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장례식, 그리고 영화 '의형제(2010)'
아브라함의 장례식, 그리고 영화 '의형제(2010)'
  • 이인엽
  • 승인 2017.12.0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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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에 대한 묵상 (1)

이 글을 쓰게된 것은, '화해라는 주제로 연말에 미국 메릴랜드에서 열리게 될 킹덤 컨퍼런스 2017 https://kingdomusa.org/2017의 선택 강의를 준비하면서 였다.너무나 좋은 주제라는 생각에 반가웠지만, 문득 참 익숙하면서도 막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화해라는 주제를 제대로 배우거나 공부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설익을 수 있지만 떠오르는 고민과 성경묵상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1. 이삭과 이스마엘의 재회

아브라함은 자기가 받은 목숨대로 다 살고, 아주 늙은 나이에 기운이 다하여서, 숨을 거두고 세상을 떠나, 조상들이 간 길로 갔다. 그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막벨라 굴에 안장하였다...”- 창세기 25:8-9 (새번역)

화해라는 주제와 관련된 성경구절들을 한번 생각해 보았는데, 가장 먼저 떠오른 구절이 이 말씀이었다. 아브라함으로 부터 시작되는 4대에 걸친 가족사는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 중 하나인데, 시대를 초월해 반복되는 가족관계, 인간관계의 원형들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받은 아브라함의 직계인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에서 부터, 오늘날 뉴스를 장식하는 21세기 종교간, 인종간 갈등의 뿌리를 더듬어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흥미롭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임신하지 못하는 사라가 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게 하고, 오만해진 이집트 출신 여종 하갈과 어린 이삭을 희롱하는 이스마엘을 내어쫓는 것, 기진한 하갈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서 구원하시는 장면 등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이야기지만, 위의 장례식 장면은 그 묘사도 매우 간단하고, 한 번도 설교에서 언급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스마엘과 이삭이 다시 만난 장례식의 장면은 어떠했을까?

목판화,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1794–1872), "Die Bibel in Bildern"(1860)
목판화,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1794–1872), "Die Bibel in Bildern"(1860)

이런저런 장례식의 경험들을 생각해 보면, 장례식은 고인을 기억하며 슬픔을 함께 하는 위로의 자리가 될 수도 있지만, 복잡한 인간의 감정과 이해관계가 흘러나오는 기묘한 시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 속에, 부모나 형제에 대한 원망, 후회, 회한 등이 터져나와 감정이 격해지기도 한다. 고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과 잘잘못을 따지면서 갈등이 생기기거나, 유산이나 조의금을 분배하는 문제로 싸움이 나기도 하고, 심지어 원수가 되기도 한다. 슬픔을 추스르기는 커녕, 손님을 맞느라 바쁘기도 하고, 체면과 위선, 허세가 충만한 장소가 될 수도 있다. 첫째 아들이지만 서자라는 묘한 상황, 그리고 자신과 어머니를 쫓아낸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스마엘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자기 동생이지만, 장자의 자리와 가족의 부를 차지한 이삭을 보며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장례식은 남은이들에게 고인의 삶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인간의 한계, 인생의 덧없음, 그와 더불어,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를 질문하면서, 영원에 대한 소망과 절대자와 진리에 대한 갈망을 느끼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적어도 죽음 앞에서는 우리는 겸손해 질 수 밖에 없고, 옷깃을 여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서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도 있다.

전도서 7:2~4(새번역)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얼굴을 어둡게 하는 근심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다.

예전에 미국에 사는 한 분과 이야기 하다가, 형제가 많은 집의 막내로 자란 자신이 수년전 미국으로 이민 올 때, 아버지가 이미 아프셨는데, 미국에 온 후 가족들과 연락이 뜸해졌고,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형제들이 자기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담담하게 이야기 하는 그분의 모습 속에 깊은 비통함과 씁쓸함이 느껴졌었는데, 뭔가 큰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럴 줄은 몰랐다는 듯한 심정은 아니었을까.

이삭과 이스마엘의 화해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온유하게 그려진 이삭의 성품상, 이스마엘을 형으로 대우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두 사람이 함께 아버지를 장사지내는 짧은 구절, 그리고 바로 이어진 이스마엘과 이삭의 족보를 통해, 두 사람과 그들에게서 나온 후손과 민족들을 이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한 아버지의 아들인 형제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최소한의 도리를 보여주는, 장례를 함께 치르는 형제의 이 모습은 참 인상적이다. 이것이 온전한 화해는 아닐 지언정,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2. 영화 의형제의 차례상 장면

이 성경구절과 연관되어 기억나는 영화가 있는데, 송강호와 강동원이 출연한 의형제(2010)’이다. 남한의 국정원 요원으로 일하다 임무 실패로 해고된 송강호와 북한의 남파간첩으로 활동하다 버림받은 강동원이 각자의 목적으로 가지고 서로를 이용하려고 동거를 하는데, 두 사람이 비로서 의형제가 되는 시점이 있다. 추석을 맞아 두 사람이 차례를 지내는 장면이었는데, 짧지만 무척 인상적이었다. 차례상을 차리다가 강동원이 간첩임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송강호가 내비치자, 당황한 강동원은 신고할 거냐며 칼을 휘두르는데, 송강호는 담담하게 자신의 진심을 이야기하며, 함께 서로의 부모님을 기억하며 차례상에 절을 하자고 한다. 끈 떨어진 연 같은 자신의 처량한 상황속에, 송강호의 진심을 느낀 강동원은 칼을 떨어뜨리고 차례상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떨군다. 갈라진 이념과 소속을 따라 죽일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서로를 적이나 수단이 아닌 '인간으로 인식하고, 화해하고 형제가 되는 순간이다.

영화 의형제(2010)
영화 의형제(2010)

차례를 지내는 것은, 분단과 전쟁 이전의 민족의 공통분모인, 역사와 전통, 부모와 조상에 대한 기억이라는 인간성을 상징한다. 그 공통분모가 두 사람의 화해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앞에서 읽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장례식 장면과 겹쳐 보이기도 한다. 원수가 될 수 있는 두 사람이, 자신의 뿌리 앞에서 서로를 인간으로 인식하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장훈 감독의 다른 작품들, 전쟁의 모순과 아픔을 그려낸 고지전과 광주민주화운동을 그린 택시운전사등과 연관지으면, 감독의 고민이 들어간 영화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화의 영제목이 'Secret Reunion'인 것도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단순한 분단 블록버스터 이상으로 기억되는 이유이다.

다른 얘기지만,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와서 겪은 갈등이 제사 문제인데, 필자가 어렸을 때만해도, 유교 집안에서 제사를 거부하고 핍박받은 이야기는 교회에서 단골 간증거리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모든 면에는 다층적인 차원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현실에는 종교적 (영적), 인간관계적, 사회적, 정치적 요소들이 공존하며 얽혀 있고, 제사문제에도 종교적(영적)차원이 있다면, 제사가 가지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의 뿌리를 확인하고 부모에 대한 감사와 기억을 되새기는 인간적인 부분에 대해서까지 부정하고 적대시 할 필요는 없었으며, 그것에 대한 충분한 배려를 하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은 차례를 지내는 집이 많이 줄어든 것 같고, 추도예배를 통해 그런 추모와 하나됨의 시간을 가지는 것 같다. 문제는 우리의 신앙을 분명히 하고, 전도와 선교에 촛점을 맞추는 동시에, 상대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 바라보고, 사랑과 존중의 마음을 실천하는 것, 갈등을 풀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소명이라는 점이다.

 

3. 남북한의 화해는 가능할까?

이삭과 이스마엘의 장례 장면, 영화 의형제의 차례상 장면에 이어서 우리 민족의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된다. 과연 인구의 10~20%가 사망한 극렬한 전쟁을 겪고 60년간 총부리를 겨누고 살아온 두 체제의 사람들이 화해하는게 가능은 한 것일까? 북한과 북한주민들을 악마화, 희화화 하기는 너무나 쉽고, 화해와 공존, 평화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이유는 너무나 많다. 특히 최근 몇 년간의 남북관계 악화와 북미 갈등 상황을 보면, 더욱 마음에 고통과 답답함이 몰려온다. 통일의 꿈은 고사하고 혹시 전쟁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평화와 안정, 교류 협력이 가능은 할지 불안한 마음이 든다.

화해의 단초를 생각해 본다면, 결국 우리의 뿌리, 그리고 공통분모, 서로를 인간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념과 상처, 미움과 공포, 편 가르기의 더깽이가 두껍게 쌓인 저 아래에, 우리를 이어주는 뿌리,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정서, 전통과 심성이 아직 살아있을까 질문해본다. 또한 왜곡되고 파괴되었을지언정,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심성, 그리고 상대를 인간으로 형제로 대할 수 있는 마음이 우리에게, 그리고 북한의 동포들안에 남아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이산가족상봉 장면을 생각해보면, 이념과 분단을 넘어, 인간으로 형제로 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전에 남과 북의 대표들이 참석했던 한 행사의 기억을 떠올리면, 회의 때는 논쟁하고 싸우다가도, 한국 음식을 같이 먹고 아리랑을 부르고 나면, 경계심이나 구별이 느슨해지고, 오랜만에 만난 친척처럼, 금새 정이 느껴지는 것을 경험했다. 며칠 안 되는 만남이었지만, 헤어질 때는 눈물이 글썽글썽 했다. 지극히 이념과 체제에 충실한 이들 조차도, 진실한 정에 반응할 줄 아는, 울고 웃을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절감했었다. 심지어는, 탈북자 분들을 만나면서, 북한이라는 극단적인 정치체제 속에 오히려 더 순수한 우리 민족의 그 어떤 심성이 꽁꽁 감춰져 보존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런 인간적이고 정서적인 부분은 한계도 분명하다. 체제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심지어 전쟁이라도 난다면 금새 우리는 철천지원수로 죽고 죽일 수 있는 관계니까. 그러나, 적어도 화해로 가야할 이유와 뿌리는 있다. 미국 사람들과 북한 문제를 이야기 하면서 느끼는 한계도 이런 점인 듯하다. 북한이 아무리 도발을 하고 문제가 많을지언정, 우리는 결국은 한 뿌리에서 나온 한 민족이라는 것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데, 미국인들은 아무리 의식 있는 사람도, 북한을 기괴한 타자로 생각하고 비인간화 하는 경향을 자주 관찰하게 된다. 여기에는 스스로에 대한 우월감과 상대에 대한 경멸, 인종적 시각도 작용할 것이다.

20006.15 이후 남북간의 많은 교류가 있었고 햇볕정책이 추진되었고 서로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이해가 높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궁극적으로 북한의 핵실험은, 평화조약체결과 외교관계 수립을 비핵화와 교환하려던 북미협상이 실패했기 때문이지, 햇볕정책이나 교류협력, 인도적 지원을 했기 때문은 아니다. 북한이 핵실험, 미사일 실험했으니 그들은 괘씸한 놈들이고, 이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안타깝다.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투자라는 점에서, 최소한의 인도적 지원이나 민족적인 교류협력 조차 정치적인 상황에 종속시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앞날에 먹구름이 끼어있는 이 시점에서, 아브라함의 장례식 장면이나, 영화 의형제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서 화해라는 단어를 꺼내어 본다. 끝없는 악순환의 고리를 선순환으로 반전시킬 수 있는 국제적 환경, 지도자들의 노력과 지혜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한 민족으로서의 동질감을 회복하고, 상대를 인간으로 바라보며, 화해의 기초를 놓아 나갈 기회가 생기기를, 손 모아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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