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가난한 사람'이 되셨다
[곽건용] '가난한 사람'이 되셨다
  • 곽건용
  • 승인 2017.12.31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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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이야기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야기 - 누가 2:1-20

설교동영상

성탄절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날이고 성탄절 이야기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를 단순히 하느님이 존재한다고 믿는 유신론 종교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느님이 존재하고 그 하느님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믿는 종교에 머물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믿는 종교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믿음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하느님은 하나님대로 저 높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사람대로 이 낮은 땅에 있어 서로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이 저 높은 하늘을 떠나서 땅에 내려와 사람이 되셨다고 믿는 종교가 기독교라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하느님과 사람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믿는 종교, 하느님 안에서 사람을 보고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종교입니다. 하느님을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말할 수 없고 사람을 말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말할 수 없다고 믿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하느님이 사람으로 태어나신 하느님의 생일입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탄생의 이야기를 잘 읽어보면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라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精髓)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성탄절 이야기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처녀가 아기를 낳았다고 하는, 현대 과학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성서에는 이것 이외에도 현대인들이 믿기 어려운 얘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민에 빠집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어야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믿어지지 않는 얘기를 억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믿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주눅들 필요도 없고 억지도 믿는 척 가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얘기해도 됩니다.

신앙은 고정된 게 아니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신앙은 변하는 것이고 그것이 당연합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습니까. 변하지 않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기 십상입니다. 믿었던 것이 의심스러워질 때도 있고 믿어지지 않던 것이 믿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 믿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강박감이나 조바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이 내게 오길 기다리면 됩니다. 그리고 믿음이 내게 왔을 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동정녀 탄생도 그렇습니다. 그게 믿어지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는 대로 있으면 되고 믿어지면 믿으면 됩니다. 또한 그게 내 신앙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그렇게 믿으면 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 탄생이야기에서 이것에만 집착해서 그 외의 많은 중요한 진실을 놓치고 있습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구봉서 씨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성탄 시즌에 구역 식구들이 모여 구역예배를 하는데 처녀 잉태를 놓고 어떤 분이 계속해서 트집을 잡아서 진행이 안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갖느냐,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논쟁을 한참 듣고 있던 구봉서 씨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 자기 서방이 괜찮다는데 왜 네가 야단이야?"

 

예수 족보에 등장하는 네 여인

저는 오늘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 담겨 있는 중요한 진실이 뭔지를 얘기하려 합니다. 먼저 마태복음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마태복음은 길고 지루한 예수님 족보로 시작되는데 마태는 이 족보에 네 명의 여자를 넣어놓았습니다. 우리 못지않게 가부장적인 유대인의 족보에 여자 이름이 올라와 있다는 사실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그것도 한 명도 아닌 네 명이나 말입니다. 유다에게 베레스와 제라를 낳은 다말이 첫째이고, 둘째는 살몬에게 보아즈를 낳은 라합이며, 보아즈에게 오벳을 낳은 룻이 셋째이고, 다윗에게 솔로몬을 낳은 우리아의 아내가 마지막입니다. 우리아의 아내에게도 밧세바라는 이름이 있는데 웬일인지 마태는 그녀를 이름 대신 우리아의 아내라고 불렀습니다.

다말은 창녀처럼 꾸미고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해서 그에게서 아이를 낳은 엽기적인 며느리였고, 라합은 여리고에 살고 있던 창녀였으며, 룻은 이스라엘에 시집 온 모압 사람으로 남편이 죽은 후 보아스와 재혼해서 오벳을 낳은 사람이며, 밧세바는 헷 족속 우리야의 아내였다가 남편이 전쟁터에서 살해당한 뒤에 다윗의 아내가 되어 솔로몬을 낳은 여인입니다. 네 여인은 모두 당시 기준으로 보면 흠결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다말을 제외한 세 여인은 모두 이방인이었습니다. 한국인 못지않게 핏줄을 중시하는 유대인이며 특히 다윗의 자손임을 강조하는 예수의 족보에 이런 여인들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게 심상치 않습니다. 더욱이 네 복음서 중에 가장 유대적 성격이 강한 마태복음에 말입니다. 이 의미가 무엇인지 당연히 궁금합니다. 그게 뭘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설교 마지막에 하겠습니다.

 

탄생 소식이 목자들에게 전해진 까닭은?

다음으로 누가복음으로 넘어갑니다. 누가는 아기 예수 탄생 시의 주변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전합니다. 그에 따르면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목자'는 사실 우리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직업입니다. 우리 고국에는 이런 직업이 흔치 않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목자를 성서를 통해 압니다. 목자 하면 상당히 목가적으로 들리고 평화로운 그림이 떠오르지만 유대사회에서 목자는 매우 낮은 계층에 속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킬 수 없었으므로 죄인 취급을 받아 종교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안식일에도 양들을 먹여야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 탄생의 소식이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은 뭘 의미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설교 마지막에 하겠습니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그대들은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그대들에게 주는 '표징'(sign)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태어난 아기가 구세주임을 알아보는 징표(sign)는 그 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점이란 얘기입니다. 대갓집 안방에서 비단 이불을 덮고 깨끗한 포대기에 싸여 숨소리도 고르게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아기가 아니라 말울음 소리 요란하고 지저분한 마구간에 놓여있는 말 밥통 안에 누워 있는 아기, 바로 그 아기가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라는 겁니다. 하늘에서 비추는 한 줄기 빛도 없었고 배후에서 비추는 은은한 후광도 없었습니다. 지저분한 마구간 한 구석에 초라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바로 그 아기가 구세주임을 보여주는 표징이란 사실은 대체 뭘 의미할까요? 이 물음에 대한 대답 역시 설교 마지막에 할 텐데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되신 하느님

저는 설교 서두에서 기독교 신앙의 정수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믿음이라고 얘기했는데 사실 그것은 진실의 절반만 얘기한 겁니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천하게 취급되던 네 여인이 등장한다는 사실, 구세주의 탄생 소식이 유대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받던 목자들에게 전해졌다는 사실, 그리고 지저분한 마구간 한 구석에 초라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바로 그 아기가 구세주임을 보여주는 표징이란 사실은 하느님이 단순히 사람이 되신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되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추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 그것도 당시 유대사회에서 죄인 취급을 당하는 사람이 낮은 사람이 되셨다는 겁니다. 추상적인 성육신(incarnation)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으로의 성육신'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됩니다. 하느님은 그냥 사람이 되신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믿음은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이 되셨다는 믿음은 추상적일 수 없습니다. 이 점을 묵상할 때마다 떠오르는 얘기가 있는데 그것은 신영복 선생님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쓴 얘기입니다. 우리는 보통 집을 그릴 때 어떻게 그립니까. 지붕을 먼저 그리고 그 다음에 기둥을 그리고 벽와 바닥을 그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선생이 감옥에서 만난 한 목수는 그와 반대로 그리더랍니다. 곧 기초를 먼저 그리고 그 다음에 기둥, , 지붕 순으로 그리더라는 거지요. 집을 짓는 순서로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추상과 구체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런 진실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이 되셨음은 하느님이 추상적으로, 개념적으로만 사람이 되신 게 아니라 실제로, 구체적으로 사람이 되셨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람 사는 세상의 가장 밑바닥으로 오심으로써 그분으로 인한 구원에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음을 보여주신 겁니다. 바로 이 예수님이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그대들은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습니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습니다."라고 말씀한 것도 같은 맥락이 되겠습니다. 말울음 소리 요란한 지저분한 마구간에 초라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오신 예수님은 굶주리고 목마른 나그네로,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의 모습으로 줄곧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저 하늘에서 리모컨으로 세상을 조종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친히 사람이 되어서 이 세상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잠시 사람의 몸을 빌려 세상에 머물다가 할 일 마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이 되셔서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더 정확하게는 가난한 사람이 되신 하느님, 이분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입니다.

이런 하느님은 우리와 같이 웃고 울면서, 같이 기뻐하고 아파하면서 우리 삶속에 계십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다말, , 아합, 밧세바의 하느님이기도 합니다. 성골, 진골만의 하느님, 금수저, 은수저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힘없이 주변으로 밀려난 사람들, 내쫓기고 무시당하는 가난한 사람들, 흙수저의 하느님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류를 그 품에 안으시는 분입니다. 문화와 언어와 피부색과 성별에 상관없이, 빈부와 계층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는 분입니다. 좁디좁은 사람의 생각 안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들 입맛대로 그어놓은 경계선 안에 머무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기독교라는 울타리로 하느님을 한정할 수 없습니다. 이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품에 안으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이런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이 되신 성탄절은 기독교인들만의 명절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명절인 겁니다. (언제나)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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