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다 성경』의 '압살롬의 최후와 노새' 해석, 유감(1)
『열린다 성경』의 '압살롬의 최후와 노새' 해석, 유감(1)
  • 김동문
  • 승인 2020.05.17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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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노새를 통해 압살롬을 거부했다?
상수리나무 그늘 아래 나귀가 쉬고 있다. 김동문
상수리나무 그늘 아래 나귀가 쉬고 있다.  ⓒ김동문

성경을 읽는 독자가 곤혹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중의 하나는 같은 이름의 다른 사물이나 사람, 장소가 뒤섞일 때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상수리나무에 얽힌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상수리나무가 나무 종류가 하나 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무 종류도 다르고 그 특성도 다르다. 다음의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아래 인용문은 열린다 성경 : 동물이야기 50~52쪽에 나오는 내용이다.

 

유대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두 가지 상징?

 

아버지 다윗을 배반하고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압살롬은 자신의 왕권을 확실히 하기 위해 다윗을 죽이고자 한다. 하지만 이런 압살롬의 악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는데 성경 기자는 압살롬의 최후를 묘사하면서 유대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두 가지 상징을 복합적으로 사용했다.

현대인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압살롬의 긴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대롱대롱 걸린 우스꽝스런 모습에 초점을 맞추기 쉽지만, 사실 사무엘서 기자는 이 본문을 통해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 압살롬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첫째, 왕실의 전용 탈것인 노새가 스스로 왕이 되고자 일어선 압살롬을 나무에 매달아 둔 채 떠나 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노새의 행동을 통해 압살롬에 대한 거부를 나타내셨다둘째, 압살롬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나무에 매달리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했다. - 류모세(2010) 열린다성경 :동물이야기, 50, 51쪽

 

이 이야기를 살펴보기 위하여 먼저 글쓴이가 인용한 성경 구절 속으로 들어가 본다.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사무엘하 18:9)

 

에브라임 수풀 지역 전투 현장?

성경 이야기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상 이야기조차도 시공간이 바탕에 깔려있다. 오늘 다루는 이 사건의 무대는 '에브라임 수풀' 지역이다. 어디에 있는 지역인가? 에브라임 산지가 유대 지방 북쪽에 자리했으니 당연히 에브라임 수풀이 그곳의 한 지역일 것이라 상상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얍복강 상류에 닿아있는 길르앗 산지 지역이다. <두란노비전성경> 등은 "에브라임 수풀(Forest of Ephraim). 요단 강 서편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으로 다윗과 압살롬이 싸웠던 곳이다(삼하 18:6)."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은 적절하지 않은 설명이다. 이 전투 당시 다윗은 마하나임에 머물고 있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대부분의 지역이 압살롬의 통제 아래 놓여있었다. 그런데 전투를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에서 벌인다는 것은, 압살놈의 군사력이 장악하고 있던 상황을 고려하면 적절하지 않다. 이 전투 직전에 압살놈의 군대나 다윗을 따르는 무리 모두가 요단강 동편 오늘날의 요르단 북쪽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에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 이에 이스라엘 무리와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 치니라. (삼하 17:24, 26)

 

오늘 본문 속의 전투가 얍복강 가까운 곳에 자리한 마하나님에 은신하고 있던 다윗의 군대가 압살롬의 군대를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전투 현장은 당연히 마하나임에서 얍복강 북쪽에 자리한 길르앗(북쪽) 지방으로 공격을 하면서 펼쳐진 것이다.

Google Earth
동그라미 부분이 얍복강변의 마하나임 지역이다. ⓒGoogle Earth 갈무리

이런 점에서 에브라임 수풀 지역은 요단강 서편일 수가 없고, 당연히 예루살렘 가까운 곳은 더더욱 아니다. 압살롬의 전사 이후에 다윗과 따르는 이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Google Earth
큰 동그라미 부분이 에브라임 수풀지역이다. ⓒGoogle Earth 갈무리

 

어떤 상수리나무?

오늘의 이야기 "압살롬의 최후와 노새"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상수리 나무의 특성을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성경에 상수리나무로 기록한 나무도 참나뭇과의 상수리나무와 옻나무과의 테레빈나무나 피스타치오나무가 있다. 압살놈 이야기에 나오는 나무는 테레빈나무이다.

상수리나무(참나무)의 가지가 땅으로 향해 있다. ⓒ김동문
Davidbena / CC BY-SA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4.0)
상수리나무(테레빈나무)의 가지가 땅으로 향해 있다. ⓒDavidbena / CC BY-SA

 

그 나무의 가지가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특별하다. 가지가 땅으로 손가락을 뻗듯이 늘어서 있다. 그 밑을 지나가다가 머리카락이 걸릴 수도 있는 분위기이다. 이 특징은, 압살롬의 전투 현장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된다. 위에서 언급했던 관련 본문을 다시 읽어보자.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사무엘하 18:9)

 

ⓒfishhawk / CC BY

압살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라는 표현을 눈여져 보자. 그리고 압살롬이 그 가지 아래로 지나가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압살놈의 머리카락이 부지중에 그 번성한 가지에 걸려버리는 것,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 아니라, 공교롭게도 그런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저자가 "현대인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압살롬의 긴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대롱대롱 걸린 우스꽝스런 모습에 초점을 맞추기 쉽지만"이라고 반응했지만, 이 표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조심스럽다.

"압살놈의 긴 머리가 대롱대롱 걸린" 장면을 떠올릴 필요는 없을 듯하다. 상수리나무는 그 크기가 2미터에서 10미터 정도이다. '큰 상수리나무'로 묘사한 오늘 본문 속의 나무가 크다고 하여도 번성한 가지와 땅 사이의 간격이 높지 않았을 것이다. 노새를 타고 지나갈 정도였기 때문이다. 가지가 아주 높은 경우라면, 오늘의 사건 같은 일은 벌어질 수도 없다.

상수리나무가 멀쩡하여 그 가지가 높게 걸려있다가 압살롬이 그 밑을 지나가자 가지가 아래로 뻗쳐 그 긴 머리를 움켜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긴 머리카락이 걸릴 정도로 가지가 달려있던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압살롬이 순간적으로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린 것은 자연스럽다. 노새를 타고 있는 자세를 연결해서 보면 상상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노새가 빠져나간 뒤에도 압살롬이 매달려있어야 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압살롬이 가지에 걸려 매달려 있다고 보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다. 그렇기에 그 장면이 전혀 우스꽝스러울 것도 없다.

 

유대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두 가지 상징?

이제는 저자가 주목한 "유대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두 가지 상징"을 확인해보자.  

첫째, 왕실의 전용 탈것인 노새가 스스로 왕이 되고자 일어선 압살롬을 나무에 매달아 둔 채 떠나 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노새의 행동을 통해 압살롬에 대한 거부를 나타내셨다저자는 이와 관련해서는 별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혹시 노새를 타는 것이 마치 왕의 보좌에 앉는 것 같은 것이었을까? 노새가 주체적이고 자발적으로 압살롬을 나무에 매달아 둔 것일까? 압살롬의 긴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리고 노새가 가버린 것인가? 노새가 빠져나갔기에 압살롬의 머리카락이 걸린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하다. 노새가 빠져나간 것이 압살롬을 버린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노새가 빠져나간 것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압살롬을 거부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노새를 통해 이렇게 일을 벌이신 것인가?

그런데 노새는 다윗 왕 시기에 처음 등장하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소개하는 본문에만 등장할 뿐이다. 암말과 수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 율법이 금하고 있는 이종교배의 산물이다. 율법은 이종교배로 태어난 동물의 활용을 금하는 규정은 없다. 물론 이용하라는 규정도 없다.

다윗 왕 시대나 솔로몬 시대에 진상품으로 받은 것(왕상 12:40, 대하 9:24)이든, 이집트 제국 등에서 수입한 것이든, 노새의 사용에 관한 논란이 일어났을 법한 사건이다. 누군가가 이종교배를 지시한 것이라면 율법 위반일 것이다. 이종교배를 한 것을 외국에서 수입하여 단지 사용했을 뿐이라면, 율법에 합당한 것일까? 위법한 것일까? 어떤 면에서는 한국의 어느 시대에 수입 일제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 것은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다. 

 

"둘째, 압살롬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나무에 매달리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의미했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아래 성경 구절을 인용한다.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_21:22-23

 

신명기 21:22, 23절 본문은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넉넉하거나 적절한 것일까?

Elie Posner © The Israel Museum, Jerusalem
Elie Posner © The Israel Museum, Jerusalem

죽을죄를 저지르고 처형 당한 사람이라도 해도, 그 시체를 그날에 장례를 치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명령의 하나이다. 사형집행인 또는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인 것이다. 죽은 자를 두 번 죽이지 않도록 명령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점에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식에 자리한, 장례를 치르지 못한 죽은 자는 내세가 위협받는다는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범죄로 인해 처형당한 이조차도 당일 장례를 치러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사람의 당연한 분분이라 생각한 것이다.

 

처형당해 나무에 달리는 것과 긴 머리카락이 나무에 걸리는 사건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전혀 다른 단어를 한국식으로 비슷한 것,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조심스럽다. 이 주장은, 글쓴이가 '노새는 왕실의 전용 탈 것'이라는 그 나름의 근거를 바탕으로 펼친 것이다. 유대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두 가지 상징을 제시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근거가 부족해 보인다. 압살롬의 노새가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압살롬을 두고 빠져나간 것을 압살롬에 대한 하나님의 거부로 풀이한다. 상수리나무의 특성과 노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보인다. 관련 성경 본문을 입체적으로 풀이하는 것에 소홀해 보인다. 그는 압살롬이 나뭇가지에 걸린 것을 두고 나무에 달린 자로 이해하고, 이것을 하나님의 저주로 풀이한다. 관련 성경 본문에 대한 오해에 바탕을 둔 억측과 지나친 상상으로 보인다.

『열린다 성경』의 '압살롬의 최후와 노새'에 관한 해석은 글쓴이의 독특한 주장이 담겨있다. 나름 근거를 제시하고 논증을 펼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아쉬움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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