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영에 따라 정의를 실천하다
[곽건용] 영에 따라 정의를 실천하다
  • 곽건용
  • 승인 2017.12.10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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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5 - 로마서 1:16-17
Michelangelo Buonarroti, Jeremiah(1511), 시스틴성당, 바티칸시국
Michelangelo Buonarroti, Jeremiah(1511), 시스틴성당, 바티칸시국

 

때로는 국외자의 눈이 도움이 된다.

오늘 설교가 바울에 대한 연속 설교 1부 마지막 편이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간절히 기다릴지 모르지만 바울에 대한 연속 설교 2부는 내년 초에 이어가겠습니다. 자는 그 동안 연속 설교를 준비하면서 즐겁고 보람도 많았습니다. 여러분도 저와 같았기를 바랍니다. 어느 종교든 종교라고 하면 그걸 믿지 않는 사람은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기독교인이 아니면 이해하고 공감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고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긴 기독교인도 기독교를 제대로 모르는데 기독교인 아닌 사람이 기독교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느 종교든 국외자의 눈에는 비상식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때로는 종교 바깥에 있는 사람의 시각이 도움이 됩니다. 내부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바깥사람은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비기독교인 철학자들이 바울에 관해 쓴 책들을 참고한 까닭이 이것입니다. 저는 비기독교인 철학자들이 바울을 어떻게 보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이번에 제가 알게 된 것은, 기독교인에게는 너무도 당연해서 별 생각 없이 지나치는 것들이 국외자 눈에는 독특하게 보여서 깊이 파고든 경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격적으로 바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말하고 싶은 것 하나는, 깜짝 놀랄만한 새로운 사상이라도 그것을 내놓은 사람의 독창적인 생각은 극히 일부분이라는 점입니다. 아무리 새로운 사상이라도 그 안에서 독창적인 내용은 극히 일부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기존의 사상이의 반복이란 얘기입니다. 기존의 사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는 완전히 독창적인 사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의 사상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매우 독창적인 사상가임에 분명하지만 그가 쓴 텍스트를 읽어보면 대부분이 전통적인 기존사상입니다. 그것을 새롭게 해석한 내용을 포함하더라도 바울만의 독창적인 사상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그래서 정신 차리고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그의 텍스트에서 독창적인 내용을 찾아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 독창성이 바울 전문가보다는 비전문가의 눈에 더 잘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오늘 그런 경우를 하나 얘기하려고 작정했는데 시간이 허락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우선은 지난 주일에 얘기하다 중단한 정의에 대한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구약성서에서 정의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개념은 미슈파트쩨다카입니다. 이 말들은 비슷한 의미를 가진 말들로서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됐습니다. 우리말로는 대개는 정의공의로 번역됐고 영어로는 ‘justice’‘righteousness’로 번역됐습니다. 이 두 개념은 다양한 맥락에서 등장하지만 거의 예외 없이 상태를 표현할 때가 아니라 동작이나 행위를 표현할 때 사용됐습니다. 또한 이 개념들은 그 행위를 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주체가 하느님인 경우에는 억압받는 사람을 해방시켜서 자유를 주기 위해서 하느님이 사람의 역사에 개입하는 행위를 표현할 때 이 개념들이 사용됐고, 둘째로 주체가 사람인 경우에는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를 돌보는 행위를 표현할 때 이 개념들이 사용됐습니다. 주체가 다르더라도 의미는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스가랴 예언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 만군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미슈파트를 실천하여라. 서로 관용과 자비를 베풀어라.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을 억누르지 말고 동족끼리 해칠 생각을 하지 말라(스가랴 7:8-10).

이 밖에도 두 개념이 주어가 하느님이 됐든 사람이 됐든 모두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돌봐주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행위임을 보여주는 구절들은 일일이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등장합니다. 반면 이것이 제대로 실천되지 않았을 때 하느님이 이렇게 탄식하신답니다.

하늘을 나는 학도 제 철을 알고 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도 저마다 돌아올 때를 지키는데 내 백성은 내가 세운 미슈파트를 알지 못한다. 너희가 어떻게 우리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요 우리는 주님의 율법을 안다.’고 말할 수가 있느냐? 사실은 서기관들의 거짓된 붓이 율법을 거짓말로 바꾸어 놓았다(예레미야 8:7-8).

미슈파트를 모르면 새들만도 못하고 율법, 곧 하느님의 계명을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 언약의 가장 단순하면서도 기본적인 형식은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라는 선언입니다. 곧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느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야훼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구약성서의 율법은 이러한 언약관계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내용상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저 말고 누가 이와 같은 분류를 해놨는지 모르지만 좌우간 저는 이걸 책에서 배우지 않았습니다. 제 나름의 분류이므로 대단한 권위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첫째 부류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관계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계명이고, 둘째는 그걸 깨뜨렸을 때(예외 없이 이스라엘 쪽에서 깨뜨립니다) 회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계명입니다. 둘 다 언약관계를 유지하려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를 가능하게 만들어준 토대가 뭐냐 하는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관계를 깨뜨리지 않는 것도 중요하고 깨졌을 때 회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관계가 맺어지게 된 계기가 뭔지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것을 하느님은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 붙여 살이 않았느냐(출애굽기 22;20)?

너희는 떠돌이와 고아를 대할 때 미슈파트를 구부려 뜨려서는 안 되고 과부의 옷을 저당 잡아서도 안 된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일을 생각해보아라. 그런 너희를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건져내셨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명령하는 것이다(신명기 24:17-18).

야훼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언약관계를 맺게 된 근본적인 계기는 이스라엘, 곧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고 있었을 때 야훼 하느님이 그들을 해방시켜 자유롭게 만들어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야훼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노예들을 해방시켜주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켜 자유를 주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느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슈파트와 쩨다카를 실천하셨던 겁니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근본토대였습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를 이스라엘 사회에서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노예처럼 고통스런 삶을 살아가는 고아, 과부, 나그네를 돌봐주라는 계명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계명들 중 하나에 그치지 않습니다. ‘one among many’가 아니란 얘기입니다. 그들을 돌봐주라는 계명을 그렇게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미슈파트와 쩨다카의 실천이며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의 근본토대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반복하지만 이것은 율법의 한 항목이 아니라 율법 전체의 존재 이유이자 근본토대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실천하지 않고 믿음만 가지면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정의의 실천과 무관한 믿음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정의를 실천하지 않아도 믿음만 가지면 하느님이 의롭지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해주실 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앞이든 사람 앞이든 의로워지지 않고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말이 이상하지만 무슨 뜻인지 아실 겁니다. 정의를 행하지 않고 의로워지는 길은 있을 수 없고 의로워지지 않으면 하느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미슈파트와 쩨다카를 실천하지 않아도 하느님이 의롭다고 인정해주신다는 게 아니라 믿음 없이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미슈파트와 쩨다카를 실천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미슈파트와 쩨다카의 실천을 웨이브해준다는 얘기가 아니라 믿음이 없이 율법의 실천만으로는 정의로워질 수 없다, 그렇다면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율법과 정의

정의에 대한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는 율법과 정의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바울은 왜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정의로워질 수 없다고 주장했을까요? 율법이 뭐가 문제이기에,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기에 그것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정의로워질 수 없다는 걸까요? 많은 기독교인이 율법을 나쁜 것으로 오해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느님나라 복음을 선포하신 이후로는 율법은 지킬 필요가 없어졌을 뿐더러 나쁜 것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율법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율법을 누가 주셨습니까. 하느님이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이 주신 율법이 어떻게 나쁠 수 있느냐는 게 바울의 주장입니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주장은 대략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은 율법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갈라디아 323-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가 이제는 개인교사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갈라디아 3:23-25).

여기서 개인교사로 번역한 말의 그리스 원어는 페다고그인데 이 말은 그레코-로만 사회에서 여섯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 어린아이의 교육을 맡았던 노예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아이들이 등하교를 할 때 가방을 들어주는 등의 자질구레한 일도 맡았지만 품행이 올바르지 않은 아이를 꾸중하기도 했고 완력으로 제압해서 잘못된 행동을 고쳐주거나 벌주는 등의 적극적인 역할도 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이 이런 역할을 했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곧 믿음이 올 때까지 그랬다는 겁니다. 그는 분명 율법의 긍정적인 역할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한계 또한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믿음(그리스도)이 올 때까지가 그 한계입니다. 믿음이 온 후에는 더 이상 율법은 할 역할이 없습니다.

둘째는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는 부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나누고 구별하고 구분하는 것은 예수님의 하느님나라 복음이 절대 인정하지 않는 악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또는 사마리아인을 차별하는 유대 권력자들의 행태를 엄하게 꾸짖지 않으셨습니까.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역시 율법이 기본적으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을, 더 나아가서 주인과 종의 차별과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율법을 부정적으로 봤던 겁니다. 전에도 한 번 얘기했지만 갈라디아서를 보면 바울은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밥을 먹다가 야고보가 보낸 할례 받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오자 그들을 피해서 피신한 일을 두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올바로 걷지 않았다며 그를 가혹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믿음으로 인해 열린 새로운 세상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주인과 종,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는 일이 심각한 악으로 받아들였는데 바로 율법이 그런 차별을 가능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죽이라고 했고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대해서 죽은 사람들이라고 역설했던 겁니다.

 

율법 아닌 믿음으로! 영으로! 은총으로!

이제 율법에 대한 바울의 세 번째 생각을 얘기할 차례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제일 중요하고 바울만의 독특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율법의 부정적인 점인데 바울은 율법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세상 앞에서 주체로 스스로 서지 못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믿음이 오면율법이 페다고그역할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믿음그리스도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믿음이 오면이란 말은 그리스도가 오면과 같은 뜻입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성령 안에서라는 말과도 같은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성령 안에서 산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말과도, 그리고 은총(카리스마) 안에서 산다는 말과도 같은 뜻입니다. 바울은 같은 의미를 이처럼 다양하게 표현했는데 이것들을 모두 율법이라는 비빌 언덕또는 매개수단이 없이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주체적으로,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오직 은총으로!’(Sola Gratia)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세계이고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인 겁니다.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했을 때 새 것이 바로 이걸 가리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직은 이게 무슨 뜻인지, 바울 신학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당연합니다. 여러분만 그런 것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에 대해서는 바울 연속설교 2부에서 더 얘기하려고 합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할 때 뭔가 기댈 것이 있어야 안심합니다. 율법이 됐든 하느님의 말씀이 됐든 뭔가에 기대고 의지해야 불안감을 떨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만일 신앙생활을 하는데 아무 것도 의지할 게 없고 홀로 스스로 서야 한다면, 주체적인 자아로 서야 한다면, 바울은 그것을 은총이라고 말했다면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도 뭔가 의지하는 게 있어야 하지 않나...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데...’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스스로 아직은 페다고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땅히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는 아직 딱딱한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바울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연하고 부드러운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거기 머물려 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또한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섰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성장했으면 더 이상은 퇴행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하고 바울 1부를 마치겠습니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주의 깊게 읽지 않았던 부분인데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8-10).

널리 알려진 유명한 구절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구절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말씀일 겁니다. 뭐 이상한 점 없습니까? 이 구절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발견하지 못했다면 유리가 율법에 대해 너무 익숙하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한 율법학자가 예수께 와서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라고 되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이 얘기와 비교하면 로마서 13장의 바울의 말씀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 정도 얘기했으면 찾아내야 하는데 말입니다. 어디가 이상한가 하면, 바울은 율법을 요약할 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라는 말을 빼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가지 항목 가운데 전반부인 하느님 사랑을 얘기하지 않고 후반부인 이웃 사랑만 얘기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바울이 실수로 전반부를 빠뜨렸을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바울과 같은 사상가가, 희랍사상뿐 아니라 유대교에도 정통했던 학자가 이 유명한 구절 중 중요한 부분을 실수로 빼뜨렸을 리 없습니다. 그럼 왜? 여기에 무슨 특별한 뜻이 있을까요?

 

글쓴이 곽건용목사는 LA 지역의 나성향린교회 담임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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