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년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년
  • 정한욱
  • 승인 2020.06.05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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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헬드 에반스, 비아토르

저자는, 저명한 작가이자 영향력 있는 블로거였다. 복음주의자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보수적 신앙에 의문의 던지며 새로운 길을 찾아가던 저자는, 어느날 “성경적 여성의 삶을 문자 그대로 살아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여성과 관련된 모든 구절을 진지하게 연구해 “성경적 여성의 십계명”을 만든 후 1년간 이를 가감 없이 문자적으로 지켜나간다. 

이 과정에서 이 진보적인 페미니스트 복음주의자가 겪어야 했던 여러 에피소드와 깨달음을 솔직하게 기록한 흥미진진한 책이 바로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년』이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너무나 재밌을 뿐 아니라 성경 텍스트에 대한 깊은 연구와 탁월한 신앙적 통찰까지 가득 담은 이 매력적인 책에서 눈을 떼기가 쉽지 않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개인적 단상을 덧붙인다.

 

요약

 

저자가 만든 “성경적 여성의 십계명”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일에서 남편의 뜻에 순종할지니라. (2) 여성이 마땅히 집에서 해야 할 일(가사) 에 충성할지니라. (3) 어머니가 될지니라. (4) 온유하고 정숙한 성품을 기를지니라. (5) 옷을 단정하게 입을지니라. (6) 기도할 때 머리를 가릴지니라. (7) 머리칼을 자르지 말지니라. (8) 교회에서 가르치지 말지니라. (9) 뒷담화하지 말지니라. (10) 남자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지 말지니라.


온유 
(1) 시도 - 온유하고 정숙한 심성을 기른다(심지어 스포츠를 볼 때도). 뒷담화하는 습관을 끊기 위해 노력한다. 에티켓 수업에 참석한다. 관상기도를 훈련한다. 잠언의 다투는 아내처럼 행동할 때를 대비해 ‘맹세 항아리’를 만든다. 분란을 일으키는 행동을 하면 지붕에 올라가 속죄한다.

(2) 결론 - 온유함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소심함이나 고분고분함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진실함 · 확신 · 굳은 결심 · 자기 통제 같은 단어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내 성격을 바꾼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격의 통제권을 찾고 억제할 수 있을 만한 힘과 누그러뜨릴 만한 안정감을 갖게 된다는 의미다.

살림 
(1) 시도 - 기공식품이나 인스턴트 식품의 도움을 받지 않고 요리를 한다. 강박적인 살림 핸드북에 따라 청소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디너 파티를 연다. 추수감사절 만찬에 사람들을 초대한다.

(2) 결론 - 가사일과 가정을 돌보는 것은 고귀한 목표이며 모든 믿음의 백성이 결집한 만한 사안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정에 임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확증하고자 할 때, 집안일이라는 소명을 다른 모든 것 위에 두고 그 일은 오직 여자만의 몫이라고 떠넘기지 말아야 한다. 평화와 기쁨은 ‘살림’이라는 유일하게 ‘올바른’ 소명을 찾는 여성들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어떤 소명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하고 인생의 모든 구석에서 신의 섭리를 발견하는 여성들에게 속한 것이다.

순종 
(1) 시도 - 남편을 ‘주인님’이라고 부른다. “성경적 가부장제 운동”이나 ‘성경적’ 일부다처주의자들을 살펴본다. 여성 혐오로 희생된 성경을 여성을 기리는 행사를 연다.

(2) 결론 - 고대 이스라엘에서 ‘성경적 여성성’의 기초는 기본적으로 여성을 가부장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것이었으나, 성경에서 본보기로 추앙받는 여성들은 대부분 순종적인 역할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부장제를 성경의 질서로 옹호하며 그에 기초한 ‘성경적 여성성’을 높이려는 자들은 ‘공포의 본문(text of terror)’들에 나오는 레위인의 첩과 입다의 딸을 포함해 가부장제 아래서 무시되고 유린되고 짓이겨진, 성경의 행간에서 살다 죽어 간 수많은 여자들을 망각했다. 믿음의 여성들은 우리 딸들을 위해 그 어두운 이야기들을 기억해야 한다.

용맹 
(1) 시도 - 잠언 31장의 여인을 따라 한다. 해뜨기 전에 일어나고, 관상기도를 실천하며, 팔 운동을 하고, TV나 SNS를 멀리하며, 밤 9시까지 일한다. 직접 드레스를 만들어 입고, 뭔가를 만들어 경매에 붙여 가난한 사람을 도우며, 부동산에 투자하고, 길거리에서 남편을 찬양하며, 일주일에 한번 자원 봉사를 한다.

(2) 결론 - 잠언 31장은 한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찬양하는 시적 이상에서 여성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야 할 과제를 기록한 의무 목록으로 둔갑했다. 잠언 31장의 여인이 ‘용맹한 여인’(에쉐트 하일)인 이유는 그녀가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을 ‘용감하게’ 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 
(1) 시도 - 성경이 미와 성관계에 대해 ‘진짜로’ 무엇이라 말하는지 알아본다. ‘성경적 구혼’을 실천하는 커플을 인터뷰한다. 남편에게 ‘섹스 애니타임’ 쿠폰을 준다.

(2) 결론 -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여성 제자들에 대해 외모 등급을 매기지 않았으며, 성경은 아름다움이 찰나의 것이라고 끊임없이 강조한다. 부부관계는 침대 안에서든 침대 밖에서든 상대방을 섬기겠다는 결단이지만, 성을 종교적 의무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은 초점을 서로 섬기는 것에서 서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격하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름다움, 성과 같은 신비의 영역을 조직화하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것을 추하게 만드는 일이다.

정숙
(1) 시도 - 정숙한 옷차림을 한다. 머리를 가린다. 바지나 청바지 대신 원피스나 치마를 입고 장신구를 자제한다. 아미쉬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다.

(2) 결론 -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정숙함은 옷 · 화장품 · 장신구와는 별로 상관이 없으며, 정숙함에 대해 가르치는 대부분의 본문은 성적인 맥락이 아니라 물질주의에 대한 경고와 맥락이 닿아 있다. 사람들은 ‘정숙함’ 이라는 포착하기 어려운 개념을 규정하기 위해 성문화된 규칙을 만들며, 이 규칙들은 대부분 원래 목적이 망각된 이후에도 살아남는다. 문제는 무엇을 입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입느냐이며, 옷차림처럼 정숙함은 개인과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순결
(1) 시도 - 생리하는 동안 레위기의 정결 의식에 따라 12일의 의식적 부정 기간을 지내고, 부정한 첫 사흘 동안은 앞마당에 텐트를 치고 밖에서 지낸다. 순수한(코셔) 음식만 먹는다. 유월절에 집에는 모든 발효음식을 흔적조차 없앤다. 유월절 축제를 연다.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킨다.

(2) 결론 - 예수님은 정결법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인간이 되신 하나님인 그분이 먼저 한 일은 우리가 손대지 않는 이들을 만지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 고통에 함께 참여하시고 순결함은 몸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음을 영원히 선포하셨다.

출산
(1) 시도 - 육아서를 열심히 읽는다. 엄마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고백한다. 피임을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 가정을 살핀다. 베이비시터 노릇을 해 본다. 컴퓨터 가상 아기를 돌본다. (2) 결론 - 교회는 어머니들이 인정받고 존중받는 장소여야 한다. 그러나 모성이 여자의 가장 고매한 소명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비혼이거나 아이가 없는 여성들을 소외시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처사다. 그리스도인 여성의 가장 중요한 소명은 엄마가 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결혼을 했건 안 했건, 부자이건 가난하건, 불임이건 다산이건 한 사람의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복종
(1) 시도 - ‘모든 일’에 남편에게 복종한다. ‘돕는 베필’로 남편의 비서 노릇을 한다. 1950년대에 나온 ‘좋은 아내를 위한 규칙’을 지킨다. 성경적 복종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본다.

(2) 결론 - 성경에 나오는 남녀 간의 수직적 위계질서는 남성 가부장에게 일방적 권위를 부여하는 문화의 산물로, 죄로 인한 저주의 일부로서 인간관계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후 위계적인 관계는 그 자체로 허구임이 드러났으며, 바울은 인간 제도의 꼿꼿한 위계질서를 초월하는 공동체, 서로 복종하고 모두가 자유인일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갈 곳을 정해주는 ‘영적 리더’가 아니라 긴 여정을 함께 할 ‘영적 동반자’다.

정의  
(1) 시도 - 공정무역 제품을 쓴다. 쓰레기 재활용 본리를 시작한다. 전 세계 여성들의 평등한 권리 신장을 돕고 지지한다. 자선단체 월드비전과 함께 볼리비아를 여행한다.

(2) 결론 - 정의란 창조 세계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하게 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다. 성경의 여성들을 정의에 관심이 많았다. 여성들을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해결책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에게 모두 가셨고 사역하셨다. 이것이 자선과 정의 사이의 차이다. 정의는 궁핌한 자와 베푸는 이의 이분법을 넘어서, 우리는 모두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두렵고도 아름다운 현실을 직면하는 것을 뜻한다.

침묵
(1) 시도 - 교회에서 완전히 침묵한다. 가르치거나 발언하는 일을 피한다. 인터넷 휴가를 가진다. 수도원에서 사흘을 보내며 기도와 침묵, 관상 훈련을 한다. 퀘이커 교회를 방문한다.

(2) 결론 - 바울은 여성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문제 삼지 않았다. 그가 한때 불필요한 공격을 피하면서 사람들을 복음으로 이끌던 ‘여성의 침묵’이라는 가르침이, 지금은 불필요한 공격으로 사람들을 쫒아내는 데 악용되고 있다. 묵살당하는 것과 스스로 침묵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으며, (자발적) 침묵 속에는 힘의 저수지가 있다.

은혜
(1) 시도 - 유대인들이 명절에 먹는 빵인 ‘할라’를 만든다. 쇼파르(나팔)을 불고 전통 음식을 차려 나팔절을 지킨다. 새해 결심 목록을 쓴다. 죄를 회개하며 빵조각과 자갈을 물에 던지는 타슐리크 의식을 행한다.

(2) 결론 - 이 프로잭트를 마친 후 마음 깊이 구하던 허락들 - 리더십을 가져도 된다는 허락, 발언해도 된다는 허락, 내 역할 말고 다른 것에서 정체성을 찾아도 좋다는 허락, 나 자신이 되어도 좋다는 허락, 여성이 되어도 좋다는 허락 - 을 구할 필요가 없는 고요하고 자유로운 확신에 도달했다!

 

저자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배운 것 중 일상생활에 통합시켜 지속적으로 실천하기로 결심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매주 새로운 요리에 도전한다. (2) 더 윤리적으로 먹는다. (3) 용맹한 여인들을 찾고 칭찬한다. (4) 엄마가 될 가능성을 인정한다. (5) 관상적 자극을 기른다. (6) 의식과 기억을 위한 공간을 만든다. (7) 교회의 여성 리더십을 위해 싸운다. (8) 월드 비전의 파트너로 전 세계 여성의 교육과 권리 신장을 위해 일한다. (9) 남편을 진실한 파트너로 존중한다. (10) 성경을 계속 사랑하고 존중할 것이다.

 

개인적 단상

 

1. 이 프로젝트를 마친 저자의 결론은 성경이 여성성에 대해 한 가지 모델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천 년 이상 수집되었고 현대 문화와는 너무도 다른 고대의 한 성스러운 텍스트 묶음이 여성이 되는 방법에 대한 단 하나의 공식을 제공할 수 있는지 반문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칭송받는 여인들은 20세기 미국 바이블 벨트의 복음주의자들이 만들어 낸 ‘성경적 여성’의 이상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문화와 상황에 관계없이 자신의 삶을 용기 있게 살았던 사람들이었다고 강조한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여성성을 엄격한 역할 목록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역할은 문화에 따라 상대적이고, 상황이 바뀌면 바뀌는 것이며,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역할’이 아니라 ‘인격’이라는 것이다. 

저자에 따려면 ‘성경적 여성’이 되는 유일한 길은 
‘용맹하게’ 자신의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설령 성경의 인물이라도 누군가의 이류 버전이 되지 말고 자신의 일류 버전이 되는 것이다!

2.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된 내 신앙의 여정은 철저하게 ‘성경적’이라는 말이 ‘절대 진리’와 동일시되는 보수적 복음주의의 신학과 문화에 의해 빚어져 왔다. 그런 내게 기독교는 예배나 기도, 찬양 이전에 ‘성경’이었으며, 신앙생활이란 다른 무엇보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성인이 된 이후로 지금까지 꾸준히 지속해 온 성경 연구의 끝에 도달한 결론은 한국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이 고수하는 ‘성경적’ 기독교란 결코 시공을 초월한 ‘절대 진리’와 동일시될 수 없으며, 자신들의 특유한 기독교 하부 문화를 정당화하는 ‘선택적 문자주의’에 의해 형성된 일시적이고 지역적인 기독교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성경이 모두 문화적 상황에 놓인 것이기에 특정한 편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과학적 객관성의 한 유형으로서 이상적인 성경 읽기는 사랑이라는 편견으로 창조적인 해석을 하는 접근 방식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에 깊이 공감한다.

3. 이제 나는 자신들의 ‘성경적 기독교’가 가르치는 신학과 삶의 방식이 시공을 초월한 절대 진리라는 일부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단호하게 거절하지만, 그럼에도 기독교, 그것도 복음주의 기독교의 언저리에서 맴도는 이유는 그 단단하고 고루한 껍질 안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주가 숨겨져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엇이 탈피해야 할 껍데기이고 무엇이 품어야 할 진리인지를 발견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여정에서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실천적 과제일 것이다. 그 길이 어디로 나있을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아마도 내 출발점이었을 그 자리, 여성을 포함한 타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고, 인간의 죄에서 기인한 차별적 질서를 ‘성경’과 ‘창조 질서’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그 자리로 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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