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 적실한 ‘복음’의 패러다임 찾기
한국교회에 적실한 ‘복음’의 패러다임 찾기
  • 정한욱
  • 승인 2019.09.25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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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춘, 전환기의 한국교회, 대장간
김동춘, 전환기의 한국교회, 대장간

저자는 총신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현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와 느헤미야에서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 혼돈과 치욕에 빠진 한국교회에 가장 필요한 일은 ‘복음의 재발견’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과제는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면서, 동시에 ‘복음이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묻는 타당성과 현재성에 관한 질문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교회의 전환점마다 동시대의 요구에 부응해 새로이 등장했던 몇 가지 패러다임들의 특징과 한계를 살펴가고 있다. 위기에 처한 오늘의 한국교회에 적실한 ‘복음’의 패러다임이 무엇인지 찾아나선다. 저자에 따르면 그 패러다임은 ‘서술적 다원주의’는 인정하되 ‘규범적 다원주의'는 거부하는 “다원주의적 톨레랑스 기독교”이다. 이 책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고 몇 가지 단상을 덧붙이기로 한다. 

전환기의 한국교회: 이원론에서 세속화로   한국 개신교의 신앙적 패러다임은 분리-변혁-적응의 순서로 변화해 왔다. 초창기의 한국 개신교회는 성-속의 이원론에 근거해 세상을 등지고 내세구원과 개인구원에 치중하는 ‘분리형 기독교’가 우세했다. 그리고 60년대에서 80년대에는 독재적인 국가권력에 항거면서 사회변혁운동을 전개했던 에큐메니칼 그룹과, 복음의 총체성을 강조한 로잔언약과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중심으로 한 일부 복음주의권이 합세한 ‘변혁형 기독교’가 등장했다. 그러나 작금의 기독교는 세상의 질서나 구조와 충돌하지 않고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려는 ‘적응형 기독교’ 패러다임이 대세로 자리잡았다. 기독교 세계관은 세상-교회, 공-사, 사실-가치의 이원론을 극복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나, 작금의 한국교회는 기독교 세계관으로 이원론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무한히 긍정하는 세속화된 교회를 염려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총체적 복음주의 패러다임 :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균형    로잔언약과 기독교 세계관은 1980년대의 한국교회에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구조선 신학’과 ‘영육이원론’에 근거해 복음전도 · 영혼구원 · 교회설립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의 선교관과, ‘하나님의 선교’와 ‘타자를 위한 교회’라는 신학적 기초 아래 인간화 · 역사 안에서의 구원 · 해방을 강조하는 에큐메니칼 선교관은 1970년대까지 치열하게 대립해 왔다. 그러나 1974년 빌리 그래함과 존 스토트의 주도로 열린 로잔 회의의 선언문인 로잔 언약은 “복음전도와 사회 정치적 참여가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이라고 선언함으로서 복음주의 교회의 선교사명에 사회적 책임의 관점을 열어주었다. 이러한 로잔언약의 정신은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동반자 관계로 규정한 존 스토트와, 복음과 구원의 총체성을 강조하는 로널드 사이더를 거치며 ‘총체적 선교론’으로 정립되었다. 그러나 이 입장은 모두 ‘회심주의’에 근거한 ‘개인주의적 복음화 모델’에 근거해 있고, 복음과 사회정의는 명백히 구별되는 범주라는 견해를 지지하며,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다루는 구원사 신학의 지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한계를 보인다.  

신칼빈주의의 기독교 세계관 패러다임 :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주되심   기독교 세계관에 의하면 기독교는 단순히 구원 종교가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조망하고 그리스도의 주권적 다스림 안에 통합하기 위해 노력할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종말론적 변형을 통해 미래의 천국으로 진입할 것으로 기대하는 '삶의 체계'이자 ‘변혁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창조-타락-구속의 역동적인 내러티브로 구성되어 있으며, 창조로 형성된 선한 구조가 타락으로 말미암아 방향이 왜곡되었고 그것을 구속으로 변형(또는 회복)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타락이나 구속보다 창조에 강조점을 두면서 ‘일반 은총’과 ‘문화 명령’을 강조하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반드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구현하려는 ‘공적 신학’의 특징을 지니게 된다. 또한 삶의 각 영역이 침해받을 수 없는 고유한 주권을 하나님께 부여받았다는 ‘영역주권론’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기독교인’이나 ‘교회’의 통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서 이 운동이 신정정치적 승리주의로의 회귀라는 의혹을 불식시킨다.   

해방신학적 기독교 패러다임  : 역사의 밑바닥으로부터의 복음   20세기 기독교 신학의 흐름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점은 해방신학과 종교다원주의라 할 수 있다. 해방신학은 성경 텍스트가 아닌 라틴 아메리카의 압제와 불의라는 컨텍스트에서 시작되었고, 신학의 임무가 사회변혁을 통한 압제받는 자의 해방이라고 주장함으로서 정통교리보다 정통실천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으며, 백인의 손에 의해 쓰인 지배자와 승리자들의 신학을 ‘가난한 사람들의 인식론적 우위’를 통해 패배자와 희생자의 시각에서 재구성함으로서 신학의 중심과 관점을 혁신적으로 돌리게 한 거대한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이 신학에는 개인구원 없는 역사 내 구원과, 초월적 차원이 부재한 내재적 복음과, 수직적 차원이 결여된 수평적 교제만을 추구함으로서 궁극적으로 구원사가 세속사에 흡수되어버릴 위험이 상존한다.

아나뱁티스트적 대안주의 기독교 패러다임 : 철저 제자도와 대조사회   최근 한국교회에 소개된 아나뱁티즘은 교회가 복음화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상으로 나가기보다 교회가 교회로서 존재하고 그 본래성을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회의 존재 자체가 복음이고 선교며 사회의 대안이라는 것이다. 또한 ‘예수의 윤리’가 교회됨의 원형이라고 강조하면서 십자가, 급진 제자도, 대안공동체, 희년, 평화주의 등을 그 키워드로 제시한다. 이는 복음의 자리를 교회당 안에 가두는 ‘교회주의적 기독교’와 복음으로 창조세계 전체를 뒤엎겠다는 ‘세계관적 기독교’와 달리, 죄로 왜곡된 현세의 악마적 질서에 대항하는 ‘대조사회’ 혹은 ‘대항공동체’의 수립을 강조하는 대안주의 기독교 패러다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는 교회로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세상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한지, 그리고 그것만이 유일한 변혁의 방법인지에 대한 물음에 직면해 있다.

다원주의적 톨레랑스 기독교 패러다임   기독교는 다원주의를 그 특징으로 하는 현대 세계에서 점점 비이성적이고 불관용적인 종교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고 타자에 대한 환대와 공감을 그 특징으로 하는 톨레랑스 기독교의 필요성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는 이런 태도가 종교 간의 대화를 넘어 종교다원주의로 흘러가고, 종국에는 복음의 절대성과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정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의 종교적 진지성을 인정하고 예의를 지켜야 하며, 다원화의 현실이 존재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서술적 다원주의’에 동의해야 한다. 그러나 인류사회가 지켜야 할 보편적 규범을 다원주의의 이름으로 용납해서는 안되며, 다원적 진리와 가치가 존재한다는 ‘규범적 다원주의’는 거부해야 한다.  

 

개인적 단상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80년대 이후 사회참여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이 땅의 복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주요 운동과 인물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이 책을 읽어가며 과거 내 신앙의 여정을 돌아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자가 설명하는 모든 패러다임들은 한때 나를 매료시켰던 것들이었고, 각 패러다임의 대표로 제시된 저자와 책들은 지금까지도 내 신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의 나는 ‘기독교 세계관운동’ 이후로 만난 몇몇 저자들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복음주의자들은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지만 그리스도에 대해 '직접 들은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을 수 있다는 레슬리 뉴비긴이나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견해에 대해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우리가 ‘정통’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 서구기독교가 사실은 기독교의 일개 지역에서의 문화적 표현에 불과하며, ‘이신칭의’와 같은 전통적인 루터파 공식이 21세기 아프리카에서 16세기 독일에서만큼 강력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과연 옳은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마크 놀의 일갈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동일한 종교를 가진 종교인들이 모두 타종교와 명확히 구별되는 동일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며, 한 개인의 종교 안에는 여러 종교의 요소들이 다양한 형태로 섞여있다는 ‘구성적 상대성’이야말로 우리의 종교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식이라는 정재현 교수의 발언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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