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웅목사, "여러분, 야곱이 반나절 만에 80킬로를 간 것이에요"
이지웅목사, "여러분, 야곱이 반나절 만에 80킬로를 간 것이에요"
  • 김동문
  • 승인 2020.09.15 07:3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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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뜻푸른교회 주일 예배(2020.09.06) 영상 갈무리

높은뜻푸른교회 이지웅 목사는, 지난 6일, 주일 3부예배에서, 창세기 32:13, 21-24절을 본문으로,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라는 제목으로, 40분 정도의 설교를 했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그러나 낯섫은 그의 해석을 마주했다. 그의 설교를 그대로 옮기면서, 그의 주장에 대해 짚어본다. 오랜 만에 설교 속 이야기에 대한 팩트 체크를 한다.

​성경 속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을 바탕에 깔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얼마의 거리인지, 지형이 어떤지 등에 대해, 공감과 상식으로 전제하는 경우가 많다. 그 동네를 모르는 이들을 위해 전해졌거나 쓰인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성경을 읽으면서 특정 이야기의 시간과 공간 배경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하는 것은, 기본적인 자세이다.

​이것은 해석이 아니라 관찰인 것이다. 그것도 그냥 독자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이라면, 자기가 말하는 이야기의 시공간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을 갖춰야 한다. 허공에서 벌어진 것이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식의 성경 풀이를 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높은뜻푸른교회 주일 예배(2020.09.06) 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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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모세오경을 공부할 때에, 정말 중요한 몇 가지 자료들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바로 뭐냐면은, '누지 문서'라는 것이에요. 이 '누지'라는 곳에서 발견된, 진흙으로 만든 토판인데, 이 토판에는 무엇이 적혀 있냐면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당시의, 가나안 지역에서 살았던, 호리 족속, 사람들의, 관습과, 문화와, 습관들이,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어요.

​이 누지 문서에 의하면, 이렇게 기록됐습니다. 장자권은 당연히, 일반적으로, 첫째 아들 장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상식이에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뭐냐면은, 최종적인 결정은, 아버지의 축복에 의해서 결정돼요. 그래서 아버지 축복에 의해서 장자권이 바뀔 수가 있어요. 그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뭐냐면은, 아버지가 구두로 한, 축복과, 유언의 결정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목사가 언급한 누지문서, 그 연구 자료에는 아래와 같은 토판 내용이 담겨 있다.

​"On the day they divide the grove (that lies) on the road of the town of Lumti ..., Tupkitilla shall give it to Kurpazah as his inheritance share. And Kurpazah has taken three sheep to Tupkitilla in exchange for his inheritance share" - Cyrus H. Gordon, "Biblical Customs and the Nuzi Tablets," BA(Biblical Archaeologist) 3 [1940]: 5;

​누지문서는 여전히 논쟁이 있지만, 툴쳐서 기원전 14-15세기의 문서이다. 누지문서를 언급하면서, 야곱이 이것을 알았다고 추론하는 것은 억지스럽다. 시대적인 연결점이 없기 때문이다. 이 목사는 야곱의 연대를 언제로 잡고서 이같은 주장을 하는지 궁금하다. 또한 요 위에 인용한 누지문서 내용은 여러가지 검토가 필요한 자료이다. 우선은 이 문서에 담긴 내용은 장자권( the birthright)을 주고 받는 이야기가 아니다. 상속권(the inheritance right)을 주고 받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더 많다. 또한 두 사람의 형과 동생의 관계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이 누지 문서에 의하면, 이렇게 기록됐습니다. 장자권은 당연히, 일반적으로, 첫째 아들 장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상식이에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뭐냐면은, 최종적인 결정은, 아버지의 축복에 의해서 결정돼요. 그래서 아버지 축복에 의해서 장자권이 바뀔 수가 있어요. 그렇게 기록되어 있어요.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뭐냐면은, 아버지가 구두로 한, 축복과, 유언의 결정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누지문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본다면, 위와 같은 이 목사의 언급은 누지문서와는 거리가 먼, 그의 주장으로 보인다. 그가 참고한 근거 자료가 궁금하다.

높은뜻푸른교회 주일 예배(2020.09.06) 영상 갈무리

야곱은, 이걸 알았어요. 그래서 형이 사냥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아버지 이삭을 속여, 그, 장자권을, 가로챕니다. 그리고 야곱은, 알았어요. 형이 이 사실을 안다면,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안다면, 반드시, 자기를 죽일 거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도 망칩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나를 죽일 거라는 그 두려움, 더군다나 형, 그 사냥꾼인 형이, 나를 죽일 거라는, 두려움이 엄습해 오자, 여러분 곧바로 도망치듯 떠나요. 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떠납니다.

아버지 집이 있는 곳은 브엘세바 였어요. 브엘세바에서 떠나서, 이제는 됐겠지,라고, 야곱이 처음으로 쉬었던 곳이, 어딘지, 성경이 기록하고 있죠. 그곳이 바로, 루스라는 곳이에요. 그 루스가 나중에 벧엘, 벧엘이란 지명을 바뀝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며는, 야곱의 심정을 알 수가 있어요. 브엘세바에서 루스, 즉, 벧엘까지의 거리는, 대략 어림잡아서, 80km가, 넘어요. 어떤 문헌에 의하면, 약 90킬로가 넘었다 라고, 되어 있지만, 대략적, 어디를 찍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략적으로는 약, 80킬로가 넘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거의 반나절 만에 돌파한 것이에요. 여러분 반나절만에 80킬로를 간 것이에요.

그 옛날에 비해 오늘날의 도로를 더 곧아졌을 것이다. 오늘날 길을 기준으로 할 때, 가장 빠른 도로를 바탕으로 할 때에도, 110킬로미터 이상의 거리이다. 80킬로미터, 게다가 어떤 문헌에 의하면 약 90킬로미터가 넘었다는 그의 주장의 근거가 궁금하다.

저는 92년도에 군 생활을 했는데, 제 기억이 정확하지 모르겠지만, 제가 행군을 했었을 때에, 1시간에, 남자 성인의 빠른 걸음으로, 4킬로를 가요. 제 기억에 그게, 느린 걸음이 아니었어요. 또 웬만큼 빠른 걸음이었었어요. 그 걸음으로, 무려, 스무 시간을 가야지만, 도착할 수 있는 거리가, 브엘세바에서부터 벧엘까지예요. 그런데, 이 야곱은, 그 먼 거리를, 반나절만에 돌파해 버려요. 얼, 심장이 터질 것 같았겠죠. 막 숨을 못 셔서,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그 고통이 있지만, 멈출 수가 없어요. 조금 더, 가야 돼요. 조금 더 가야 돼요. 왜요? 형은 유명한 사냥꾼이기 때문에. 맹수를 잡아서 숨통을 끊어버리는 사냥꾼이기 때문에.

높은뜻푸른교회 주일 예배(2020.09.06) 영상 갈무리

여러분 사냥꾼이 어떻게 사냥하는지 아세요? 맹수를 사냥할 때, 숨을 죽입니다. 숨을 죽이고 따라가요. 어떨 때는 빠른 걸음으로 가고, 어떨 때는, 드린 걸음으로 가고, 절대로 들키지 않습니다. 밥도 먹지 않아요. 일주, 이주, 그래서 완벽한 때가 됐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갑자기 급습해서 숨통을 한 번에 끊어 버리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에서 형이었어요. 지금 이미 주변에 형이 와 있는지도 몰라요. 보이지 않을 뿐이지, 지금 어쩌면 형이, 내 주변에서 내가 방심하기를 기다릴지 몰라요. 그걸, 야곱은, 알아요. 형이 나를, 누군가가 나를 죽일지 몰라, 누군가가 나를 죽을지 몰라 하는 그 공포, 그 두려움이 사로 잡자, 여러분 무려, 80킬로의 먼 길을, 거의 반나절 만에 돌파해버려요.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얼마나 떨렸겠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갈 수 없었을 때요, 이제는 더 이상 갈 수 없었을 때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자, 거기서, 돌베개를 세워, 이제 잠을 청할려고 하는 것이에요.

그의 이런 주장은, 설교 속에는 담겨 있지 않으나, 아무래도 창세기 28정 10절, 11절의 내용에 대한 오해와 억측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본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창세기 28:10, 11)

​시간, 거리, 상황을 고려하지 많고, 이 구절을 반나절 만에 돌파했다고 지나치게 단정을 짓는다. 그리고는, 그런 놀라운 돌파 속도를 과도한 상상을 투입한다. 팔레스타인의 지형은 물론, 야곱의 형편에 대해 제대로 관찰하지 않는다. 아주 나쁜 성경 읽기 방식이다.

그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먼저 찾아오세요. 그리고 환상을 보여주시죠. 그, 유명한, 벧엘의, 사닥다리 환상이에요. 높다란 사다리가 보이는데, 그 사닥다리의 한끝이 이 땅에 있고, 또 다른 끝은 저 하늘에 닿아있는데, 천사들이, 그 사닥다리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이에요. 그 사닥다리를 올려 봤더니, 그 끝은, 하늘에 닿았고, 그 위에, 하나님이 서계신 것이, 보여요. 그리고 하나님이, 야곱에게, 친히, 말씀하세요 "야, 야, 야곱아! 내가 너 누워 있는 땅, 너에게 주마. 그리고, 너의 자손을, 내가, 티끌처럼, 많게, 해주마.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할게. 그리고 기억해. 내가 너를 반드시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게. 내가 너랑 같이 있어서, 내가 너, 다시 이 땅에 돌아오게 할게."

​여러분, 누가 아버지 집 떠나고 싶었겠습니까? 누가 떠나고 싶었겠어요? 어쩔 수 없이 떠난 것이에요. 그 두려움, 공포, 그 서운함, 섭섭함,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그 수많은 복잡스런 감정을, 사실은, 야곱이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세요. 지금 야곱의 심정이 어떤지,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무엇을 기도하고 싶은지, 그 마음을 읽어 내셔서, 말씀하세요. "내가 너랑 함께 할게. 그리고 내가 너 반드시, 인도해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게."

높은뜻푸른교회 주일 예배(2020.09.06) 영상 갈무리

그러고 나서, 이제 야곱은, 마침내, 삼촌, 라반이 있었던, 그, 하란 땅에 도착해요. 도착하자, 깜짝 놀라죠. 왜냐하면, 이제, 처음 보는 삼촌, 라반을 만나자,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에요. 아니, 자기보다 더, 독한 사람이에요. 삼촌 라반이, 누군지 아시겠어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 속이는 것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자기의 것을, 빼앗긴 것을, 견딜 수 없어 해요. 자기의, 그 재물에, 손실이 생기는 것을, 견뎌하질 못해요. 내가 원하는 것은, 반드시 빼앗았어야만 되는 거죠. 내게 되어야만 하는 사람이에요.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 사람, 독한 사람, 그리고 말을 쉽게 바꾸는 사람이, 바로 삼촌이에요.

​여러분, 야곱이, 하란에 머무는 동안 사랑에 빠져요. 그 삼촌 라반의 딸인, 라헬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래서 말하죠. "삼촌의 딸 라벨, 라헬을 저에게 주십시오. 제가 7년 동안 일하겠습니다. 아무것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7년 동안 일할 테니까, 그 라헬을 저에게 주세요." 삼촌이 약속해요. 철석같이 약속해요. 여러분 7년이 얼마나 쉽게 줄 알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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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씨 2022-02-24 23:29:36
저도 이지웅 목사님 레위기 영상 유툽으로 본 적 있거든요?! 그게 계기가 되서 계시록 영상도 보고 누가복음도 들어봤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분은 아니구요. 그런데 이지웅 목사님이 전달하는 모든 말들, 특히 경험이나 이스라엘에 갔을 때의 개임적 체험, 그 분의 영감, 그 분의 기독교학적 관점, 등 그 모든 것을 절대값으로 정하면 안 되지 않을까요? 즉, 그 분이 전하는 모든 말씀이 어떻게 100% 옳을 수 있냐는 말이죠. 어느 목회자든 설교하는 그 모든 영감과 내용이 때론 조금 과녁에서 정중앙이 아닐 수도 있는 것 아닌지요? (신천지/하나님엄마 어쩌구 그런 곳 기본적으로 제외하고) 우리끼리 꼭 선악과(선과 악) 먹고 서로 옳고 그름 판단해주는거 이제 진짜 지겨워요. 좀 틀렸다 해도 맥락이 중요하고 이상없는듯요

오늘은 2021-05-12 16:20:06
기사 비판하는 댓글이 왜 안달리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사의 내용이 오해와 억측이 많은 것 같네요.
억지로 까려고 한다면 비판의 대상이 안될 것이 없겠지만,
건설적인 비판이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근거에 대하여 의구심을 제기하고, 오해가 쌓일 만한 어휘로 오해를 만들어 내면서,
정작 기사는 근거를 하나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고 뇌피셜로 적은 것은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습니다.

상대방의 근거가 없다고 비판하면서, 정작 본인은 어떤 reference도 근거도,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냥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비판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