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 곁에서 잠시 쉬다
그녀들 곁에서 잠시 쉬다
  • 최은
  • 승인 2017.12.06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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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관 감독의 '더 테이블'(2017)
김종관 감독의 '더 테이블'(2017)
김종관 감독의 '더 테이블'(2017)

정유미와 정은채, 한예리, 임수정이 한꺼번에 출연하는 영화라면 무조건 봐야 한다. <최악의 하루>(2016)를 연출한 김종관 감독이 새 작품 <더 테이블>에 이 네 배우가 각각 출연한 네 개의 에피소드를 담아냈다. 카페가 문을 열고 닫는 하루 동안 창가의 작은 테이블에서 나누는 대화가 전부이고 꽤 낯이 익은 구조이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지루하거나 진부한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랑 이야기가 그렇듯이.

첫째는 스타 배우가 된 전 여자 친구와 평범한 회사원인 남자의 만남, 두 번째는 하룻밤 사랑을 나눈 후 멀리 떠났다가 수개월 만에 돌아온 철없는 남자를 만나는 여자 이야기이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가짜결혼 전문 사기꾼인 여자가 다음 결혼식에 친정엄마로 고용할 중년여성을 만난다. 마지막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의 단편 버전 같아서, 부유한 남자와 약혼한 여자가 전 남자친구에게 정부로 남아줄 것을 제안한다.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은 만남이지만, 한예리가 주연한 세 번째 에피소드가 가장 돋보인다. 넷 중 유일한 사업상관계인 한예리와 김혜옥(가짜 엄마 역)의 이야기를 절정에 배치한 것도, 한예리에게 과장된 화장을 입힌 것도 예리했다. 한예리는 김혜옥에게 자신의 진짜 엄마 이름을 부여하고, 김혜옥은 자신의 죽은 딸이 결혼했던 날짜에 가짜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된다. 가짜와 진짜, 허세와 진심이 혼재되어 있는 그 테이블 The Table’에서 진짜가 가짜에 파열을 일으키는 자잘한 순간들이 만들어낸 짜릿함. 이 점이 영화의 가장 큰 성취라고 믿는다.

정갈하게 컵에 담겨 있던 하얀 꽃은 하루를 지나는 동안 낱낱이 뜯겨져 테이블에 흩어졌다. 종이 찢는 습관이 있던 네 번째 남자가 종이를 찢던 손으로 꽃잎을 뜯었다. 꽃이 진짜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테이블을 훔치는 카페 주인의 손짓에 쓸려나간 꽃잎과 시간들을 생각한다. 하루 종일 비어있던 그녀들의 뒷자리는 나를 포함한 관객들의 테이블이었을 것이다. 타인의 이야기를 죄책감 없이 엿듣기 딱 적당한 거리가 아닌가.

피 튀고 사람 죽어나가고 고함치고 싸우며 분노와 상처로 질퍽한 한국영화들을 피해 그녀들의 테이블 곁에서 잠시 잘 쉬었다. 그러고 싶어서 이 영화를 한동안 아껴두었던 것도 같다. 섬세하고도 담백한 감성에 머무는 동안 <더 테이블>은 나에게 올해 가장 사랑스러운 한국영화가 되었다. 자의식 철철 넘치는 남자들과 부담스러운 언술의 과잉이 아니어도 '영화가 된다'는 위로는 덤이다.

 

글쓴이 최은은, 영화평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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