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의책과일상] 나는 회심을 경험했는가, 경험하고 있는가
[김영웅의책과일상] 나는 회심을 경험했는가, 경험하고 있는가
  • 김영웅
  • 승인 2019.09.10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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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월리스, 회심, IVP
짐 월리스, 회심, IVP

아이러니하게도, 그리고 슬프게도, 이제 나는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회심을 경험한 건 아니라는 말에 동의한다. 물론 과거를 뉘우친 적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한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예수를 믿는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인간이기 때문이지, 예수를 믿기 때문이 아니다. 더구나 그건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심도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되었거나 작정해서 읽게 되었던 예수의 복음에 비추어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깨닫고 반성한 적도 있을 것이다. 깨끗한 거울에 비추면 얼굴에 묻은 얼룩이 보이듯,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복음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 자신이 그 동안 내밀하게 숨겨왔거나 의도적으로 무시 또는 회피해왔던 어두운 얼룩, 즉 자기중심적인 자기애나 위선 등의 직간접적인 죄악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과의 조우에서 아주 드물게 벌어지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러한 삶으로부터 돌아서겠노라 다짐한 뒤, 행동이 수반된 결단을 하게 되는 경우다. 흔히 우리는 이 순간을 회심이나 회개라는 단어로 무분별하게 표현하곤 하지만, 짐 월리스는 이 단계를 '회심'이 아닌 '회개'라고 구별한다. 회개는 과거를 정직하게 대면하고 그것에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회심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완전히 돌아서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회심은 회개로부터 시작하는 것일 뿐,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어디인가로부터 (from) 어디인가로 (to) 돌아서는 커다란 흐름을 회심이라고 정의할 때, 회개는 '어디인가로부터' 돌아서는 (turning from) 첫 과정일 뿐이다. '어디인가로' 돌아서는 (turning to) 과정을 그는 '신앙'이라고 정의한다. 즉, 회심은 회개와 신앙으로 이루어지는, 방향성을 가진 긴 여정인 것이다. 이 책의 제목부터가 '회심'이라는 것과, 저자가 밝히는 이 책의 과제가 "우리의 역사적 상황에서 회심이 의미하는 바를 발견하고, 회심의 성경적 의미를 찾아내어 우리가 마주치는 역사에 적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잡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정의하는 '회심'의 의미를 잘 숙지해둘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회심이다"라는 그의 절박한 외침을 한낱 잘못을 깨닫고 그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기특한 반성 정도로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 미래를 향한 비전과 구체적 방향성이 결여된 반성은 그저 의미 있는 인생의 한 점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런 수준은 감동적인 영화 한 편 본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책을 통해 진정한 회심을 말하고 있는 짐 월리스는, 그 긴 여정의 시작이며 이벤트성이 강한 '회개'보단,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구체적인 방향을 가진 '신앙'에 중점을 둔다. 이렇게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그가 말하는 회심이 달라스 윌라드가 그의 저서 '하나님의 모략'에서 말했던 '제자도'와 일맥상통함을 간파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전통적으로 구원 받는 순간이라고 알려져 있는, 소위 '칭의'의 순간이 아니라, (굳이 칭의와 구별하자면) '성화'의 여정에 있는 것이다. 물론 칭의와 성화를 나눈 것 자체가 신학적 장난질이라고 보는 나로선 그 구분에 더 이상 깊은 의미를 두지는 않지만 말이다. 달라스 윌라드가 우리에게 예수의 진정한 제자가 될 것을 요구했다면, 짐 월리스는 이 책을 통해 진정한 회심을 촉구한다. 둘은 서로 강조하는 면이 다르고 현실을 관찰하고 적용하는 부분이 다르다. 그러나 둘은 모두 예수와 하나님나라로 모인다. 그렇다. 제자도나 회심이나 결국은 깨닫고 반성하는 과거의 이벤트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기 쉬운 경험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공적인 삶으로 공동체와 함께 하나님백성으로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것에 방점이 있는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가 그의 저서에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과 제자도를 오해했다고 한탄하는 것처럼, 짐 월리스는 이 책에서 복음주의자나 자유주의자 할 것 없이 모두 시대를 향한 회심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허둥대고 있다고 말한다. 회심을 강조해왔던 미국 교회의 강점이 실제로는 회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터무니 없이 낮은 이해도로 말미암아 가장 커다란 약점이 되었다며 그는 냉철하게 관찰 결과를 정리한다.

그는 복음주의권에서 자라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릴 적 역사적 실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진공 속 '구원'을 받았으며, 그때의 회심은 개인적이고 추상적이었다고 고백한다. 이어서 그는 교회 안에서의 그러한 개인적인 습관과 관행에 초점을 맞춘 회심이 아닌, 오히려 디트로이트에서 벌어진 인종주의의 잔혹한 실체와 대면하면서부터 좀 더 깊은 회심이 시작되었다고 회고한다. 사적인 복음, 그리고 사회성과 역사성이 결여된 진공 속 복음은 회개를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요소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 이후에 반드시 찾아올 삶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진정한 회심으로 이어지긴 어렵거나,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복음의 공공성이야말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보다 잘 녹아있는 부분이며, 복음이나 하나님나라, 그리고 교회라는 개념 자체도 원래부터 개인이 아닌 공동체에 주어졌음을 상기할 때, 짐 월리스가 고백한 '깊은 회심의 시작'은 어쩌면 그가 경험한 '첫 회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우리들은 과연 진정한 회심을 경험했는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짐 월리스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문제에 관심이 지대하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존재 자체가 세상 속에 있다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을 직접 살아내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알다시피 그는 워싱턴 D. C. 에 터전을 잡고 있는 소너저스 공동체를 시작한 사람이다. 급진적인 복음의 실천가로서 그의 통찰은 예언자적인 목소리가 되어 이 시대에 부의 축적과 평화를 위한 폭력의 이면에 놓인 미국과 부유한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찔림을 주며, 쓰지만 꼭 필요한 목소리로 자리매김했다.

이 책에서 제공되는 성경 해설과 시대의 분별은 모두 그가 소너저스 공동체로부터 나온 역사적 실체를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목소리에는 특별히 강한 어휘나 표현이 없지만,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움직이고 깊은 울림을 주는 힘이 있다. 도저히 빨리 읽을 수가 없는 책이었다. 나는 거의 한 달 동안 이 책을 천천히 읽으며 많은 묵상을 하면서 읽어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1981년에 출판된 초판이 아닌, 그로부터 24년 후인 2005년에 출판된 개정판으로 읽었다. 알다시피 저자의 통찰은 책상 위가 아닌 역사적이고 사회적 실체인 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것이다. 그리고 초판과 개정판 사이의 기간에는 9.11 테러가 있었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있었다. 전쟁과 평화라는 쟁점을 다룬 부분에 있어서 그는 개정판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 사이에 트럼프 대통령 당선이 있었다면, 아마 개정판을 내는 데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되어주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미국 기독교 우파의 움직임과 행태 이면에 놓인 타락은 회심을 더욱 필요로 하는 상황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을 막론하고 회심에 대한 신학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회심만이 유일한 소망이며 예수의 제자도를 살아내기를 촉구한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회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풀어주는 1장 '부르심'을 지나면, 2장 '배반'을 맞이한다. 저자는 여기서 말뿐인 기독교, 공공성이 사라지고 자기중심적인 자기애를 옹호하며 복음을 사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린 현대 그리스도인의 실상을 파헤친다. 구약 성경을 이루는 커다란 두 축인 정의와 공의가 사라져버린 일상, 예수가 증발해버리고 자본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기독교의 변질을 고한다. 그는 복음 전도에서 죄와 구원의 사회적 의미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참된 복음 전도는 개인사에 대한 회개뿐 아니라 우리의 집단적 역사에 대한 회개를 점화할 것이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회심하는 것은 개인적 이기심과 문화적 무지를 모두 극복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두 가지 중요한 질문, 즉 가난과 폭력에 대해 그 실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주제에 대한 성경의 내용을 이끌어와서, 그러한 문제들과 관련하여 회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우리는 여기서 짐 월리스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이 두 가지에 압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의 화두가 혐오, 배제, 차별이라는 죄악에서 돌아서서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회복하는 것에 있다고 할 때, 가난과 폭력은 핵심적인 양날개를 이루는 직접적인 현장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우리 시대에 성경적 회심이 회복될 것인지, 그렇다면 어떻게 회복될 것인지를 결정할 중요한 요인들이라고 그는 확신한다.

3장 '불의'에서는 가난과 빈곤, 그리고 가난과 빈곤을 착취하여 반대급부로 축적된 부요함의 물리적 실체와 그 이면에 깔린 영적 실체를 진단 및 보고한다. 성경은 가난을 개인의 무능력이나 잘못의 결과가 아닌, 부요하나 완악한 자들의 억압으로 이루어진, 소위 '합법적인' 제도와 구조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본다. 성경은 자주 반복하여, 가난한 자들이 겪는 착취와 고통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를 맘몬에 대한 예배로 대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난에 대한 무게중심은 가난한 자가 아닌 부요한 자에게 있는 것이다. 짐 월리스는 미국의 관대함과 자유주의적 국외 원조에 관한 모든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세계 자원의 흐름은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로 지극히 일방적으로 향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으며, 역사를 통틀어, 부유한 자들은 자신의 번영이 다른 사람의 빈곤에 기초한다는 점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고 보고한다. 그리고 올바른 질문은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줘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언제쯤 가난한 자들로부터 빼앗기를 멈출 것인가?"라고 말하며, 가난한 자들이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문제라고 역설한다.

모든 사람이 우리의 생활 기준으로 살 만큼 충분한 자원이 있다거나, 우리는 열심히 일한 데다 신의 은총을 받아서 부유하다거나, 가난은 가난한 자들의 실패 때문이라는 생각은 모두 가난한 자로부터 강탈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체제가 고안해 낸 무자비한 신화일 뿐이라고 그는 비판에 날을 세운다. 청지기의 책임을 부여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는 대신에 착취자가 되어왔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우리 시대의 회심은 가난한 자들을 해방하고 눈먼 자들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가난한 자들에게는 정의가 필요하고 부유한 자들에게는 시력 회복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또한 그는 가난한 자들과 우리를 동일시하길 요구하며, 그들을 위한답시고 의도적으로 가난한 체한다거나, 그들에게 말하거나 가르치거나 심지어 일방적으로 도우려는 자세보다는 우리 스스로를 그들의 말을 듣고 변화될 자리에 놓아두라고 제안한다. 가난한 자들의 존재를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있으라는 것이다. 이 방법만이 가난한 자들에게 부유한 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라면서 그는 소저너스 공동체가 경험한 바를 증거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회심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의 교제를 위해 우리 재물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이다.

전쟁과 폭력, 그리고 전쟁과 폭력으로 이룩한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의 실상에 대한 짐 월리스의 성찰은 제 4장 '위험'에서 잘 드러나있다. 전쟁과 평화라는 문제를 그는 단지 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닌 신학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전쟁과 평화는 완악한 마음에 기인하는 것이며, 성경적으로 말해서 완악한 마음은 고의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완악함에 대해 성경이 처방하는 해독제는 바로 회심이라고 역설한다. 결국 마음을 부드럽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뿐이라는 말이다. 선악을 자신의 유익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마음껏 판단하는 행위는 소위 '원죄'라고 불리는 사건의 열매다. 그 열매를 따먹은 우리 인간들은 완악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었고, 폭력을 쉽게 휘두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해석을 전제할 때, 회심이 해독제라는 그의 말은 곧 회개를 시작으로 하여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이루어진 과정 중에 맺힐 열매라는 의미일 것이다. 예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에서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만드는 자들로 부르심을 입었다. 그러므로 회심한 자들은 사적인 평안을 유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의 평화를 만드는 자들로 알려져야 할 것이다. 짐 월리스는 이웃에 대한 긍휼의 갱신을 포함한 회심이야말로 평화로 가는 단 하나의 영속적인 길이라고 설파한다. 가난한 세상에서 회심이 가난한 자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듯, 폭력과 보복적 폭력의 세대에서 회심은 수많은 희생자의 인간적 실제성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며, 각각의 경우 회심한 사람은 바로 인간 고통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자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회심한다는 것은 희생자들에 대한 긍휼을 갖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곧 우리 마음에 자기자신만이 아닌 타인의 인간적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다.

가난과 폭력에 대한 우리들의 물리적 영적 실체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한 이후,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방향성을 인지하고 신앙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는 바로 공동체다. 제 5장 '비전'에서 짐 월리스는 기독교 공동체, 즉 교회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인다. 교회가 교회되도록, 다시 말해, 말과 글만 앞세우거나 개인의 평안과 구원만을 추구하는 사적인 공간이 아닌, 그렇다고 정의를 부르짖거나 세상에 저항하는 행위만 강조하는 집회 공간도 아닌, 코이노니아, 곧 단순히 교회가 되어 서로 사랑하고 세상을 위해 자신의 삶을 제공하라는 부르심에 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교회가 교회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앙공동체의 성경적 정체성과 소명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체성과 소명을 깨달았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진 않는다. 생각과 성격이 다양하고 다채로운 인간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이유만으로 교회의 역사는 배교한 교회로부터 참된 교회가 되겠다며 갈라져 나와 또 다른 배교한 교회의 유형을 더 많이 만들어내는 악순환의 구조를 이루어왔다. 새로운 교단과 분파를 만들어내는 것은 한계를 가지는 것이다. 짐 월리스는 여기서 교회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말하는 일에 더 힘을 쏟는다고 한다. 교회들에게 성경과 그들의 전통에 있는 갱신의 씨앗에 대해 짚어주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역사 한가운데서 예수를 높이는 데 실패하고 회중 가운데 분쟁만 일으켰던 이유를 사랑의 실패에서 찾는다. 올바른 것을 깨달아도 그것을 상대방을 향한 비난과 정죄의 무기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사랑이 없다. 그는 성경의 예언자들이 신랄한 말을 쏟아냈음에도 그들은 그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면서, 교회를 향한 우리의 소망도 교회를 향한 사랑에 근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바로 용서와 겸손을 겸비한 예수의 사랑 말이다. 또한 급진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저 견디며 살아내는 것이 아닌 경축하는 일상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러기 위해선 바로 서로에 대한 사랑의 활력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경축의 소망과 기쁨이야말로 우리의 저항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며, 세상과 반대로 사는 삶이 초래하는 냉소주의, 신랄함, 증오로부터 우리를 구해낼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랑이 전제될 뿐 아니라 경축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써 하나님나라를 지속하며 살아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짐 월리스는 그것이 바로 '예배'라고 답한다. 급진적인 복음의 실천가인 그가 내놓은 답이 '저항'이 아닌 '예배'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제 6장 '근원'에서 그는 예배와 저항의 관계를 나무 뿌리와 그 가지들의 관계에 비유한다. 회심은 언제나 우리의 뿌리, 곧 우리의 첫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함한다고 하면서, 회심에 대한 모든 시험은 우리가 누구인지와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기억하는지 시험하는 것이라고 재해석한다. 예배는 우리를 망각에 빠지게 하는 모든 상황 한가운데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것이며, 예배는 다름 아닌 우리의 뿌리를 다시 떠올리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예배가 전제되지 않으면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교회가 교회될 수 없으며, 그렇게 되면 가난과 폭력에 휘둘리는 세상 속에서 거스르기는 커녕 함께 떠밀려가면서 세상과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변화를 일으킬 수가 없다. 회심도 그저 사적인 회개 정도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즉, 회개로 시작한 회심을 신앙으로 지속하며 하나님나라로 살아내기 위해서 예배는 그 모든 삶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는 말이다. 예배하는 중에 우리는 정체성과 사명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든 공적 저항 활동이 사랑과 진리의 능력 가운데 뿌리를 두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또한 예배는 우리의 목표가 비폭력적인 진리이지 권력이 아니라는 점도 기억나게 해주는 장소이며 우리 안에 있는 우상들에 직면하게 해주어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을 주장하게 만들어주는 공간이다. 가장 깊은 의미의 회심은 예배를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기쁨, 평화, 사랑 등의 성령의 열매로써 하나님백성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가시적인 신앙공동체, 악과 불의에 저항하는 공동체, 그러나 기쁨과 찬양과 사랑의 경축을 지닌 공동체. 바로 교회의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 장인 7장 '승리'에서 짐 월리스는 진정한 회심을 한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궁극적 승리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당연히 인간이 정의하는 힘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상징되는 예수의 승리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를 개인적 죄에서 자유롭게 할 뿐 아니라, 이 세상의 권력에서 해방되게 한다. 그러한 권력들과의 관계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것, 곧 그들로부터 도덕적으로 독립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진리는 부활로써 보증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로 가까이 가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의 정치적 입장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그 정당성을 입증 받은 입장이었다고 하면서, 회개하고 새로운 실재를 믿는 것이 회심의 본질이라고 역설한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사랑으로 하나님나라를 살아내는 바보들의 존재. 바로 개별적인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의 가시적인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짐 월리스는 경계에 선 그리스도인이다. 우익복음의 눈에는 급진적인 좌파로 보일 것이며,

좌익복음의 눈에는 여전히 보수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우파로 보일 것이다.

짐 월리스는 경계에 선 그리스도인이다. 우익복음의 눈에는 급진적인 좌파로 보일 것이며, 좌익복음의 눈에는 여전히 보수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우파로 보일 것이다. 실제로 소저너스 공동체를 만들고 그들과 함께 살아내는 모습은 좌파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실제로 일상에서 쉽게 해내지 못할 삶이기에 그는 확실한 좌파다. 그러나 여전히 회심의 핵심을 회개와 신앙으로, 신앙의 핵심을 예배로, 예배를 통해 정체성과 사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설파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아직도 보수진영의 그물에서 허우적대며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기에 그는 우파로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계선상의 위치가 어쩌면 오히려 그를 예언자적인 목소리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익의 복음도 좌익의 복음도 아닌 하나님나라 복음. 짐 월리스를 통해 뭔가가 정리되는 기분이다. 말과 글이 언제나 몸을 앞서 나가는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이 책은 하나의 도전이 되어줌과 동시에 방향을 제시해 준 듯하다. 돌아서서 살아내는 하나님나라. 다시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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