그런 생각부터 한다. 적어도 그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해, 그리고 죽은 유다를 고이 떠나 보내기 위해 이런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고 본다다윗의 시편을 인용한 부분을 보면, 약간 섬뜩하다. 배가 터지고 창자가 쏟아졌다는 말이 그렇다. 그것은 사실을 사실 대로 보도(마태와 누가의 기록이 약간 달라서 학자들은 어느 게 맞냐고 싸운다.) 한 것이지, 그를 저주하기 위한 언급이 아니라고 본다.

4. 이렇게 해 보자. 16절부터 20절까지를 당신이 낭독해 보라. 그것이 당신의 해석이다. 읽는 이 마다 결이 다를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유다 이야기할 때, 베드로의 거친 성정이 드러나는 것인데, 스승을 배신하고 팔아버린 동지에 대한 이글거리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독하게 성경을 인용하며 설교하는 베드로의 목소리로 읽는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배신하면 베드로도 유다 못지 않지 않는가다른 하나는 내가 말한 것처럼, 유다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목소리가 촉촉하다. 물기가 묻어 있다. 그 시편을 읽으면서 마치 시를 낭송하듯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연민의 마음으로 일는 것이다. 이렇게 죽은 벗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고 본다.

5. 재작년인가? 고 김영삼 대통령이 운명하시던 날, 페이스북에 그의 삶을 조롱하고 비판하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꽤 많은 곳에서. 물론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가면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그리고 세월호 유가족을 향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주의 말을 퍼붓는 이들이 있다. 나는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죽는 날, 우리는 슬퍼해야 한다고. 그가 선인이든, 악인이든 간에 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의 공과는 나중에 말해도 된다. 애도해 주어야지 않겠는가. 나는 그것이 사람이라고 본다.

6. 이것이 15절에서 20절에 대한 나의 묵상과 읽기이다.

7. 지금 이들이 하는 일은 한 편으로 죽은 벗에 대한 애도와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에 대한 해석을 하고 있다고 했다. 21절부터 26절은 더 희한하다. 앞에서 말한 대로, 한가하게 공석인 자리를 채우는 일이나 하는가? 본문에서 읽혀지는 분위기는 결코 부정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고, 이들은 무슨 일을 벌이는가?

8. 1장에서 이스라엘 나라 이야기를 했다. 누가복음의 1-2장에는 약속한 것을 기다리는 노인들이 등장한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시므온과 안나이다. 그리고 1장에서도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원천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나라란, 이 맥락에서 간단하다. 또는 예수님께서 사도를 12명으로 제한 한 것도 같은 이치다.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의 나라이다. 그러니 열 두 제자라는 숫자를 채우는 일은 그 나라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일이다. 쓸 데 없는 짓이 아니다. 뭐랄까, 전투하기 전에 진영을 정비하는 일이라고 보면 된다.

9. 내가 보기에 선출 방식과 자격, 그리고 뽑힌 사람이 흥미롭다. 이건 존 스토의 사도행전(BST)에서 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성경적 근거와 기도, 추천과 제비라는 선거 방식이 잘 통합되어 있다. 교회에서 사람을 뽑을 때, 이런 원칙에 준해서 진행하면 좋겠다.

10. 자격에 관해서. 매일성경해설 부분에서 나는 세 가지로 자격 요건을 정리했다. 그걸 그대로 가져온다.

사도의 자격은 세 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주님을 따르던 제자이고, 부활의 목격자이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한 적이 있어야 보이지 않는 주님과 걷는 법을 압니다. 그리고 제자공동체 안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나 홀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은 부활의 목격자입니다. 부활의 전망이 없이 갈 수 없는 길이고, 부활의 능력으로 사역을 시작하고 완성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어떤 기준으로 일꾼을 세웁니까? 나는 저 기준에 부합한 일꾼입니까?”

저 각각을 좀 더 길게 풀고 싶기도 하지만, 짧지만 저걸로도 충분하리라.

11. 뽑힌 사람에 대해서. 두 사람이 추천되었는데, 각 사람의 소개가 약간 다르다. 요셉에 대해서는 별명 까지 친절하게 말해준다. 그가 그 공동체 내부에서 익히 알려져 있고, 나름 인정 받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맛디아는 덜렁 이름 석 자다. 균형추가 기울었다. 그런데 제비뽑기이다 보니 의외의 인물인 맛디아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후의 사도행전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이 흥미롭다는 말이다. 그럼 왜 뽑은 거지? 그저 열 둘 이라는 숫자를 채우기 위해? 잘 모르겠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충성스럽게 헌신했을 것이다대개의 사람이 그러하듯이 나 또한 인정받고 기억되는 것을 무지 좋아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칭찬은 나를 춤추게 한다. 때문에, 헤겔이나 현대의 철학자와 사회학자들이 인정 투쟁이라는 용어를 만들고, 토론하지 않는가. 사랑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어찌되었건, 누가의 기술에는 두 사람이 빠져 있다. 특히 맛디아는. 남이 안 알아줘도 묵묵히 순종할 수 있는가, 그런 도전적 질문을 내가 나한테 던진다.

12. 이에 대한 대답은 120명이 드린 기도에 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 저 기도 대로 사람의 기준이나 인정, 평가와 달리 맛디아가 뽑혔고, 저 기도 대로 기록되든 기억되든 상관없이 나는 내 할 일 하면 그만이다. 그게 증인이다. 본 것을 말하면 그만이지 증인에게 무슨 상이 있단 말인가. 내 할 일만 하면 된다.

13. 글을 쓰다 보니 12-14절이 제일 뒤로 밀렸구나. 이제 안식일에도 걸을 수 있는 거리에 대해서 말해보자. 누가복음, 특히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구약의 실현자이자 완성자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신다. 여기서 길게 설명할 수 없지만, 문자적 실천이 아니라 의미적 실천 혹은 그 근원까지 치고 들어가서 본래의 의도에 부합한 해석이었고 실천이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과 계명 중 가장 중추인 십계명을 잘 지키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기존의 전통과 규칙을 무조건적으로 반대한, 반대를 위한 반대가 결코 아니다. 저런 기본적인 규칙이 잘 준수되어야 하나의 공동체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거다.

14.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아니 열 한 제자의 명단 다음에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이 있다는 것이 신선하다. 누가복음에도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찾으러 온 어머니 마리아 이야기가 있지 않는가. 그랬던 어머니가 예수를 자신의 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신앙하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와 특히 부활 그리고 40여 일간의 여정과 동행이 주효했을 것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을 다시 보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갈수록 느낀다. 그냥 그렇고 그런 사람 같지만, 다시 보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형상이다. 내 친구이고 형제이고 자매이다. 기존의 관념으로 봐서는 안 된다. 스펙이니 외적 조건으로 사람을 규정하고 보면 안 된다.

15. 어제 묵상이 너무 즐거워서, 반응이 뜨거워서 오늘도 묵상한 것을 글로 썼다. 시간만 자그마치 3-4시간 걸린 듯 싶다. 써야 할 글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은데 말이다. 나 스스로 지금 뭐하는 거지, 라는 의구심이 아주 조금 든다. 아니다.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다. 잘 사용하는 거다. 투자요 헌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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