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학 목사, "차별금지법은 양심과 의사 표현의 자유 침해"?
이상학 목사, "차별금지법은 양심과 의사 표현의 자유 침해"?
  • 김동문
  • 승인 2020.07.28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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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26) 설교 동영상 갈무리

새문안교회 이상학 목사는 7월 26일(한국 시각) 주일 예배에서 마태복음 5:13-16절을 본문으로, "세상과 소통하여 길을 보여주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36분 정도의 설교를 했다. 이날은,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에 관한 언급으로, 설교 시간을 채웠다. 아래 설교 녹취록은 2부 예배 때 진행한 이 목사의 설교 전체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26) 설교 동영상 갈무리

개신교 설교는 아, 성경 본문에 바탕을 두고 성경을 중심으로 해서 말씀을 풀어나가는 것이 바릅니다만, 오늘은 여러분과 시사성이 강한 이야기를 좀 나누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흔히 동성애를 지지한다라고 말을 하면, 그 사람이 동성애자이거나 아니면, 성 윤리의식이 대단히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는 사실 기독교인들이 싫어하건 좋아하건 간에, 지금의 이 시대의 문화와 또 정신이 가고 있는 방향성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어떻게 갑론을박을 해도, 결국 동성애는 서구가 인정해 주는 것처럼, 그런 방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이 인류 역사 이래, 점점 많은 사람들이 해방이 되는 방향으로 가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인류 역사는 처음에는 제왕처럼 극소수의 사람들만, 자유를 누리다가, 점점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고 평등을 구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제왕만 자유하다 모든 사람이 자유하고, 남자만 자유하다 여자가 자유하고, 백인만 자유하다가, 인종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자유하고 평등하고, 이제는, 내국인만 소중히 여기다가 외국인까지도 이제는 동등하게 대해주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람에게 주시려고 했던 가장 소중한 가치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자유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되고, 존중받으며 사는 세상, 하나님이 역사를 이끌고 가시는 방향입니다. 그래서 이분들은, 결국 성소수자들도, 유사 이래 늘 어둠 속에 있었지만, 앞으로는 자신의 자유와 평등권을 얻는 세상으로 나가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26) 설교 동영상 갈무리

이번에,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도 이런 보편적 인권과, 또 평등권을, 그동안 소수자로서 인식되어 차별받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확대하자,라는 취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1조에는 목적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이 법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고, 차별로 인한 피해를 효과적으로 구제함으로써 헌법상의 평등권을 보호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함을 목적으로 한다."

​성도님들, 차별을 하지 말자는데, 누가 반대를 하겠습니까? 더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아래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모든 사람은 존귀하다고 믿는 기독교인이, 어떻게 차별에 대해서 옹호를 하겠습니까? 많은 일반 사람들이나, 인권의식이 높은 기독교 신앙인들이, 한국 기독교 신자의 많은 사람들이, 이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고 하니, 그래서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제가 지난주 SNS에, 나는 이런 형태의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고 말을 하니까, 어떤 분이 답글을 올려왔어요. “내가 아는 예수와 목사님이 아는 예수가 좀 다른가 봅니다.” 여러분, 당연히 그가 누구이건 어떤 환경 속에서 태어나 어떻게 살고 있건 간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인권은, 존중되어야 하고, 또 그 존엄성은 지켜주어야 합니다. 동성애자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26) 설교 동영상 갈무리

저도 처음에는, 차별 금지인데 당연히 그들도 지켜줘야지 하고 쉽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법 조항 하나하나가 가진 문제를 뜯어 살펴보니, 기독교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시민의 시각에서 보아도, 도저히 상식적으로도, 합리적으로도, 받아들이기가 힘든 조항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이 차별금지법에 보면 23개 정도의 차별 금지의 영역이 있는데, 이 차별의 영역을 몽땅 뭉뚱거려 모아놔서, 차별을 금지하는 방법에, 다양한 스펙트럼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 시민의 시각에서 보아도, 도저히 상식적으로도, 합리적으로도,

받아들이기가 힘든 조항이 많이 있습니다.

일례로, 외국인 차별 영역들 보면, 이미 시행되고 있는 개별 차별 금지법으로 가면, 남녀 차별이나 장애인 차별에 대해서는, 벌금형이나 징역형이 부과되는데, 외국인 차별은 개별 금지법으로 가면, 그렇지를 않습니다. 외국인은 차별을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국제법상으로, 상호주의의 원칙에 따라서, 그 나라가 우리나라 사람을 대하는 정도에 따라서, 우리도 같은 수준에서 하는 것입니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26) 설교 동영상 갈무리

차별론자의 다양한 방식을 인정해야 되는 또 다른 영역이 동성애의 영역입니다. 분류하기 힘든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이것은 동성애의 영역은, 과학적 사실로 공식, 확정된 데이터가 아직 없습니다. 옹호론자들이 2천 년대 초반에는 유전자 이상설을 강하게 얘기했는데, 지금은 이런 선천적인 요인들을 지지를 하지를 않습니다. 후천적인 것이, 너무너무나 많기 때문이에요.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는, 아직도, 과학의 안에서는 객관적으로 확증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후천적이라는 말은 고칠 수가 있다는 것이고, 선천적이라면 질병 일수가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요즘은 이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원인보다는, 선택의 자유이고, 지향성의 자유이다,라는 윤리의 영역으로, 이 문제를 가져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 역사 이래 차별이 폐지가 되고,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어 나가는 이런 괴정 속에는, 항상 두 가지가 뒷받침되어 왔습니다. 과학적 사실과 윤리적 합의에요

그러니까, 동성애의 과학적인, 근거는, 천동설이 틀리고 지동설이 맞기 때문에, 교회가 틀렸다,라는 식으로 얘기할 수 있는 이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도, 사회에서 합의된 것이 없습니다. 성도님들, 인간 역사 이래, 차별이 폐지가 되고,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어 나가는 이런 괴정 속에는, 항상 두 가지가 뒷받침되어 왔습니다. 과학적 사실과 윤리적 합의에요. 차별 금지에 대한 윤리적인 합의, 이것이 먼저 오는 경우도 있고, 과학적 사실이 먼저 뒷받침된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 둘은 항상 같이 갑니다. 남녀평등은 기독교 신앙에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이것이 진정으로 실현된 것은, 결국 남녀 간에는 생물학적 우열이나 지능의 우열이 전혀 없다는 것이, 확정되서부터입니다. 그래서 이 과학적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 상식과 양심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이제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26) 설교 동영상 갈무리

만일에 남자가 여자가 뇌과학적으로 지능 차이가 있다,라고 과학적으로 판명이 되면, 이것은 우열 요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진정한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 근거가 약해지는 것입니다. 백인은 흑인들에 비해서 열등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3/4 인간이라고 보고, 이들을 차별했습니다 오랜 세울 동안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문화적인 한계 때문에, 열등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과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전혀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지고 확증된 것입니다. 지금은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 맞는 것이에요. 이에 대해서는 이성이 있고, 건전한 양심을 가진 시민이라면 모두가 공감합니다. 그것이 진실이고 진리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과학을 사용하셔서, 사람들 속에 있는 편견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를 차별하면 안 되고 그들의 인권을 존중해 줘야 된다는 것은 맞지만, 동성애 자체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합의된 진리의 영역이 아직 없기 때문에

하지만 동성애자의 차별 금지에 대해서는, 상황이 다르지요. 동성애자를 차별하면 안 되고 그들의 인권을 존중해 줘야 된다는 것은 맞지만, 동성애 자체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합의된 진리의 영역이 아직 없기 때문에, 그리고 교회는 원인이 어떻든, 죄로 규정하기 때문에, 대다수 국민은, 동성애를 윤리적으로, 보편적인 가족 관계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아직 인정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동성애를 단순히 취향이나 성적 선택에 자유로, 보기가 어렵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옳다면, 자유와 해방이 점점 확대되는 방향으로 역사가 가고 있고, 동성에도 그중의 하나이다라고, 보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인종차별이나 남녀 차별과는, 다른 범주에서, 차별 금지가 다루어져야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26) 설교 동영상 갈무리

둘째로, 이법은 양심의 자유, 의사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의과 대학교 교수가, 강의실에서, AIDS 확산의 주된 통로가 남성 동성애자라는 통계 자료를 제시했다고 보시자고요. 그렇게 보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은 과학자의 양심으로, 또 통계적인 연관성을 볼 때, 분명히 동성애와 에이즈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커 보인다고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통계를 제시하는 순간, 수강생 중에 어떤 동성애자가, 수치심을 느낀다고 히여서, 이를 고소하게 되면, 교수는, 차별 금지법 위반으로, 거액의 벌금이나 형사의 제재를 받을 수가 있게 됩니다. 차별이 아니라는 증거를 이 법에서는 가해자가 제시를 해야지 됩니다. 자신은 차별의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데이터를 말한 것뿐이라고 말을 하겠지요.

수강생 중에 어떤 동성애자가, 수치심을 느낀다고 히여서, 이를 고소하게 되면, 교수는 차별 금지법 위반으로 거액의 벌금이나 형사의 제재를 받을 수 있게 ..

그런데 문제는, 이 법 제3조 차별 금지 대상 차별의 범위 3항에 보면, “성적 언동이나 성적 요구로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거나 피해를 유발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행위(*편집주 주, 그리고 그러한 성적 요구에 불응을 이유로 불이익을 주거나 그에 따르는 것을 조건으로 이익 공여의 의사 표시를 하는 행위)”, 이게, 차별 금지의 대상입니다. 4항에는, “성별등을 이유로 적대적·모욕적 환경을 조성하는 등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돼있습니다. 여기서 이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는 육체적인 것뿐 만 아니고 수치심이라든지 괴롭힘을 당했다라고 느끼는 주관적인 감정도, 바로 이 고통에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해자가 수치심이나 정신적 고통을 느꼈다는 것이 핵심이기에 의도가 없었다라고 주장을 해도, 차별금지법의 법망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됩니다. 설사 이번에는 용케 벗어난다고 해도, 이런 고소 고발 사건을 당하고 나면, 이 교수는 앞으로 이 데이터를, 학자의 양심을 걸고 들이대는 것을, 주저할 수밖에, 없게 되게 됩니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26) 설교 동영상 갈무리

결국은 이런 일이 반복되게 되면서, 이 법은, 극소수의 권익은 보호할지 모르지만, 아직 과학적 논쟁도 다 마무리되지 않고, 국민들 안에, 보편적이고 윤리적인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동성애 문제를, 소수자의 입장에서만 보게 만드는 정보를, 유통시킬 수밖에 없게 됩니다. 결국, 소수자의 인권보호라는 미명하에 국민의 입을 막게 되어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는 경로를 차단하게 되는 모양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차별 영역 속에 슬쩍 끼워 넣어서 법을 진행한다 의도가 있거나, 아니면 국민 앞에 좀 무책임한 것 아니겠습니까? 미국에서 주별로 이 법이 통과되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법이 미치는 파장을 정확하게 가늠하지 못하고 통과시켰기 때문입니다.

소수자의 인권보호라는 미명하에 국민의 입을 막게 되어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는 경로를 차단하게 되는 ...

2017년에 제가 LA에 갔을 때에, 한 학부형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자기 자녀가 초등학교를 다니는데, 성교육을 받았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학년이 되면 성교육을 합니다. 심지어는 콘돔 사용법 같은 것까지 가르칩니다. 그런데 동성애 섹스하는 방법까지도, 가르치더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충격을 받고 보고 와서는 너무나 혼란스러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데, 부모가 뭐라고 말해줄 방법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하지 않았겠지요. 처음에는 양성애 성관계에 대해서만 다뤘었겠지요? 그런데 그 반에 누군가가, “이것은 불평등합니다. 나는 동성애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데 차별감을 느낍니다. 동성애자의 성관계 법도 가르쳐주셔야 평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가지고 넣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26) 설교 동영상 갈무리

​이번 법의 대상이 네 영역입니다. 고용(*편집자주, 고용(모집, 채용, 교육, 배치, 승진·승급, 임금 및 임금 외의 금품 지급, 자금의 융자, 정년, 퇴직, 해고 등을 포함한다)), 재화 용역 등의 공급이나 이용(*편집자주,재화·용역·시설 등의 공급이나 이용), 교육기관에서의 교육 및 직업 훈련(*편집자주,교육기관 및 직업훈련기관에서의 교육·훈련이나 이용), 행정 서비스 제공이나 이용.(*편집자주,행정서비스 등의 제공이나 이용). 어떤 사람들은 일부이라고 합니다만. 사실 교육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전부나 마찬가지입니다. 교육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무엇을 살아야 되는지, 가치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내 자녀와 후손의 미래를 결정해 주는 곳이 교육이에요. 그런데 아직 누구도 동성애를, 정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라고 합의도 하지 않았는데, 왜 이것을 우리 아들이, 이 법 하나 때문에, 학교에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까? 이 법이 함축하는, 진실입니다.

사회 일각에서는, 교회에서 동성애가 죄라서 설교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는 이 네 가지 영역 속에 들지 않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의 팩트가 아니다,라고 역으로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진짜 해당사항이 되지 않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 교회 와서 설교를 듣다가, 지난주 같은 제 설교를 듣다가, 모멸감을 느끼고 고소를 하면 송사가 성립이 돼요. 그 사람이, 나는 교회는 종교가 아니고, 문화 영역이라고 봅니다. 혹은 교육기관이라고 봅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송사를 밀고 나가면, 결국은 이 송사가 성립이 되는 거예요. 처음에는 기각되겠지요. 하지만 고소가 쌓이고 또 쌓이고, 목사도 반복해서 불려나가게 되면, 결국은 그 설교는 못하는 것입니다. 설사 교회에서는 할지 모르지만, 유튜브에는 올리지는 못합니다. 인터넷은 미디어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왜 신앙의 양심을, 이 법 하나 때문에, 표기해야 되느냐? 이 자체가 헌법에 명기된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많은 헌법학자들이 지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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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저는 잘 이해가 안 돼요. 지금 코로나19에서 국민들 마음 똘똘 뭉쳐 하나로 합쳐도 이 난국을 타개해나갈 수 있을까 말까 한데, 우리 사회에 동성애 문제 말고도 지금 넘어야 할 이슈가 얼마나 많은 데, 지금 이것을 들이대어서, 정치에 대해서 교회가 신경을 쓰게 하고, 각을 세우게 하고, 국민들 마음을 나누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26) 설교 동영상 갈무리

저는 개인적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정 그렇게 진행을 하고 싶으면, 이 법이 함축하는 구체적인 내용들 아까 LA 같은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얘기들까지도 다 솔직하게 공개를 해서, 정식으로 국민투표를 해서 동성애 자체를 한국 사회 정식 가족관계, 혼인관계, 성 윤리 중의 하나로 확정하고, 그리고 난 뒤에 진행을 하더라도, 할 일이 아니면, 저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설사 그렇게 한다 할지라도, 목사인 저는 끝까지 찬성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신앙의 양심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도 아마 동일한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정식으로 국민투표를 해서 동성애 자체를 한국 사회 정식 가족관계, 혼인관계, 성 윤리 중의 하나로 확정하고, 그리고 난 뒤에 진행을

마태복음 5장 37절에,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나느니라.” 필요할 때는 분명하게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국교회로서 이법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에 주는 굉장한 도전이에요. 지금 교회는 굉장한 도전적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에 대한 입장은, 교회가 지혜롭게 다루지 않으면, 교회는 사랑도 없는 고집스러운 집단으로, 사회로부터, 그렇게 따돌림을 받게 되고, 사회와의 소통이 단절되는 아픔을 겪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지혜롭게 다루지 않으면, 교회는 사랑도 없는 고집스러운 집단으로,

사회로부터 그렇게 따돌림을 받게 되고,

사회와의 소통이 단절되는 아픔을 겪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사회와 악한 사회와 꼭 소통을 해야 되냐? 안 하면 안 되냐?”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소통을 꼭 해야 되고 성공적으로 잘해야지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 자체가 세상 속에 있어요. 우리 존재 자체가 세상 속으로 보내지고, 세상을 향해서 사명을 감당합니다. 그게 우리의 존재예요. 교회 주인이 되신 예수님께서 명료하게, 그리스도인의 존재됨에 대해서, 오늘 본문 말씀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능과 역할을 말씀하실 뿐만 아니고,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에 부름을 받았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26) 설교 동영상 갈무리

성도는 교회로 부름을 받았지만, 더욱더 크게는 세상 속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소금은 항상 뿌려지는 대상이 있는 거예요. 자신이 녹아져셔 짠 기능을 하는 내용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이고 사회입니다. 빛은 자신이 비쳐줘야 되는 현장이 있습니다. 그 현장이. 세상이고 사회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이 실현되는 장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게 바로 사회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레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저 아프리카 오지만이 선교의 현장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선교의 현장입니다. 복음이 뿌려져서 자라, 자라고 꽃 피고 열매 맺어야 하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건강하게 사회와 소통하고, 건전한 관계를 맺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많은 건전한 기독교인들이, 포괄적 차별 금지법을 반대합니다. 차별을 옹호하기 때문이 아니고, 성소수자 보호와 관련돼 있는, 독소조항 때문이에요.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 외에도,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인터넷상이나 여러 지면에서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이는, 교회의 진리를, 지극히 위축시키고, 죄를 죄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만들어서, 신앙을 제한하는 소지가 있을 뿐만 아니고, 그리고 이 자체가, 사회 전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방역 지침을 내릴 때, 교회가, 새문안교회가 억울한 것도 많고, 속상한 것도 많을 수 있지만,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따라가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것 때문에 행여나, 우리가 소통하는 사회가, 불편한 마음을 갖고 안전에 위협감을 느낄 것을 생각해서, 배려하는 것입니다. 많은 건전한 기독교인들이, 이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합니다. 차별을 옹호하기 때문이 아니고, 성소수자 보호와 관련된 그 안의 독소 조항 때문이에요. 그리고 이 부분들은 어떻게든지 우리가 법이 제정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말 맞다고 우리가 본다면은 여기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뭐냐 현실적으로는, 기독교인만의 힘으로는, 이 법을 저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래서 교회가 이 법이 제정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적극적인 협력과 사회에 있는 상식이 있는 사람들과, 공조하는 부분들이 대단히 중요한데, 이렇게 하려면, 세 가지를 염두에 두면서 이 법에 대한 자세를 견지해야 된다고 봅니다.

- 유튜브 예배 설교 중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26) 설교 동영상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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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면에서 교회는, 크게 세 가지를 염두에 두면서, 이 법에 대한 자세를 견지해야지 된다고 봅니다. 첫 번째로, 이 법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끼리 말하는 논리와 사회에 말하는 논리는 달라야 됩니다. 결론은 같지만, 말하는 논리는 달라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지난주에 제가 설교한 것처럼, “창조의 섭리에 맞지 않습니다”라는 것을 전제로 설득력 있게 말하면 충분합니다. 반면에 사회에는 건전한 상식과 이성적 합리적 설득력에 기반하여서, 그들의 언어로 말해줄 수 있어야 돼요.

​그래서 이 주장을 교회나 종교가 사회화할 때는 팩트 체크를 하는 것이 굉장히 합니다. 한 가지에서 팩트가 아닌 것이 드러나면은, 나머지 아홉 가지에서도 의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사회의 상식적이고 건전한 시민을 설득하지 않으면, 결국 이 법은, 이번이 아니더라도 언제인가는 통과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은, 교회를 책망하실 거예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는 너무나 신앙이 좋은 것이, 오히려 덫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가면 신앙의 진리를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사회의 언어로 말하는 데에 서툽니다.

한국 교회는 너무나 신앙이 좋은 것이 오히려 덫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가면 신앙의 진리를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는 사회의 언어로 말하는데에 서툽니다.

 

1930년도(*편집자 주, 실제로는 1925년 7월 21일)에 미국 테네시에서 원숭이 재판(*편집자 주, monkey trial)', 스콥스 재판(*편집자 주, Scopes trial. 정식 명칭은 The State of Tennessee v. John Thomas Scopes)이라는 것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소위 진화론과 창조론을 놓고 재판정에서 붙은 것입니다. 테네시 주가 기독 신앙이 워낙 탄탄한 곳이어서, 주 의회에서 아예 학교 교육기관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진화론을 옹호하는 과학자들이 중심으로 해서 변호사 단체를 만들게 되고, 이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변호를 해주겠다고 하게 됐는데, 스콥스라는 교사가, 결국은 이 변호사회와 합쳐서 정식으로 주를 대상으로 해서, 소위 소송을 걸게 됩니다. 결론적으로는, 법은 이 사람이 어겼기 때문에 백 불의 벌금을 받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는데, 그 당시 미국의 모든 언론과 사회기관들과 모든 사람들이 들러붙어서, 이 소위 재판의 진행 괴정을 보게 됩니다. 법적으로는 이겼는데 논리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패배하게 되어서, 그 뒤에는 미국에서도, 진화론이 사회에서 과학적이 사실로 진실로 인정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사회를 설득하는데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를 전하여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상황 속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언어로, 설득해낼 수 있는 힘을 교회가 가져야 된다..

왜, 이런 것이 일어날 수 있느냐? 교회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진리를 잘 변증해서, 사회에다가 이야기해 줄 수 있는 훈련이 안 돼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 우리 예수님은 이런 면에서는 소통의 천재이세요. 알아듣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진리를 말씀하시기 위해서, 그들의 일상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낙네들에게 얘기하기 위해서, 부엌에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 나와서 이야기를 하시고, 농부들에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들에 있는 것과 자연에 있는 것을 가지고 오셔서, 진리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으로,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의 모습으로, 지혜 있는 자에게는 지혜 있는 자의 모습으로. 지혜 없는 자에게는 지혜 없는 자의 모습으로 이야기한다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이야기하죠. “이렇게 하는 이유는 모쪼록 몇몇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이라”. 예수님의 진리를 전하여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상황 속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언어로, 설득해낼 수 있는 힘을 교회가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초기처럼 소위 전체 국민 인구 중에 1프로도 되지 않는 상황과는, 전혀 다른 막강한 재정과 인적인 힘과 조직력과, 엄청나게 교회 안에서, 잘 단련돼 있는, 신실한 지성인과 사회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회 속에 나갔을 때, 사회의 언어를 이 진리를 얘기해 줄 수 있도록 지금부터 눈을 뜨는 방법들을 찾아나가야지 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여서, 결국은, 이 사회를 빛으로 계도하는데 실패하면, 주님이 우리 보고, 보고, 얼마나 속상해하시고 게으르다라고 말씀하겠습니까?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26) 설교 동영상 갈무리

둘째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과학적 사실 여부가 아니라, 이 법이 미칠 사회적인 윤리적 의미를 놓고 더욱더 소통을 해야 됩니다. 아까 그 원숭이 재판 스콥스 재판에 대해서 복기를 하면서, 신학자들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과학적인 사실 여부를 놓고, 사회와 논쟁을 붙어서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라는 것들이 판명이 되었다면은, 빨리 그 영역의 중심을, 종교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영역인, 사회적인 의미나 윤리적인 가치의 문제를 가지고 싸움이 붙었다면, 결론은 전혀 달라질 수도 있었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 동성애에 대해서는, 합의된 과학적 진실이 아직 없는데, 이에 시간을 소모하기보다는, 가족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우리 사회에, 이 법이 어떤 윤리적 도덕적인 파장을 미칠지를, 사회에 잘, 설명을 해주게 되면, 저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26) 설교 동영상 갈무리

셋째로,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말하고 이일을 진행할 때, 누구도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사랑의 마음을 끝까지, 견지해야지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자칫 차별 금지법 찬성자는 적으로 여기고, 반대자만이 진정한 기독교인인이고, 신앙의 동지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죄송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바리새적 자기의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은 이 마음으로는, 사회와의 소통에도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법은 저지시켰는데 내 안에는 분노가 가득하다면,

그분은 이긴 것이겠습니까? 진 것이지요.

제가 십 년 미국 생활하는 동안에 미국에서 보닌 가끔 이일을 반대하는 분들 중에, 마음에 분노가 가득 차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속상해하는 것은 알겠는데, 누구를 향하는 분노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여러분, 이 법은 저지시켰는데 내 안에는 분노가 가득하다면, 그분은 이긴 것이겠습니까? 진 것이지요. 이런 일은 선지자의 마음이 아니고, 예수의 심정으로 해야지 이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정죄하거나 판단하면은 안돼요. 이 싸움은, 혈과 육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릇된 시대정신과의 싸움이고, 잘못된, 문화의 흐름과, 싸우는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들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사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래야,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새문안교회 주일 예배(2020.07.26) 설교 동영상 갈무리

성도님들, 이번 차별금지법은 한 번에 끝날 이슈가 아닙니다. 설교 시간에, 반대하는, 시사성 있는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2007년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회 법안이 발의가 되었었습니다. 이번에 설사 계류되더라도, 앞으로 계속 발의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교회는 이 이슈를 붙들고 계속 싸워야 되는 것인가요? 이 부분이, 바로 우리가 심각하게 기도할 부분입니다. 설사 이번에 계류되더라고 계속 나가는 이 법, 교회가 정말, 창조섭리에 입각한 성 윤리를 지키는 것이, 교회와 세상을 위해 유익하다고 믿는다면, 하나님께, 그것이 진정으로 영광이 된다고 믿는다면, 교회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사회를 설득하고, 공동보조를 취할 수 있는 지혜를, 지금부터 열어가야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영악한 청지기의 지혜를, 지금부터 가져가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사회를 설득하고,

공동보조를 취할 수 있는 지혜를, 지금부터 열어가야지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그 열심을, 교회를 통해 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성도님들, 세상이 가고 있는 잘못된 문화의 흐름을 보면서 손가락질하고 나는 반대다, 그냥 한번 외치고, 서명하고, 이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 성서적인 가치와 진리가, 세상 속에서도 도도히 녹아들어 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일들에 함께 마음과 기도를 모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교회가 터하여 있는 현실이, 대단히 만만치 않은 상황이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교회가 기도하는 그 걸음을 기뻐하시며, 하나님이 영광 거두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세상의 그릇된 문화의 흐름 속에 교회가 쓸려가지 않게 하시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녹록히,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와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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