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학 목사, " 동성애를 지지하는 것 같은 그런 변론적인 얘기"
이상학 목사, " 동성애를 지지하는 것 같은 그런 변론적인 얘기"
  • 김동문
  • 승인 2020.08.01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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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안교회 주일예배(2020.07.19) 설교 동영상 갈무리
새문안교회 주일예배(2020.07.19) 설교 동영상 갈무리

 

새문안교회의 이상학 목사는 지난 7월 19일 주일 예배에서 창세기 2장 22-24절을 본문으로, "창조의 섭리가 행해 가는 곳"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설교 분량은 33분 정도였는데, 동성애에 관한 주제로 설교 시간을 활용했다. 그의 설교 전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19) 설교 동영상 갈무리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창세기 2장 22절 부터 24절까지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 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럴 아담에게 로 이끌어오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여 서 이제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지로다."

​성도님들! 이번 주와 다음 주, 2주 간에 걸쳐서, 대단히 민감 하면서도 중요한 주제를 좀 여러분들하고 다루려고 그럽니다. 아 이번주에는 동성애에 대해서, 그리고 다음주에는 이와 관련돼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평등 및 차별 금지에 관한 법률', 소위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관련된, 성서신학적인 입장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이 부분을 어떻게 바라봐야 되는 지에 대해서, 같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19) 설교 동영상 갈무리

저는 10년 동안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에 목회 현장에 바로 뛰어들어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이 동성애에 대해서는 설교를 한 적이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이 설교 주제는 피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경험했던 미국 교회 안에서, 이 이슈가 교회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 동성애 이슈는, 마치 블랙홀이 빛을 빨아들이듯이, 교회의 모든 나머지 이슈들을 다 흡수해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 동성애 관련된 쟁점 말고도, 중요한 이슈들이 대단히 많이 있지요. 현대교회의 사활이 걸려있는 개혁과 갱신과 관련된 중요한 이슈들이 많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이슈가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다른 모든 쟁점들을 다 날아가 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 쟁점은 공동체를 정확하게 반으로 쪼개어 버리더라구요. 건강하던 공동체도, 이 동성에 문제가 중심에 세워지는 순간, 찬반으로 나뉘어 져서, 서로 원수를 대하듯이 갈라지는 것을, 도처에서 봤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하나가 되어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교회가 둘로 나뉘어 지고, 우정이 두툼하던 학교의 친구들이 서로 나뉘어 지고, 심지어는 교단이 둘로 나뉘어 지는 것 까지 보았습니다. 누가 이런 것을 하겠습니까? 서로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일이라면, 공동체를 둘로 나누는 것은, 원수가 하는 짓이죠.

우리 한국교회가 넘어야 되는 지금 산이 얼마나 큽니까? 교회의 세습 문제,

추락하고 있는 사회 신뢰 문제, 복음이 퇴색되는 문제. 그런데 이 이슈가

중심에 세워지는 순간에 이 나머지 과제는 사소하게 생각되면서, 마치 이것만이 교회의 사활이 걸려있는 문제처럼 생각되기가 쉽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아도 이념으로, 영호남으로, 계층으로 문화로, 온갖 이슈로 나뉘어져 있는 우리 사회와 한국 공동체, 이 이슈마저도 들어오게 되면은, 교회의 주인이 되시고 세상의 왕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안 기뻐하신다 라는 생각에, 이 이슈는 끝까지 다루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국사회가, 지금 해결해야 되는 개혁의 과제가 얼마나 많이 있고, 우리 한국교회가 넘어야 되는 지금 산이 얼마나 큽니까? 교회의 세습 문제, 추락하고 있는 사회 신뢰 문제, 복음이 퇴색되는 문제. 그런데 이 이슈가 중심에 세워지는 순간에, 이 나머지 과제는, 사소하게 생각되면서, 마치 이것만이 교회의 사활이 걸려있는 문제처럼 생각되기가 쉽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설교는 안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피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사회가 훨씬 빠르게 변화되고 있어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4 5년은 앞당겨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제는 교회도 이 부분에 있어서 입장을 분명히 해야 되고, 그리고 사회의 교회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교회가 터하여져 있는 이 사회, 자신을 위해서 어떤 길을 가야 되는 지에 대해서 말해 주어야 되는 상황이 왔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19) 설교 동영상 갈무리

성도님들! 조금 듣기 불편하시더라도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동성애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한국 교회 성도님들은 당연히 성경은 동성애를 죄악으로 보고 있지요?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만, 이 논의가 오래 전부터 진행된 유럽이나 미국 교회로 가보면 성서 신학자들은 그렇게 간단하게 보지를 않습니다. 요 부분들을 조금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은, 이 부분이 우리 안에 바르게 정리가 되어야지, 다음 주에 살펴볼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설득력있게 자리매김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몇 군데, 동성애에 반대하는 성경 구절이 나옵니다. 구약에서는 대표적으로, 창세기 19장 1절부터 13절까지 소돔성 이야기, 그리고 사사기 19장의 기브아 이야기입니다. 많은 반 동성애자들은, 소돔성에서 행해졌던 이 동성애가, 소돔 성을 하나님이 멸하시게 된 결정적인 이유 라고 말을 합니다. 물론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보면, 소돔성 사람들이 롯의 두 손님, 천사들이었죠. 이들을 집단으로 성폭행 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틀림 없습니다만, 이것이 동성애 성교로 인해서 이 성이 멸망했다는 증거로는, 성서신학 안에서는 채택을 하지를 않습니다.

소돔성 사람들이 롯의 두 손님, 천사들이었죠. 이들을 집단으로 성폭행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틀림 없습니다만, 이것이 동성애 성교로 인해서

이 성이 멸망했다는 증거로는, 성서신학 안에서는 채택을 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구약에서 동성애를 가장 명료하게 반대하는 말씀이, 레위기 18장 22절에 나옵니다.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당시에는 율법을 남성들에게 선포하고 남성들이 가정에 있는 여자들에게 가르쳤으니까, 이 말씀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지요. 레위기 20장 13절은 보다 강력하게, 근친상간이나 수간을 금하면서, 이 동성애를 엄금합니다.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누구든지 여자와 동침 하든 남자와 동침 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하면 즉 반드시 축일 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위기면 모세 오경의 중심을 형성하는 율법이기에 비록 구약에서는 여기에 한 차례 언급되었다 할지라도, 구약 성경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성애를 엄히 금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19) 설교 동영상 갈무리

어떤 사람은, 이 계명은 옛언약이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난 뒤에 세워진, 새 언약은 아니지 않느냐? 라고 반문을 합니다. 맞는 말이지요. 구약 중에서 많은 규례가 신약시대에 폐하여 졌습니다. 할례는 더 이상 받지를 않고요.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여기던 정결법들이 굉장히 많이 있는데, 그 대부분들은, 다 폐하여 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의 이후에는, 더이상 지키지 않아도 되는 율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동성애에 관한 규정은, 신약에서도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것도 사도중의 사도이고, 신약 성경의 대부분의 책을 쓰신,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해 재등장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9절에서 10절을 보면,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악한 행동과 목록 속에 '남색 하는 자'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영어로는 호모섹슈얼리티(*편집자 주, homosexuality)(*편집자 주, 그러나 영어 번역에는 homosexuals로 적고 있다.) 동성애라고 나오고요, 헬라어로는 ' 말라코이'(*편집자 주, 설교자는 malakoi μαλακοὶ를 언급한다. 그런데 이 '말라코이'는 영어 번역에 effeminate로 적고 있다. 헬라어 성경 기준으로 하면, 남색하는 자는 아르세노코이타이 ἀρσενοκοῖται arsenokoitai로 적고 있다.)라고 그래서, '건드리기 쉽다'라는 뜻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연약한 파트너와 남자가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동성애 금지를 구약의 지나간 규례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지켜야 되는 신약의 결정적인 항목으로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거죠.

디모데전서 1장 9절에서 10절까지에도 이렇게 나옵니다.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남색 하는 자, 율법과 복음의 상반되는 죄 종목으로 남색이 들어 있습니다. 역시 영어로 들어가면 호모섹슈얼리티(homosexuality0인데, 헬라어로는, '아르세노코타이스'(*편집자 주, arsenokoitais ἀρσενοκοίταις) 그래서, '남자와 같이 눕는 수동적인 파트너'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동성애 금지를 구약의 지나간 규례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지켜야 되는 신약의 결정적인 항목으로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거죠.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19) 설교 동영상 갈무리

하지만 교회가, 동성애를 그리스도인의 합법적인 생활 양식으로 인정해야 된다 라고 보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이 말씀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성애를 반대하는 전거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이들은 교회가 동성애를 무조건 죄악시 하기 때문에, 동성애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화 해도 동성애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거에요. 첫 번째로는, 일시적인 성적 만족을 위해서 일탈적 이고 비정상적 성행위를 하는 사람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동성애자들. 두 번째로 이들 중에는 진정한 인간 사랑의 표현으로서, 동성애를 하는 자들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두 번째 유형은, 일탈이 아니고 동성애적 성향을 운명적으로 이미 갖고 있는 자들이어서, 이들은 건강한 도덕성을 갖고 살며, 이성에 대해서는 전혀 감정이 잃지 않기 때문에 이성과 결혼하듯이 동성과 결혼하여서 평생 그 사람만 사랑하면서 사는, 그런 사람들이라고 말을 합니다.

동성애를 그리스도인의 합법적인 생활 양식으로 인정해야 된다 라고 보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이 말씀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성애를 반대하는

전거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이들은 교회가 동성애를 무조건 죄악시하기

때문에, 동성애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동성애를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으로 인정해야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구약과 사도 바울이 알고 있는 동성애는 성적으로 문란한 삶을 살았던 전자의 경우이지, 후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런 소위 건전한 동성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사도는, 이런 동성애자들의 고뇌와 인간적인 권리에 대해서는 정죄하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성애는, 신약에서도 죄 로 규정한 적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게 대략 현재까지의 논의입니다.

​여러분 이런 해석은, 죄 라는 단어를, 단순히 '내가 악한 행동을 했다'라는, 범법행위를 한 것이거나, '내가 악한 생각을 했다'라고, 지극히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것으로 좁게 이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히브리어로는 '차타'(*편집자 주. 설교자는 chatta'ah를 차타로 표현했다. 그런데 히브리어 חַטָּאָה로 '하타아'로 발음한다. 히브리어의 영어 표기인 chatta'ah를 오해한 것이다.)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편집자 주, hamartia ἁμαρτία) 그래서 '표적에서 벗어나다', '있어야 되는 자리로부터 벗어나다', '괘도를 이탈해 있다'라는 뜻입니다. 창조의 섭리와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벗어난 행동 뿐만 아니라, 존재의 상태 자체를, '하마르티아', '죄'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창조적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남성과 여성을 만들어 졌다고 했습니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19) 설교 동영상 갈무리

이번에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성을 분류하기를, 남성 여성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혹은 '분류하기 어려운 성', 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창조 신앙에서는 '알 수 없는 제3의 성'이나 '표현할 수 없는 어려운 성'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동성애자들이, "목사님 그런 것이 실제로 있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내가 경험하면서 살고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있다고 해서 신앙적으로 다 정당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존재하기에 정당한 것은 아니지요. 이 자체가 이미 있어야 되는, 정상적 상태에서 벗어난 상태, 표적에서 벗어난 상태, 이것을 일컬어서 죄의 상태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전으로부터 왔거나 후천적으로 부터 왔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성서신학적으로는, 동성에 원인이 어디 있느냐? 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왔던 그것은, 표적으로부터 있어야 되는 괘적으로 부터 벗어나 있다는 측면에서는, 죄이고, 하마르티아인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둘이 한 몸을 이룬다 했습니다. 결혼하여 이성이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거에요. 성경적으로는 본래가 하나였는데 바로 떨어졌던 것이 원래대로 재 결합하여서, 온전해진 것입니다. 이 결합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육체적인 것입니다. 히브리적 사고, 유대적인 사고, 구약적인 사고에서 몸의 하나 됨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몸성을 기독교 신앙은 대단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레위기가, 동성애를 엄히 금하고, 사도 바울이 동성애를 거부한 것이, 단순히 성적인 타락을 금한다든지 그들의 존엄성 문제에 무지 했기때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몸성을 기독교 신앙은 대단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레위기가, 동성애를 엄히

금하고, 사도 바울이 동성애를 거부한 것이, 단순히 성적인 타락을 금한다든지 그들의 존엄성 문제에 무지 했기때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1장 26절에 보면,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함에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한다." 여기 남자가 남자와, 여자가 여자와 함께 자고 결혼하는 것, 이것이 뭐라 그랬습니까? 순리가 아니고 역리다. 영어로 보며, 넌내추럴 릴레이션 이라 그랬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것은 자연의 순조로운 관계가 아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도덕적인 문제이기 이전에, 창조의 섭리와 직결돼 있는 부분이라고 사도는 보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동성애 문제를, 단순히, 성적인 타락의 문제나 인권 문제로 볼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됩니다. 사실은 사도 바울만큼 급진적 인권 의식을 가지고 있는 분이 없어요. 갈라디아서 3장 28 절에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 말씀이 얼마나 당시로 보면 급진적인 말씀이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라는 말은 평등하다 동등하다 라는 뜻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늘과 땅 차이 처럼 위계가 분명했던 때에, 그리스도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 라고 말씀을 한 것입니다. 노예제 사회인데, 주인과 종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하다고 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하나님도 모르고 율법도 알지 못하는, 개와 같은 자들이라고 취급했던 때에, 바울은 이방인이 유대인들과 동등하다 라고 말을 합니다.

​이런 민감한 인권 의식을 가진 사도가, 동성애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부정을 합니다. 왜냐? 동성애는, 인권의 문제보다 더 깊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그래서 이런 삶이, 로마서 1장 15절에 동성애에 대해서 부정하기 전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데서 바로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사도가 동성애를 언급하는 것은, 단순히 행위 때문이 아니고, 그 자체가 창조의 온전한 존재 상태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19) 설교 동영상 갈무리

성도님들, 사도 바울이 살았던 이 헬라 세계는, 동성애가 성행한 사회였읍니다. 동성애가, 문화적으로 인정받았던 사회였어요. 오늘날처럼, 동성애가 음성적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노예와 남자사이에 존재 정도로, 하등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진정으로 플라토닉한 사랑을 하려면, 지적 존재적으로 수준이 낮은 여자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남자와 하는 것으로 인식을 했습니다. 뭘 말합니까? 당시의 동성애, 특히 남성들 사이의 동성애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더럽고 난잡한 관계가 아니라, 훨씬 지적 정서적으로 수준 높은 관계 였읍니다. 사도 바울도, 이를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그는 이를,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는 것이고, 순리대로 쓸 것을 역리로 쓰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거부를 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사물을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한 종류의 사람 뿐입니다. 사람이 기준이 아니고, 취향이 기준이 아니며, 자신을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기준인 사람, 그 사람은, 사물을 이렇게 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생명처럼 여겨야 되는, 창조 신앙에서, 바로 이 부분에서는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부분이, 오늘날 기독교와 그리스도의 교회가, 대단히 터프(tough)한 지점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은, 동성애를 인권의 문제, 혹은 성적 선택이나 취향의 문제로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집요하게 이쪽 방향으로 가지고 가려고 할 것입니다. 동성애는 개인의 자유의 영역이 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보려고 하는 성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50대 중반 이상의 성도님들 중에서는, 오늘 목사님이 왜 저 동성애를 지지하는 것 같은 그런 변론적인 얘기들을 길게하시지?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겠습니다만. 여러분이 30대로 넘어가면 전혀 온도차가 달라요. 서구에서는, 십대로 내려가면,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자체를 오히려, 이상하게 봅니다. 그런 가운데서 교회가 지금, 창조 신앙을 붙들고, 이 이슈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섬세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저는 목사로서, 설교자로서, 이 부분에 있어서 교회의 입장은, 과거나 지금이나 미래나 동일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제가 사도신경을 2부때 하면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그 고백을 하는데요. 가슴이 뭉클해져요. "그렇지! 오늘날에 21세기 교회는, 이것이 신앙고백의 영역으로만 남아 있는 그런 상황이 되었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이 진화되었다라고, 스스로 만들어 졌다고 얘기를 하고,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교회에서는 창조 신앙을 믿지만, 세상에 나가면 진화론적인 물신론의,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교회는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오시는 날까지, 누가 뭐라고 해도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지, 그것이 교회가 가야 되는 길인 것이지" 생각하면서 가슴이 뜨거워 지더라구요.

이것(동성애)은 교회 본질적인 진리와 연결되어 있는, 창조 신앙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선택할 영역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기준을 받아들여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영역입니다.

동성애에 관한 부분은, 바로 이 창조 신앙, 창조의 섭리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수에 많고 적음에 상관 없이, 교회가 지켜야 되는 진리의 영역인 거에요. 지금은 교회는 성도님들이 다 동성애를 반대하기 때문에, 목사도 거기에 얹어서 이런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십 년 이십 년 지나고 나면, 여러 분들의 대부분은 다 사회가 가는 흐름과 방향을 따라서 동성애를 찬성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 "목사님, 그래야지 선교가 됩니다." 아니요!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 이것은 교회 본질적인 진리와 연결되어 있는, 창조 신앙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선택할 영역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기준을 받아들여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는 영역입니다.

​여러분, 동성애는 이 부분에 있어서 죄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치유받을 부분들인 것이지요. 바울이 이 말씀을 할 때, 헬라 속에서 바울이 소수자 라는 것을, 절대로 잊으시면 안되요. 그렇지만 그런 이 부분에서 대단히 단호합니다. 왜냐? 하나님 말씀에 핵심 진리이기 때문에, 창조 신앙이 이것을 옳지 않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느니라"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는 우리 개신교는, 이 부분에서 더욱더 뚜렷합니다. 카톨릭은 동성애에 대해서 얼마든지 유연할 수 있어요. 왜냐면 카톨릭의 있어서 진리의 절대 기준은 성경 자체가 아닙니다. 교회 자신입니다. 전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되는 시대 속에서 얼마든지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개신교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교회의 살고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 성경 66권 속에 있다고 저희는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은, 찬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19) 설교 동영상 갈무리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 묵상을 하면서, 한국교회가 회개할 부분들이 대단히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이 우리들의 유일하면서도 가장 궁극적인 진리의 근원이라고 얘기를 하면서, 사실은 우리가 성경을 나의 경험, 내 기호, 내 취향, 나의 이념적 성향에 따라서, 취사 선택을 하면서, 어떤 부분은 강조하고, 어떤 것들은 그 부분에서 침묵하고, 어떤 부분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어떤 부분들은 힘주어 말하면서, 자기 입장을 변호하는 수단으로, 성경을 개신교인들이 사용해 온 적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 개신교를 사용하실 수가, 앞으로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도님들, 진정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고, 창조 신앙을 믿는 다면, 동성애를 찬성하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죄를 죄라고 말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 예수님 보세요. 그분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까? 그런데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게 분명히 말씀 하셨어요.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앉은뱅이를 고쳐주신 이후에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14절 보면, "너에게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그분은 죄를 분명히 죄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떠나라고 명령하시는 거에요. 그러면서 동시에 이 여인을 한없이 불쌍히 여겨 주시지 않습니까? 여인에게 돌로 치려고 하는 자들을 지혜를 발휘 하셔서 감싸 주셨어요. 그리고 말씀하시죠. "여자여 너를 고발하는 그들이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인이 대답하지요. "주여 없나이다." 그때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나도 너를 비난하지 않는다"

성도님들, 동성애를 하는 분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가 돌봐 주어야 합니다. .. 이들을 혐오 하여서 배제하면 안돼요.

이 얘깁니다. "나도 너를 악한 사람이라고 정죄 하지 않는다." 이 말씀은, 이 여자를 불쌍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가 지은 죄는 죄라고 말하지만, 그 여인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그의 곤고한 존재를 인정하고 수용하여서, 이 여인 자신은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안의 죄는 미워하시되 이 사람 자신은 받는거에요.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사람, 예수님이 그의 병을 고쳐 주실 때, 그 사람 속에 있는 죄를 이미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 자신은 수용해 주십니다, 그래서 고쳐주시고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성도님들, 동성애를 하는 분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가 돌봐 주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이들을 혐오 하여서 배제하면 안돼요. 미국의 복음주의적 교회가, 치명적으로 실수 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죄와 죄인을 구분하지 를 못했습니다. 동성애에 대해서는 단호하지만, 그들이 그 동성애를 행하는 자신의 모습들에 대해서, 그 사람들 자신에 대해서는, 품고, 기다려주고, 돌봐주고, 기도하면서, 이들이 거기에서 나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창조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도록, 교회가 살피고 돌보지를 못한 거에요. 그래서, 결국은 인권 의식이 점점 민감하여졌던 서구사나 유럽 사회는, 교회의 이런 모습들을 보고 바리새인과 같다, 그러면서, 교회가 반으로 나뉘어 지는 아픔을 겪었던 것입니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19) 설교 동영상 갈무리

​우리는 그렇게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긍휼히 여기어 주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게 예수님의 마음이잖아요. 사실은 우리가 주님께 받아들여졌다고 하지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오늘도 수없이 많은 죄를 짓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 주님은,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여서, 우리를 배제하지 아니하십니다. 여전히 우리를 받아 주시기 때문에, 오늘 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 또한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면에서는,

우리와 동일하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를 존중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인권의 이름으로, 동성애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동성애 본질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동성애자를 긍휼이 여긴다고 하여서, 동성애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들 또한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면에서는, 우리와 동일하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를 존중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인권의 이름으로, 동성애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동성애 본질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성도님들이 우리 함께, 죄에 대한 민감성을 갖고, 또 동시에 그 죄에 대한 민감성이, 인권을 옹호하는 부분들과는 잘 구분하여서, 힘들고 어려운 시대에, 옳고 그런 것들이 혼동되어 있는 시대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쫓아 가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진리의 조사가 되셔서 갈 길을 보여 주시고, 풀은 마르고 꽃은 결국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며, 그 말씀 안에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 하시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그 앞으로 초대 하시니 감사합니다. 말씀 붙들고, 옳고 그름을 분별 하게 힘든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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