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예루살렘은 3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수도?
[팩트체크] 예루살렘은 3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수도?
  • 김동문
  • 승인 2017.12.13 00:0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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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다인종 다종교 도시였다
동예루살렘의 성전산
동예루살렘의 성전산

 

예루살렘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성지였다?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였다? 그렇지 않다. 

예루살렘은 3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수도였으며 다른 어떤 민족의 수도였던 적이 없다베냐민 네탄야후 이스라엘 총리가 지난 10일에 유럽 순방 중에 한 발언이다. 이보다 앞선 지난 6(현지시각)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다. 이는 현실에 대한 인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선언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맥락의 신념을 가진 한국과 미국의 복음주의 진영의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 말은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다 클린 말일 뿐이다. 단순한 지적부터 시작해본다. 예루살렘은 다윗 시절에 가서야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였다. 그러나 다윗 이후 솔로몬을 지나 르호보암에 이르면서 남북 분열 왕국을 자초했다. 이후 예루살렘은 남왕국 우대의 수도였을 뿐이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수도가 몇 차례 바뀌었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대의 멸망 이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적이 없다. 여전히 남왕국 후예들에게 정신적 수도였는지를 모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앗시리아, 바벨로니아, 그리고 그 뒤를 이어간 그 땅의 종주국들이 지배하는 도시의 하나였을 뿐이다.

 

동예루살렘의 다마스커스 문 앞 광장
동예루살렘의 다마스커스 문 앞 광장

 

예루살렘에는 유대인만이 살고 있었다, 유대인이 주를 이루었다? 그렇지 않다.

예루살렘이 인종적으로 유대인들의 수도였다는 논리도 부적절하다. 논리적, 시대적 비약을 잠시 해 본다. 1세기 초반에 이미 예루살렘 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구성원들은 유대인들만의 공동체가 아니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 지역을 포괄하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중심이 예루살렘 지향성을 갖고 있었다. 예루살렘 교회도 좁은 의미의 유대주의나 유대인 중심의 공동체가 아니었다.

이후에 이어진 4세기 초 이후의 기독교 제국 시대 하에서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정치적 수도는 아니었다.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른바 지금 형성된 그런 수준의 성지도 아니었다. 이 시기를 맞이하면서 유대인이 주를 차지하던 예루살렘의 인구 비율이 변하기 시작했다. 비잔틴 제국에 이르러서 성역화가 진행되면서 예루살렘 성지화가 강화되었고, 기독교인의 유입이 많아진 것에서도 그 원인을 짚어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시기에도 예루살렘은 다인종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종교적으로 무슬림도 유대교나 기독교와 예루살렘을 공유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의 오늘날 성전산에는 어떤 특별한 종교적 시설물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비잔틴 제국의 중심지도 물론 예루살렘이 아니었다. 그곳은 콘스탄티노플 지금의 터키의 이스탄불이었다. 초기 기독교 세계는 예루살렘교회, 알렉산드리아교회, 안디옥교회, 소아시아 교회 등을 중심으로 한,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한 세계와 연대 또는 갈등을 빚기도 했다. 기독교 세계의 주도권 다툼의 한 축으로 예루살렘이 자리했을 뿐이다. 그 시대에 예루살렘은 다인종 다문화를 갖춘 도시의 하나였다. 특정 인종, 특정 종교인의 성지는 아니었다.

이후에 이뤄진 아랍 이슬람 제국에 의한 중동 지배 당시에도 예루살렘은 다인종, 다종교 공동체를 이어가고 있었다. 629년 아랍 이슬람 제국은 예루살렘을 비롯한 인근 지역을 지배했다.

692년 예루살렘에 황금 사원이 지어졌다. 이 황금 사원 건설은 이슬람이 더 이상 기독교와 유사한 종교가 아니라 새로운 종교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더 이상 로마나 페르시아 문명의 계승자가 아니라 알라에게 부여받은 새로운 제국의 출발을 선포하는 다소 정치적인 의미도 깔려있는 행동이었다. 이것은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의 성지 예루살렘을 두고 유대인과 무슬림이 때때로 갈등과 반목을 빚기도 했으나 그것이 언제나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겠다는 십자군에 맞서던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은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 등이 뒤섞여 살고 있던 다인종 도시였다.

2005년 상영된 리들리 스콧 감독이 만든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이 기억난다. “성지는 예루살렘도 아니고 화해가 이뤄지는 그곳이 바로 성지다는 내용의 대사가 떠오른다. 영화 안에는 성지를 어떤 특정 공간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던 시절의 고민이 담겨있다. 물론 보는 이들의 시선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 있다. 어쨌든, 십자군 전사의 이름으로 성지 예루살렘을 찾는 이들은 성지 순례를 통해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지름길이 필요했고, 명예와 부를 얻고자 했다. 현세와 내세의 복 모두를 추구하고 있었다. 십자군 이전 시대에도 그 이후에도 성지 예루살렘을 찾는 이들이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무슬림 인구 비율이 다수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1187년에 시작된 아이윱 이슬람 왕조에 의해 이슬람화하 강화되면서, 무슬림으로의 개종 인구가 늘어난 것이 큰 영향을 준 것이다. 이후 줄곧 이스라엘 독립 시기인 1948년 전후한 시기에 이를 때까지 무슬림 인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예루살렘
동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이른바 남유다 왕국 이후에는 다인종 다종교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은 영국이 지배하던 시절의 예루살렘 인구, 종교 분포 현황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Justin McCarthy의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1900년 이 지역의 주민 가운데 94%가 인종적으로 아랍계였다. 1914년 기준으로, 657000명의 아랍계 무슬림과 81000명의 아랍계 기독교인이 살고 있었고, 유대인의 인구는 59000명 정도였다. 전체 인구의 94%가 아랍계였고, 단시 6% 정도만이 유대인들이었다.

이스라엘의 독립 이후에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의 주민들의 인종과 종교 비율에 변화가 일어났다. 유대인 인구 비율의 증가는 이주에 따른 것이고, 아랍계 인구의 비율 감소는 추방과 이탈에 따른 영향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예루살렘이 지난 3000년간 이스라엘의 수도였다는 주장이나, 예루살렘이 유대인의 도시였다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 예루살렘은 다윗 시절은 물론 그 전후한 시기부터 이제까지 다인종 다문화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성경과 역사 자료와 맥락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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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행인 2018-05-11 09:26:54
새로운 크리스천 신문인것 같아서 우연히 들어와서 보고 있는데,

드림 투게더 뭐하는데에요?? 왜 이렇게 악의적인 기사들이 많죠? `틀린` 내용에도 댓글을 다는데, 계속 등록도 안되고, 이건 아니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