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훈] 깨어 있으라
[최주훈] 깨어 있으라
  • 최주훈
  • 승인 2017.12.10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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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3:33-37
Ilyas Basim Khuri Bazzi Rahib, 예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다(1684)
Ilyas Basim Khuri Bazzi Rahib, '예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다'(1684)

교회력으로 한 해의 시작인 대림절입니다. ‘오심을 기다린다라는 뜻의 대림’(待臨)은 원래 라틴어 ‘Adventus’(오심)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말은 로마 시대 때 황제가 개선장군으로 로마에 입성할 때 행진의 맨 앞에 선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치는데서 유래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 드라마에서도 이런 일을 종종 볼 수 있지요. 고려나 조선시대 왕이나 양반이 행차할 때 시종이 앞에서 게 섰거라, 누구누구 오신다!’라고 외쳤던 것과 매한가지입니다. 그런 소리가 들리면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에 조아리고 앉아 지체 높은 분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대림절의 의미도 이와 맞닿아 있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소망 가운데 기다리는 시기가 바로 대림절입니다. 대림절이 되면 성탄까지 4주간 매 주일 예배 마다 초를 하나씩 밝혀가며 우리의 소망을 더욱 크게 키워가게 됩니다. 대림절에 초를 켜고 기다리는 전통은 이제 어느 교회에서나 가릴 것 없이 익숙하게 되었지만, 그 기원은 19세기 초반 독일 루터교회 요한 힌리히 비헤른 목사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당시 독일 함부르크에 있던 비헤른(Johann Hinrich Wichern, 1808-1881) 목사님이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11월 말부터 매일 저녁 성탄전야까지 초 하나씩 켜나가며 아이들에게 성경의 이야기를 하던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총 5개의 초를 매주일 하나씩 성탄 전야 까지 밝힐 것이고, 마지막 다섯 번째 초는 성탄의 기쁨을 모아서 성탄 전야 예배 때 켜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완전한 성탄의 기쁨과 소망이 베들레헴 마구간이 아닌 바로 이 자리에서 밝히게 될 것입니다.

매 주일 켜는 초와 교회력 본문은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로서 첫 번째 초를 켰는데, 이 초는 종말과 심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력 본문들은 모두 종말이라는 다소 어두운 주제이지만 성탄에 가까울수록 밝은 복음의 말씀으로 기쁨이 증폭되는 것을 계속 해서 듣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보시면 성탄을 알리는 크리스마스 트리 역시 희망 없는 우리의 모습을 상징하듯 벌거벗은 모습입니다. 기껏해야 선악과를 상징하는 둥근 볼 몇 개가 전부입니다. 무척 초라하고 보잘 것 없지요. 그러나 이제 매주일 마다 희망의 장식을 더해가게 될 겁니다.

오늘 교회력 말씀도 이런 분위기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구약 본문인 이사야 64장 말씀은 이스라엘을 향한 주님의 심판과 그분의 강림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말의 심판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첫머리인 121절 이하에서부터 시작합니다여기 나오는 심판의 조건을 보면 부와 권력을 탐하면서 시작되지요. 물론 부와 권력, 그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가나안에서 누릴 풍요를 약속하신 적이 있고, 주변 민족들에게 굴복당하지 않을 힘을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부와 권력을 하나님의 자리로 올려놓은 것, 우선순위가 뒤바뀐 것, 그것이 심판의 주제가 됩니다하나님이 명하신 이웃사랑과 공의는 온데 간데없어지고,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재판을 불의하게 하고 약한 사람들의 재산을 갈취합니다. 두 가지 저울추를 한 주머니에 넣고 다녔고, 힘 있는 자를 위해 재판을 불의하게 진행했으며, 불의한 법을 만들어서 합법이라는 명목 아래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수탈하면서 저항하는 자들에게는 불법이란 이름의 주홍글씨를 새겼습니다.

백성들도 풍요와 다산, 즉 돈과 권력을 약속하는 바알 신에게도 재빨리 달려갔습니다. 돈만 벌수 있고, 부자가 될 수만 있다면 고통당하는 이웃의 외침 따위는 전혀 귀에 담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심판경고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와 권력을 너무 소중히 여긴 나머지 하나님이 이 세상의 기초로 삼으신 정의와 공평 같은 가치 기준은 뒷골목에 내쳐버리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 결과? 바로 예언자들의 심판경고였고, 종말의 선언이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략으로 초토화 되었고, 서기 70년에는 로마제국에 의해 예수님의 경고대로 돌 하나도 남김없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 내리는 참극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성전이 무너졌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삶의 주춧돌이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기댈 곳이 없는 민족의 절망 상황을 뜻합니다. 이것이 곧 그들에겐 하나님의 심판이고, 종말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심판 기사를 가만 잘 보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 권력, 성전.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고, 그 효과는 즉각적입니다. 돈과 권력이 있으면 삶이 즉각적으로 윤택해집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붙잡는 것 보다 효험 있어 보이니 큰 유혹이 됩니다. 성전도 그렇지요. 거대하고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저렇게 거대하고 웅장한 분이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렇게 눈에 보이는 성전의 주인인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전 건물이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었고, 결국 성전 건물이 로마군대에게 무너지자 하나님이 떠나 버린 것과 같은 멘붕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막13장 말씀이 바로 이런 배경아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가르칩니다. 마가복음이 쓰여지고 읽혀지던 시기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교회 공동체가 절망으로 치닫던 서기 70년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던 유대인들도 무너진 성전을 보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떠난 것으로 생각하고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들 생각에 이런 상황이야 말로 종말이었던 것이죠. 눈에 보이고, 몸으로 느끼는 모든 상황들이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 들고 있을 때입니다. 이 종말의 상황은 2천 년 전,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와 교회가 직면한 상황을 돌아보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것과 같은 심판과 종말의 징조를 보고 있습니다. 부와 권력이라는 맘몬을 우선가치로 삼는 이 시대에 하나님은 이 땅에 계신 것 같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느니 차라리 돈과 권력을 따라 줄서는 편이 더 나아보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대는 하나님이 그토록 명령하고 가르치셨던 공의와 정의,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고 나누는 삶이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시대입니다.

한 예를 들어볼까요. 포항 지진 때문에 많은 이재민들이 생긴 것을 우린 모두 알고 있습니다. 건물이 무너지고 아파트가 금이 가서 주민들이 날벼락을 맞은 듯한 상황입니다. 누구나다 가슴아파할 만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한 신문기사를 읽고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포항의 한 아파트에 투기꾼들이 몰려서 대피소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파트를 매입하고 있다고 합니다. 투기꾼들 입장에선 이 기회에 아파트를 매입해서 재개발 특수를 노려 한몫 챙기겠다는 심산입니다. 정의나 이웃사랑 그런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우리에게 그리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영악합니다. 세상 이치로 보자면, 이웃의 아픔을 돈 벌 호재로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영리하다고 우러러보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이치로 보자면, 무언가 잘못되어 있는 게 확실합니다. 이웃의 아픔이 돈벌이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신앙양심을 가지고 사는 게 바보짓처럼 보이기 일쑤입니다.

이런 일은 세상에 가득합니다. 정의롭고 공정해야할 국가기관과 양심에 충실해야 할 종교 역시 권력 앞에 공정성과 하나님의 공의,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곳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양심이 무뎌진 자들에게 정의는 그저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주머니에 돈을 채워주고 내 자리를 보전해 줄 수만 있다면 횡령혐의자건 성추행자건 사기꾼이건 상관없다는 식의 논리가 우리 주변에 횡행합니다. 세상 법에는 정의와 공의, 평등에 입각한 법이 존재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말로 바꾸어 말하면 한 주머니에 두 저울을 들고 다니는 자들이 태반입니다. 그러니 어디를 신뢰하며 살아야 할지 어떤 때는 막막합니다.

이렇게 삶이 막막할 때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종교를 찾게 됩니다. 최소한 종교만큼은 세상과 다른 곳이니 위로를 받을 만 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간 교회나 성당 절에 가서 실망하긴 마찬가지일 때가 다반사입니다. 상식을 넘어선 불법을 자행하고, 부와 권력을 대물림하는 것을 너무 당연히 생각하는 교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저런 곳에 하나님이 계시기는 한 것인지 자괴감이 듭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판단하실까요?

오늘 복음서 말씀의 앞 구절인 막13:28절을 보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는 주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지칭하는 무화과나무는 예루살렘 입성 때 성전 앞에 있던 저주받은 나무를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막11장부터 시작하는데, 13장에서 한 번 더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은 곧장 성전으로 들어가시지요. 그 이튿날 이른 아침 성 안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은 길가에서 입이 무성한 한 무화과나무를 보게 되고 이윽고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저주하십니다. 도대체 왜 주님은 아무 이유 없이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을까요? 원래 무화과는 여름에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나무를 보신 때는 3월 말에서 4월 초쯤 되는 시기입니다. 아직 열매를 맺을 시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이미 입이 무성합니다. 겉보기에는 열매를 맺고도 남을 만큼 그럴싸한데 열매는 없습니다. 그런 후 저주하시지요.

이것은 단순히 무화과를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이 저주를 통해 당시 종교행위는 화려하지만 껍데기만 남은 종교인들을 향한 저주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이 인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하나님을 세워놓고 저것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대림절 복음서 본문인 마가복음13장에서 가리키는 무화과 비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겉만 화려한 것을 쫓는 종교인, 돈과 권력을 뒤 따라다니는 종교꾼이 되지 말고, 정신 차리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설교시간에 졸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지러운 세상, 성전이 무너지고, 하나님이 떠난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욕망의 노예, 돈과 권력이라는 눈에 보이는 것들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삶의 가치는 뒤죽박죽됩니다. 그것이 바로 종말의 징조이고, 멸망의 전주곡입니다. 죄의 본질이란 본디 하나님의 자리사람의 자리가 뒤 바뀌는 자리바꿈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눈에 보이는 임시적인 것들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과 믿음을 삼키려고 우리를 노립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돈도, 잘 사는 것도, 힘도, 능력도 좋습니다. 그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세상 모두가 말하기 때문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 돈 버는 데 바빠서 정작 심판의 늪으로 잠겨 들어가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돈과 권력이 삶의 제1가치가 되다보니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신뢰가 상실되며 타인을 협력이 아닌 경쟁의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서로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구분하고 가르며 소외시켜 밟고 올라서야 할 대상으로만 여깁니다.

지금껏 한국 사회는 경제 성장이라는 우선가치 아래 앞만 보고 내 달렸지만 우리나라가 자살률, 청소년 정신질병 보유율서 세계 최고를 달리고 행복지수가 바닥을 치게 되었고, 매해 10대 청소년 중 최소 15만 명가량이 가출해서 안전 사각지대에 노출되고 성매매에 노출되고 있는 것이 우리 아이들의 현실입니다. 돈 버는 것에 온 인생을 다 바친 부모들의 땀과 눈물은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내 아이가 대화할 곳을 찾지 못하고 거리로 내몰려 육체와 영혼이 망가지는 현실은 과연 누구의 책임일까요? 분명한 것은 아이들 탓으로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아이의 성적은 기가 막히게 잘 알면서도 아이들의 친구 이름, 아이의 반, 번호는 모르는 부모의 책임은 얼마나 될까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대림절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대림절은 라틴어로 Adventus입니다. 그런데 이와 어원이 동일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Adventure라는 단어인데, 모험이란 뜻입니다. 이 단어는 오늘 우리에게 아주 좋은 깨달음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사랑과 공의 평화를 가져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를 믿음의 모험으로 초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험을 떠나는 탐험가의 하루하루는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탐험가는 위대한 발견을 할 수 있다는 소망으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미지의 땅으로 길을 떠납니다. 사람들이 우매한 짓이라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러나 모험가는 익숙하고 편안한 삶을 뒤로 하고 그렇게 정글 속으로, 사막 한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모험가는 자신의 여정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을 허투루 보내는 일은 없습니다. 숲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 작은 잎새의 흔들림에도 긴장하고, 바람의 냄새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일지 신경 씁니다. 그렇게 하루를 걸어간 후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오면 모험가는 안전한 자리에서 동이 트길 기다립니다. 그 다음 여정, 위대한 발견이 그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대림절, ‘깨어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와 같습니다. 밀림 속을 모험하는 탐험가는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 큰 소리에 현혹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모험가는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때론 확실한 것이 아니고, 때론 자기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험을 떠난 사람은 자신의 여행이 종착지에서 보물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었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바로 이런 모험을 떠났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오심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세상 흘러가는 대로, 눈에 보이는 임시적인 세계가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 길을 떠났던 것이 바로 성경과 교회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앙선조들의 삶입니다.

살다보면 때론 성전이 무너지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떠난 것처럼 절망이 우리를 덮칠 수 있습니다. 빛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 인생의 어둠이 우리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골고다 십자가 사건, 그리고 부활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떠난 것처럼 절망스럽고 의심 가득했던 그곳 한 가운데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모험을 떠나는 이들의 희망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대림절에 울려 퍼지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깨어 있으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저와 여러분을 일으켜 세우고, 빛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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