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 오해하지 않기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 오해하지 않기
  • 엄경희
  • 승인 2017.12.14 08: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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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새물결플러스, 2017년
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새물결플러스, 2017년
김요한, 지렁이의 기도, 새물결플러스, 2017년

얘들아, 우리 가족이 조만간 두바이 공항에 다 같이 있게 될 것 같아!”

점심을 차리다 뜬금없이 내뱉은 나의 말에 아이들의 눈이 똥그래졌다. 당시 남편은 사우디에 출장을 가 있었고 우리 가족이 사우디로 가게 될 것이라고 전혀 생각조차 못 했던 때이며 일곱 식구 대가족이 비행기를 탈일은 더더욱 꿈조차 못 꾸던 때였다. 두바이가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비행기를 타고 낯선 나라에 가게 될지 모른다는 엄마의 말에 호기심을 만빵 부풀리며 질문을 쏟아냈다.

우리 여행가기로 했어?”

아니~~~!”

근데 엄마가 어떻게 알아?”

그냥 그런 그림이 보였어.”

나의 대답에 아이들은 이 웬 황당한 소리인가 의구심이 이내 얼굴에 한 가득이었으나 워낙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이라 해외로 여행을 간다는 꿈이라도 꾸는 것에 아주 행복한 얼굴이었다. 나 역시 점심밥을 차리다 우리 가족이 두바이 공항에 같이 있게될 것이란 예감이 너무나 강하게 마음에 느껴져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재미삼아 아이들에게 말을 한 것이었다. 워낙 뜬금없는 소리이니 꼭 맞아야 할 필요도 없고 꿈이라도 꾸고 상상만 하는 게 어디냐 싶어 아무 생각 없이, 정말 재미있으라고 가볍게 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사우디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급박하게 남편과 우리 가족의 사우디 파견이 결정났고, 우리는 진짜 몇 달 후에 두바이를 경유하여 사우디에 가게 되었다. 두바이 공항에서 아이들은 마냥 신기해했다. 진짜 엄마가 얼마 전에 뜬금없이 한 말이 현실로 이루어졌으니 말이다.

우리 가족이 사우디에 오기로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초록 산을 너무나 좋아했다. 초록 산이 하나도 없는 깡사막 땅에 정말로 가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 교육하기 좋은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나 유럽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하필 사우디냐 말이다. 그래서인지 하나님께서는 남편이 사우디로 출장을 다니는 동안 말씀으로 우리 가족의 마음을 단단히 준비시키셨다. 성하 수하와 창세기를 어른 성경으로 같이 공부하면서 아브라함을 알지 못하는 땅으로 부르신 그 부르심이 또한 우리 가족을 향한 부르심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하셨다.

그 뒤로 사우디 비자를 받기가 어려워 집을 내 놓고 사우디로 출발하기까지 50일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유랑 생활을 할 때도 하나님은 출애굽 말씀을 통해 우리 가족이 반드시 출한국(?) 하리라는 말씀을 정말 구체적으로 주셨다. 사우디 오기까지의 쉽지 않은 여정과 그런 세밀한 말씀의 인도가 있었기에 점심밥을 차리며 강하게 공상처럼 스친 그림이 시간이 갈수록 가볍게 여겨지지 않았다. 정말 현실이 되고나서는 더욱 그랬다.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신거구나!’

나는 대학시절, ‘지성 사회의 복음화를 모토로 하는 IVF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기독교 서적 읽는 훈련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받게 하고 예배와 영성에 강조점을 두고 있던 예수전도단(YWAM)에 다른 발 하나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IVF 리더였던 나는 휴학을 하고 예수전도단에서 하는 DTS 훈련을 받으러 캐나다로 갔다. 지식으로 뿐 아니라 하나님을 모든 면에서 충만히 누리는 게 너무 좋았다. 캐나다 호수에 서서 산과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도, 맛난 음식을 먹으며,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들으며, 별을 보며 언제든 내 마음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나는 누리고 맛보고 충만히 경험했다. 행복했다. 다른 무엇이 아닌 하나님 자체가 너무 좋았다. 아빠 하나님이 너무 좋았다.

늘 가까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행복하게 누리고 있던 나에게 예기치 않은 큰 혼란이 찾아왔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굳게 믿은 것이 실제와 맞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생각한 경우가 100% 다 맞았던 것은 아니다. (그런 기대도 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 금식 기도하며 십자가의 비워짐과 자기 부인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던 중에 받은 말씀이 실제와 다른 것은 나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내 평생 내 뜻을 가장 많이 비우려고 몸부림치며 기도할 때 분별한 하나님 뜻이 내 인간적 뜻으로 왜곡되었다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듣는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단 말인가? 즉 완벽하신 하나님은 무오하게 말씀하시더라도 죄인인 나는 그 말씀을 순전하게 들을 수 없다는 사실 앞에 깊은 절망을 느꼈다. 송신자이신 하나님이 아무리 완전하셔도 수신자인 인간이 망가졌기에 완벽한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었다.

영적 혼란은 영적으로 풀기 어려웠다. 나는 당시 꿈에 천사가 나타났더라도 그 말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말씀을 받는 내 귀와 눈, 특별히 마음과 영혼이 이렇게 불완전하고 혼탁할진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을 수 있겠는가? 그때부터 나는 이성과 논리에 매달렸다. 나의 문제를 영적으로 풀 모든 타당성을 상실했기에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해석하려는 작업에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이성과 논리로 어떻게 땅에서 하늘에 이르겠는가? 나는 이성과 논리로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다만 더 날카로워진 이성의 렌즈로 내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모순된 존재인지 더 보게 되었을 뿐이다.

자연스레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개인적 자유가 거의 없는 임신, 출산, 육아로 15년 세월이 흘렀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아바 아버지였다. 그러다 사우디에 오면서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유달리 선명해졌다. 주기적으로 이 땅을 벗어나고픈 가볍지 않은 향수병에 시달리면서도 나름 이 땅을 씩씩하게 살아온 4년 넘는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왜 하나님이 이곳에 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그토록 분명하게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말씀해 주셨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에 있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이만큼 버틸 수 있었다. 하나님도 그것을 아셨기에 여러 방식으로 말씀하셨다고 믿는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바 실제와 맞지 않아 나를 혼란케 했던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20여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거치며 더 큰 그림으로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전적으로 타락한 내 자신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다. 다만 하나님은 그런 죄인과 소통하시는데 실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다른 차원으로 받아들이고 믿게 되었다.

김요한 목사님의 지렁이 기도는 이렇게 서서히 회복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듣기에 대한 내 소망에 불을 지펴 주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자리에서 나는 성령님의 실제적인 도우심을 힘입어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한다. 평소 나의 기도에 관한 이해가 이 책을 통해 더욱 견고해졌다. 문자나 지식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마치 엄마인 내가 우리 아이들 삶의 일거수일투족을 참견하고 잔소리하듯 내 삶의 모든 구체적인 부분에서 관여하시고 말씀하시는 실제적인 하나님을 누리는 자의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 새삼 깨닫고 그 축복을 더욱 누리고 싶은 소망이 일게 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그 이면에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함이 있다는 의미라고 믿는다. 하나님이 내 바램을 들어주시는 분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그 하나님이 좋아 기도하는, 그렇게 서로 좋아 당연하게 대화가 오고 가는, 너무나 하나님을 사랑하여 말씀하신 것은 어떻게든 순종하고픈, 혹여나 자기 마음의 인간적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과 뒤섞일까 노심초사하며 성실하게 자신을 살피는, 그렇게 저자가 말하듯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관계를 풍성히 누리는 그런게 아닐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저자의 이야기에 가해지는 비판에 며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왠지 이 책을 쓴 저자 뿐 아니라 나에게 지금도 분명히 말씀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부당하게 왜곡되고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 자기를 안전하게 인도하는 성실하고 믿을만한 목자의 목소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따르는 연습을 매일 반복했기 때문이다. 오랜 사귐을 통해 주님의 말씀하심을 아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과의 오랜 교제와 기도를 통한 친밀한 우정이나 관계를 배제한체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단의 소리를 들은 것에 하나님 음성 듣는 것을 비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 속에 그 뜻을 성도에게 알리시는 성령의 역사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하나님이 무엇을말씀하셨냐 보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자체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일방적으로 나만 말하는 것이 어떻게 교제인가? 하나님이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듯 하나님도 하나님의 이야기를 내가 듣기 원하지 않으실까? 그것이 사귐이요 대화요 교제요 곧 기도가 아닐까?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듣고 싶다. 그것은 내게 닥친 모든 일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적 인도를 정보 차원에서 듣고 싶거나 성하의 아토피 치유 같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을 바래서가 아니다. (물론 나는 기도를 통해 이런 인도와 도우심을 실제적으로 간절히 구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 자체에 대한 갈망이다. 인격적인 깊은 친밀함과 교제를 빼버리면 하나님 음성 듣는 사람은 무당이나 점쟁이가 되어 버린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서 그 친밀함 가운데 하나님이 들려 주시는 음성을 듣는 이에게 이보다 더 모독적이고 상처가 되는 말은 없을 것 같다.

하나님이 뱃속에 아기가 딸이라고 말씀해주시는 게 뭐가 그리 이상하고 위험할까?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당연히 아는 이야기를 해주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이야기가 자연스레 오갈 수 있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빼버리고 그런 정보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에만 초점을 맞추어 무당이 점치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게 내게는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을 뿐더러 잔인해 보인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리고 직접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는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만나고 알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내가 믿는 바요 내가 누리는 기도다. 하나님을 향한 내 사랑이 실제적인 이유다.

이 글을 쓸까 많이 망설였다. 영적 체험이나 비밀을 본의 아니게 떠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한 이로 인해 나도 무당 취급을 받게 되지는 않을지 두려움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이 책의 저자와 생각이 똑같은데 많은 비판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만 있자니 내 자신이 너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돌을 맞는 게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고나 할까? 이제 좀 마음이 편하다. ~~~~

 

글쓴이 엄경희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살며 다섯 손가락 꿈나무 5남매를 기독교 독서 중심의 홈 스쿨하는 엄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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