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성경] 만나? 이게 뭐지? 맛나? 일상에서 만나는 만나
[사진 성경] 만나? 이게 뭐지? 맛나? 일상에서 만나는 만나
  • 김동문
  • 승인 2020.04.29 03: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으로 떠올리는 성경 이야기(2)
ⓒ​​​​​​​김동문
ⓒ김동문

'만나', "이것이 뭣일까?" 성경 독자는 많은 경우 출애굽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공급받은 신령한 음식으로 기억한다. 마치 하늘에서 빵이 내려오는 것 같은 상상을 하기도 한다. 출애굽 광야 이야기 속에서 '만나'가 안겨준 존재감과 그 느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정착 생활을 시작한 출애굽 공동체는 또다른 일상에서 만나 사건을 어떻게 떠올릴 수 있었을까?

 

만나는 어떤 모양이었을까?

만나는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이들은 그저 떡으로 생각한다.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출애굽기 16:8) 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는 근거를 댄다. 그런데 성경이 '만나'에 대해 묘사하는 것은 아주 구체적이다. "깟씨 같다", "희다", "모양이 진주와 같다",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늘다". 이것만 바탕으로 해도 만나는 그 모양이 둥글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깟씨, 즉 고수풀의 씨앗이다. 이것을 갈아서 향신료도 사용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설명할 때, 말하는 이나 듣는 이에게 익숙한 다른 사물 또는 사람과 비교하기도 한다. 만나를 설명하면서 비교 대상으로 떠올린 것이 있다. 바로 '깟씨'이다. 깟씨는 1년생 허브인 고수풀(고수나물, 중국에서는 샹차이 香菜, 잎은 실란트로Cilantro로 부르는 코리안더Coriander이다.)의 씨이다. 향신료 코너에서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출애굽기 16:31)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민수기 11:7)

 

ⓒ​​​​​​​김동문
작고 둥글고 희미한 액체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식물이 있다. ⓒ김동문

만나는 언제 내렸을까? 생겼을까?

하늘에서 비같이 내렸다? 이 성경 구절을 보면서 그렇게 떠올리는 이가 있을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출애굽기 16:4). 그런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만나의 '비밀'을 성경은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만나의 특성과 연결되어 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출애굽기 16:13, 14)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 (민수기 11:9)

이 표현을 보면, 만나는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나타나는 존재이다. '밤에 이슬이 내린다'는 표현은 자연스럽다. 밤에 이슬이 내려 아침에 진 주위에 이슬이 맺힌 것을 보았던 것이다. 성경은 이슬이 맺힐 때에 만나도 등장한다고 말한다.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출애굽기 16:21)는 표현도 있다. 이런 표현은 전체적으로 만나의 속성이 액체성이라는 것이다.

ⓒ​​​​​​​김동문
진주같이 작고 둥글고 희미한 액체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식물이 있다.ⓒ김동문

 

만나, 거져 먹었다?

어떤 이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만나는 값없이 풍성하게 주셨다고 생각한다. 만나를 거져 먹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생각할 실마리를 주지 않는다. 만나는 거져 먹기만 하면 되는 음식 자체가 아니었다. 거둬들여야 했던 음식재료(?)였을 뿐이다. 좁쌀보다 조금 큰 깟씨 만한 작고 둥근 만나를 날마다 얼마만큼 거두었을까?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출애굽기 16:16)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어야 했다. 한 오멜은 2리터 이상의 부피이다.

2리터 먹는 샘물 패트 병 가득히 좁살만한 것을 주워 담는 것을 떠올려 보자. 어떤 느낌이 드는가? 그것은 엄청난 단순 노동이었다. 그것도 진영 안에 있는 공간이 아닌 진 주변의 광야에서 만나 줍기 운동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만나, 광야 생활에서 거저 먹은 것 아니었다.

광야에서 만나는 거둬들인다는 것은 힘든 단순노동을 필요로 했다. ⓒ김동문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출애굽기 16:16)

만나는 광야 생활 내내, 하나님으로부터 광야 공동체에 날마다 거져 주어졌다. 그렇지만, 그것을 백성의 날마다 반복되는 거둬들이는 수고를 통해서만 내 것이 될 수 있었을 뿐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만나?

유목 생활을 바탕으로 이뤄진 출애굽 광야 여정이 끝난다. 만나도 사라진다. 그렇다면 출애굽 백성의 정착 이후의 또다른 일상에서 '만나'는 어떤 의미로 자리잡았을까? 그 옛날 모든 백성이 향신료를 풍성하게 사용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사용하지 않을지라도 향신료의 존재감, 향신료의 하나였던 깟씨가 주는 느낌은 분명했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출애굽기 16:35 ).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여호수아 5:12)

ⓒ​​​​​​​김동문
일교차가 발생하는 시각에 작고 둥근 액체 덩어리를 만들어낸다. ⓒ김동문

그 새로운 일상에서, '광야의 만나'는, 깟씨의 존재를 통해 늘 기억될 여지는 없었을까? '깟씨와 같은 만나' 또는 '만나와 같은 깟씨'로 자리잡았을 듯하다. 광야에서 만나는 일상의 존재, 하늘의 선물로 자리했다. 정착 생활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또다른 존재를 담는 그림언어로 날마다 기억되었다. 고수풀, 고수나물 씨앗을 마주할 때마다 그랬을 것이다. 일상에서 깟씨를 향신료로 사용할 때마다, 광야에서 먹이신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명기 8:3, 16) 

출애굽 광야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였고, 그 은혜를 누리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었다. 또다른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만나는 날마다 주어지는 일용할 양식으로 다가왔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던"(출 16:18) 만나 공동체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나눔을 통해 그 만나를 새롭게 만났다. 만나는, 일상에서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통해 오늘도 내려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