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훈] 포도원 일꾼(주인) 비유
[최주훈] 포도원 일꾼(주인) 비유
  • 최주훈
  • 승인 2017.11.03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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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1-16
Vincent van Gogh,, The Red Vineyard, 1888년 11월
Vincent van Gogh,, The Red Vineyard, 1888년 11월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으려고 나간 주인과 같다’는 말로 시작하는 마태복음 20:1-16 말씀은 보면 볼수록 참 이상한 비유입니다. 당시 이것을 듣고 있던 최초의 청중들 입장을 생각해 봐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예수가 좋아서 갈릴리에서부터 따라 나선 사람들이라지만, 제가 그 사람들 중 하나라고 해도 고개부터 갸우뚱했을 것 같습니다. 첫 구절부터 그렇지요. 이 비유가 포도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예수님 당시에 포도원은 식민지 수탈을 위한 노동력 착취의 전진기지라고 할 만합니다. 하필 이런 배경을 들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군산 출신입니다. 요즘 뜨는 관광지이죠. 군산에 가면 장미동, 미성동 같이 ‘미’자 붙은 동네가 간혹 눈에 들어옵니다. 보통 ‘장미’라고 하면 아름다울 ‘미(美)’를 쓰는 게 당연하겠지만, 군산에서 ‘미’자가 들어가는 동네들은 대부분 쌀‘미(米)’자가 사용됩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호남의 쌀을 모아서 일본으로 가져가는 수탈창고 역할을 하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쌀이 귀하기도 하지만 당시 군량미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장미동은 쌀 저장고라는 뜻이고. 미성동이란 동네는 쌀이 성처럼 높이 쌓여 있었다는 뜻입니다. 쌀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수탈과 노동력 착취의 온상이 되었고, 수탈하는 지주나 상인들은 그 만큼 돈을 벌어 번창했던 곳이 군산의 아픈 역사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 로마의 수탈대상 1호가 된 곳들이 있는데, 바로 포도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일반인들은 포도주를 원액으로 마실 수 없고 중요한 축제 때나 물에 희석해서 마실 정도로 귀한 귀족들의 고가품이었지요. 그 때문에 로마의 식민지 시대를 살고 있던 이스라엘에서 포도원을 가졌다는 것은 곧 굉장한 부자나 아니면 로마와 결탁한 권력가로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니 포도원에서 노동력 착취가 벌어지는 것은 예삿일이었을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포도원은 바로 이런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따라 나선 사람들의 대부분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점이 무척 걸립니다. ‘갈릴리’라는 뜻은 ‘이방인의 땅’이란 뜻이지요. 오죽했으면 동네 이름이 이방인의 땅, 갈릴리일까요? 로마인들과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 땅을 빼앗긴 설움이 이 한 단어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땅과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다는 것은, 절망 속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모든 희망을 걸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청중들에게 비유를 하려면 위로가 되는 이야기를 해 주는 게 상식일 텐데, 예수님은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악한 지주, 노동력 착취, 불공정 거래의 온상으로 알려진 포도원을 배경으로 비유를 시작하신 것이죠. 하필 이런 이야기를 왜 꺼내셨는지 나중에 예수님 만나면 물어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어쩌면 이 비유의 배경으로 포도원을 선택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현실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은 포도원을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냥 행복하고 마냥 즐거운 세상이 아니라 실은 당혹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예수님은 정확히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비유는 이처럼 우울하게 시작되지만, 여기 나온 주인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반전을 시작합니다. 이 주인의 행동이 무척 놀랍고 의아한 이유가 있습니다. 8절에 갑자기 포도원 청지기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포도원 관리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인은 인력시장에 다섯 번씩이나 직접 나옵니다. 이런 일은 관리인이나 하는 일이지 주인이 체통머리 없게 할 일은 아닌 것이지요. 당시 통념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 말고도 이상한 것은 또 있습니다. 어쩌면 이 대목이 가장 이상한 부분일 겁니다. 다섯 그룹으로 나누어 부른 일꾼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주는 대목입니다. 전후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냐’며 주인에게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정당하다고 손을 들어 줄 만합니다. ‘일한 만큼 받은 것’그것이야 말로 당연한 것이고,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이지요. 이것을 우리는 ‘사회 정의’라고도 부릅니다.

이런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주인의 행동은 뭔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비유가 던지는 고민거리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입니다. 이 비유엔 ‘공평과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내용이 최소한 세 번 반복됩니다. 같이 찾아 보도록 하지요. 마20:2절 말씀, 아침에 품꾼을 데려올 때 주인은 일꾼에게 한 데나리온을 “약속”합니다. 여기 약속은 계약을 뜻합니다.

3절로 넘어가 볼까요? 거기 보면 제삼시, 즉 오전 9시에 일감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데려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4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이 구절에서 “상당하게”라고 쓰여진 부분은 원래 원문엔 ‘정당하게’ 또는 ‘정의롭게’(디카이오스)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이 단어는 ‘하나님의 의’(디카이오수네)라는 말을 쓸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다시 말해 아침 일찍 온 사람들처럼 정확한 계약을 하진 않았지만, ‘정당하고 정의롭게 값을 매기겠다’며 구두로 약속합니다. 그 다음 5절에 보면 그 다음 두 그룹 역시 똑같은 방법으로 포도원에 들어옵니다.

이제 마지막 제십일시에 온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여기 십일시는 오후 다섯시입니다. 인력시장은 이미 문을 닫았고, 더 이상 일감을 얻을 희망이 없는 시간입니다. 그 상태로 집에 돌아가면 가족과 아이들을 볼 낯이 없을 정도로 체면이 말이 아닐 게 분명합니다. 그런 절망적인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어쩌면 멀쩡한 몸뚱이로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스스로 찍을 만큼, 굴욕감만 가득한 하루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포도원 주인 입장에서 생각해 볼까요? 해질 무렵 데려온들 한 시간도 부리지 못하게 될 게 뻔합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인력시장에서 고개 떨군 사람들을 불러 가자고 합니다. 당시 로마 식민지 시대 부유한 포도원주인이라는 걸 고려해보면, 자칫 일만 해 주고 품삯을 받지 못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이 품꾼들은 그저 실낱같은 희망으로 이 주인을 따라 나섭니다. 마지막에 포도원들어 간 사람들은 앞 선 일꾼들과 상황이 완전히 다릅니다. 계약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정당하고 정의롭게 품삯을 주겠다는 구두약속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이 세 가지 상황은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계약서를 지키는 것, 얼굴을 맞대고 구두로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 그리고 그냥 주인을 믿고 따르는 것. 이 세 가지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과 평등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는 동시에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 비유의 앞뒤로 나오는 동일하게 나오는 구절이 있는데, “처음 된 자 나중되고 나중 된 자 처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계약서 내용을 지키는 것을 정의라고 여기는 사람은 모세의 계약을 따르는 유대인들을, 얼굴을 맞대고 구두로 약속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과 제자들, 그리고 그저 절망 가운데 주인을 믿고 따라 나서는 사람들은 이방인과 바로 오늘 우리들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요?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공의가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정의란 절박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절박한 사람들의 안녕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삶에서 내몰리고, 마음이 가난하고,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마20:8절 말씀부터 나오는 구절입니다. 품삯을 지급하는 순서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주인은 청지기에게 “나중 온 사람부터” 삯을 주라고 명령합니다. 순서는 주인이 정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리 보아도 순리에 맞지 않지요. 게다가 주인의 경리담담인 청지기라면, 아니 조금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이런 순서로 주지 않을 게 뻔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인이 주라고 한 ‘삯’이라는 말은 노동자에게 정해진 온전한 하루 품삯 즉 ‘한 데나리온’을 뜻하는데, 아침 일찍 온 그룹부터 순서대로 한 데나리온 씩 주었다면 아무 문제가 될 게 없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침에 온 일꾼들에게 계약대로 한 데나리온을 지급했다면 아마 이 그룹은 하루 내내 일하고서 종일치 품삯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분 좋게 그곳을 떠났을 겁니다. 그런 다음, 다음 그룹을 불러서 한 데나리온을 주면, 당연히 땡잡았다는 생각으로 기쁘게 집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겠는데, 주인은 의도적으로 순서를 뒤바꾸어 버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저녁 무렵에 들어온 사람들부터 한 데나리온 씩 쥐어 줍니다. 그러니 당연히 다른 노동자들로부터 원성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건 공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더 받아야 마땅합니다!” 이게 바로 12절에 나오는 일찍 온 일꾼들의 원망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주인은 순서를 바꾸어서 이런 사태를 자초했을까요? 이 대목이 수수께끼 같습니다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주인의 태도를 다시 한 번 상기 시킵니다. 여기 나온 주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로마 식민지 시대에 포도원을 가진 부자치고 인력시장에 나가서 직접 인부를 데려올 사람은 없다는 걸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관리하는 청지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다섯 번씩이나 나가서 사람을 데려올 정도로 특이한 캐릭터입니다. 단순히 일감이 부족해서 주인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6절 말씀을 통해 추론할 수 있습니다. 주인은 일감을 얻을래야 얻을 수 없는 실업자들의 아픔을 알고 있었고, 일감을 얻지 못해 돌아가게 될 가정의 빈궁함, 굴욕감, 상실감을 뼈아프게 알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측은지심이 아닙니다. 주인은 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그냥 쥐어 주면서 ‘여러분 가서 이 돈으로 식구들에게 줄 양식을 마련하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장터에 있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적선 받고 있는 거지같은 처지로 생각해서 굴욕감을 맛보았을 겁니다. 주인은 결코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돈을 적선하는 대신 일할 자리를 마련해주고, 땀 흘린 대가를 당당히 받아 갈 수 있도록 체면을 살려 주십니다. 이런 주인의 성품으로 보아 품삯 받는 순서를 바꾼 의도가 확실해 집니다. 계약서에 따라 정당한 품삯을 받는 사람들도, 구두로 품삯을 약속한 사람들도 모두, 빈궁한 사람에게 주인이 한 데나리온 씩 쥐어주는 모습을 보게 하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와 같이 절박한 처지의 사람들을 품는 삶을 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할 것은 하루 품삯인 ‘1 데나리온’입니다. 이 하루 품삯을 다른 말로 하면, 주님 가르치신 기도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주인은 모두가 한 데나리온, 즉 일용할 양식이 모두에게 나눠지는 세상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격려합니다. 이렇게 모두가 일용할 양식으로 함께 나눌 수 있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요? 그것이 바로 정의로운 나라, 공평한 나라,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가 시작되는 마20:1절에서 이 비유의 주제를 “천국”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우리의 머리로는 당연히 그런 나라, 모두가 일용할 양식을 나눌 수 있는 나라를 좋아할 것 같지만, 이런 나라 안에서도 하나님나라의 분배방식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원망하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린 일을 저 사람보다는 더 했으니 저 사람보다는 더 받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잘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약정 임금을 다 받지 못한 사람의 외침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합니다. 보통 공정한 분배란 ‘일한 만큼 받는 것’이 맞습니다. 반대로 일한 만큼 받지 못하면 그것은 부당한 불의가 됩니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는 일한 것보다 적게 받은 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더 많이 받은 이들의 불평이 문제가 됩니다.

저는 이 비유를 보면서 탕자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다 아시는 내용입니다. 탕자의 비유 맨 마지막에 큰 아들이 나오는데 아버지를 원망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집 나갔다가 돌아온 동생에겐 송아지도 잡고 잔치를 벌여주는데, 왜 나에겐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냐며 불평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오늘 이 비유에 나오는 먼저 온 자들의 불평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끝맺음을 하십니다. 16절 말씀 “나중 된 자 먼저 되고, 먼저 된 자 나중되리라” 그리고는 불평하던 일꾼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일절 한 마디 언급 없이 함구해 버립니다. 일종의 ‘사라진 결말’인 셈이죠. 그리고는 예수님은 당신 앞에 있는 청중들과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 결론을 찾아보고 자신의 삶 속에서 너는 어느 자리에 서겠냐고 질문하십니다. 보통 비유의 제목을 ‘포도원 품꾼의 비유’라고 부르지만, 실은 ‘포도원 주인의 비유’라고 해야 옳습니다. 마치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기다리는 아버지 비유’라고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문에 오늘의 교회력 복음서 본문은 탕자의 비유와 쌍둥이 비유라고 할 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이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우릴 찾아 나선 분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는 예수님 당시 포도원처럼 불의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 한 복판에서 우리의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우릴 찾으시는 주님은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차별하거나 구분하지 않고 찾아오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애타게 찾으시는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회복시키고, 모든 만민이 기쁨과 아픔을 나눌 수 있는 나라, 정의와 평화와 생명이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실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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