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훈] 마리아의 찬가, 그리고 성찬의 기억
[최주훈] 마리아의 찬가, 그리고 성찬의 기억
  • 최주훈
  • 승인 2017.12.1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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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훈목사의 설교 - 눅1:39-55

 

대림절 초를 하나 더 밝혔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천사에게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가 친척 엘리사벳을 만나고 그 기쁨을 노래하는 장면입니다. 후에 엘리사벳은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요한을, 마리아는 예수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 이 만남은 위대한 역사라고 불릴 만합니다. 한 명은 구 시대 마지막 장을 매듭지을 아이를 잉태하고, 또 한 명은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 아이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만나 노래하는 오늘의 말씀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마리아도, 엘리사벳도 모두 아이를 가질 수 없거나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들어 경수가 끊어진 지 이미 오래 입니다. 마리아는 아직 동정녀입니다. 게다가 아직 정식 혼인을 하지 않았기에 혼전 임신일 경우, 유대율법에 따라 공개석상에서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천사는 기쁘게 이 은총의 소식을 전하지만, 유대 문화권에 있던 마리아는 충격으로 받아들입니다. 1:26절 이하를 다시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수태되었다는 이 소식은 마리아에게 은총이 아니라 날벼락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깜짝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 된 것인지 생각합니다.(1:29) 그리고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입니다.”(1:34) 이 반문을 듣고 천사가 이것은 성령의 임하심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이내 순종 하였고, 받아들입니다. 물론 결론은 여자로 난 자 중 이와 같이 복 받은 여인이 없을 정도의 은총과 축복이 됩니다.

마리아가 보여준 놀람, 사색, 반문, 순종, 축복이라는 다섯 가지 여정은 믿음의 자녀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신앙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고 말씀하시는 방법들은 다양합니다. 때로는 성서의 말씀과 기쁨의 사건으로, 때로는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도 말을 걸어오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누구나 받아들이기 힘들어 놀랍니다. 그리고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야 하는지 반문합니다. 이런 반문은 반드시 필요합니다그러나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런 다음 순종의 자세로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자는 은총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묵상 할 대목은 아이를 출산 한 이후에 올, 은총과 축복의 기쁨이 아니라 아이를 뱃속에 담고 있는 동안 번민하고 있던 마리아에 대한 문제입니다.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나누어봅시다. 질문부터 해 볼까요? 여러분은 마리아 나이가 얼마나 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보통 마리아를 머릿속에 떠올리라고 하면, 아주 현숙한 여인을 떠올립니다. 중세 종교화나 성당 앞마당에 세워둔 조각상이나 또는 로마 바티칸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의 아름답고 성숙한 여인이 그것입니다그러나 우리가 시대적 배경을 조금이라도 생각해본다면 이와 같은 생각들은 모두 근거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마리아 나이는 최대 14, 최소 12세입니다. 처녀가 아니라 우리로 말하면 여중생 정도의 소녀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몇 가지 단서가 있습니다. 시대적으로 이때는 로마의 식민지 시대였다는 것이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우리도 일제 강점기나 병자호란 당시 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찍 결혼 시키는 조혼이란 것이 성행했습니다. 이 때도 상황은 똑같습니다. 제가 14세라고 말씀드린 것은 사실 최대 14세입니다. 최저는 12세입니다최저 12세라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남자가 12세가 되면 그 동안 가정에서 교육 받은 율법의 내용들을 성전 제사장들과 율법교사들 앞에서 검증 받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 시험에 통과하면 성인으로 인정받습니다. 성경을 보면 유월절에 예수님이 성전에 올라갔다가 일 주일 간 부모를 잃어버린 사건을 만나게 되는데, 그 때가 바로 예수님 나이, 12세입니다. 남자들도 그렇지만 여자들의 경우엔 12세를 넘어 최대 14세 정도가 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신체적 성징들이 나타납니다.

이때를 기준으로 힘없는 유대인들은 미리 정혼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됩니다. 12세 이상이면 이미 율법의 기준으로 보아도 성인이고, 신체적으로도 문제가 없습니다. 더 큰 이유는 부모들이 아이를 외국인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조혼을 시킵니다. 이게 바로 당시 상황입니다마리아로 상징되는 당시 유대 땅의 힘없는 여자 아이들의 상황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을 수태고지를 받는 마리아의 나이를 최소 12세 최대 14세로 추정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처녀 마리아라고 부르는 호칭은 어쩌면 소녀 마리아로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그 어린 소녀가 임신을 했다는 것은 스스로 견디기 힘든 사건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 때문에 마리아는 어디로라도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떠난 곳은 천사가 일러준 곳, 고향 나사렛에서 약 120Km떨어진 친척 엘리사벳의 집입니다. 그 먼 길을 혼자 가는 동안 마리아의 머리와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가다가 모진 생각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천사를 만났고, 그 음성도 들었지만 혼자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가 마리아를 짓눌렀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자갈밭, 수풀, 산골을 몇 날 몇 일 걸어 산골 촌 동네를 찾아갔습니다. 자그마치 120Km입니다그런데 이 모진 여행 끝에 기쁨이 기다립니다. 친척 엘리사벳을 만났을 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나이 들어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 엘리사벳의 배가 천사의 말대로 이미 임신 6개월이 되어 불룩한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만난 두 여인은 천사의 말이 사실인 것을 확인하고 기쁨으로 노래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42절부터 나오는 엘리사벳의 노래, 47절부터 나오는 마리아의 찬가입니다그러고 보면 하나님의 사건이라는 것은 참 놀랍습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될 사람에게 아이를 갖게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라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게다가 더욱 복 된 소식은 마리아가 48절에서 노래하듯 하나님께서 비천한 자를 돌보신다는 점입니다마리아는 스스로를 비천한 여종으로 소개합니다. 여기서 여종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실은 여자를 가장 천박하게 부를 때 사용되던 용어가 본래 쓰였습니다. 그래서 여종이란 단어보다 계집이라는 용어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마리아가 자기를 비천한 계집으로 고백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의지 할 수 없었던 자기 처지, 누구에게도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는 자기 처지를 하나님이 돌보셨다는 감격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감격과 감사의 찬송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사건은 한 개인에게 머물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찬가를 조목조목 묵상하며 내려가 보시기 바랍니다49절 부터입니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교회 다니는 많은 분들이 한 가지 오해하시는 게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관심을 끊고 구원에 대한 이야기만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나 사회 문화가 아무리 부조리하고 불의와 부정이 판을 쳐도 세상일에 대해서는 눈과 귀와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합니다.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강단에서 하면 종북좌파, 또는 구원도 모르고 성령의 역사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어느 정도 일리도 있고, 이해도 가는 말씀들입니다. 왜냐하면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는 북한의 추종자가 되어서도 안 되며, 여당이나 야당의 한 쪽 편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두 공감하듯이, 설교자의 의무이자 소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준은 분명합니다.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과연 세상 정치 문화 사회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을까요오늘 마리아의 찬가를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힘센 팔을 들어 올리십니다. 그리고는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위에서 내리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서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기가 그 자리로 올라서려는 사람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묘히 왕 노릇하는 자들입니다. 더 쉽게 말해 종교기득권을 뜻합니다.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신다고 했는데, 누구를 말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세상 권세를 이용해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목민의 자세를 잃어버리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탐관오리와 권력에 아부하는 모든 이들을 뜻합니다. 이런 자들 머리 위에 하나님의 힘센 팔이 헴머가 위에서 떨어지듯, 세차게 내리친다는 것이 마리아의 찬가입니다반대로 대접 받지 못하고 비천하게 내침 당한 사람들, 가난하고 주린 사람들을 하나님은 배불리 먹이고 세워주신다고 합니다그렇게 본다면 마리아의 찬가는 아주 정치적인 발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를 종북이니, 좌파니하며 매조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내용은 성경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예수님도 종북이고 좌파가 되어버리는 우스운 꼴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 대한민국을 돌아봅시다. 남과 북의 갈등은 전라도와 경상도라는 동과 서의 갈등으로 변했고, 좀 지나자 좌파와 우파라는 사상적 갈등의 시기를 지났습니다. 격동의 민주화시기를 지나자 이젠 위 아래라는 노사갈등, 세대 간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거룩한 하나님의 말씀마저 우리 시대의 교회는 그런 식으로 처리해버립니다. 아니오. 하나님은 절대로 남북, 동서, 좌우, 위아래, 그 어느 편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에 선 자의 편입니다. 마리아도, 예수님도, 신앙의 위대한 선조들도 모두 이 기준에 따라 세상의 어느 한 편을 들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고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언제 어디서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일상의 자리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생명의 가치를 가장 최선의 가치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이 기준이 세월호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요, 청와대와 여의도, 광화문, 대한민국 용산에서 열 다섯 번이나 비밀리에 진행된 미군의 탄저균 실험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안경이며 반응의 척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진짜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이 시간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이것 하나 만큼은 꼭 기억하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해봅시다. “성찬의 기억!”

너희가 이것을 먹고 마실 때 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 기념이라고 번역된 ‘anamnesis’는 단순히 머리로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새겨 삶으로 우려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가 방금 성찬의 기억이란 말의 뜻은 여러분의 일상이 성찬의 되새김질이 되자는 뜻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죄와 죽음, 악마의 힘을 이기고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루터의 대교리문답)

왜냐하면 우리가 매주일 나누는 성찬이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이것은 내 몸이고, 내 피니 너희가 이것을 먹고 마실 때 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 우리는 매주일 성찬을 나눕니다그리고 저는 제단 앞으로 나온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떡을 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당신을 위한 주님의 몸()입니다.” 그 때 저와 여러분 사이엔 떡이 놓입니다. 그 때 여러분과 저의 눈은 서로를 쳐다보는 게 아니라, 우리 가운데 놓인 떡을 바라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한 가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나의 관심과 나의 기쁨과 나의 아픔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떡을 공유하는 당신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렇게 우리를 하나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떡을 통해, 그 너머의 사람을 봅니다.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의 눈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삼아 사람과 세상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악한 것에 눈감는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은 악한 것으로 보고, 선한 것은 선한 것으로 기뻐할 줄 아는 눈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 여러분은 어떻게 떡을 받습니까? 두 손을 모아 받습니다. 5:6-7을 보면, 하나님의 어린 양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게 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떡을 받기 위해 모은 두 손은 바로 이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오른손이 위로 가야 하느냐 왼손이 위로 가야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주님의 몸을 받아드는 저와 여러분의 손이 하나님의 보좌라는 사실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손이 그렇게 거룩한 손이라면 이 손을 세상에서 어떻게 써야 하겠습니까? 이웃을 비난하는 손가락, 폭력을 휘두르는 손, 불쌍한 자의 탄원을 거부하는 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손이 하나님의 보좌로 쓰이는 손이라면 우는 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손, 쓰러진 자를 세워주는 손, 더러운 것을 닦아주는 손, 약한 자를 잡아주고 돕는 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먹는 우리의 입은 어떻습니까? 그 입도 역시 거룩한 입이 되어 악독을 물리치는 입, 불의와 부정부패를 막하서는 입, 비난과 불평이 아닌 선하고 희망을 만드는 입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살과 피를 소화시킨 우리의 배도 거룩한 마음을 품는 배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의 기준은 주님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찬을 함께 나누는 저와 여러분의 귀, , , , 배가 모두 은총이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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