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의책과일상] 박힌 가시 뽑기
[김영웅의책과일상] 박힌 가시 뽑기
  • 김영웅
  • 승인 2019.09.25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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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매니큐어 하는 남자, 한길사
강남순,
강남순, 매니큐어 하는 남자, 한길사

한 번 박힌 가시는 곧바로 뽑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상처 난 피부는 가시를 머금은 채 아물기 시작한다. 경미한 상처였다면 상처 날 때 침입한 세균은 몸 안의 면역반응으로 인해 모두 적군으로 판정되어 제거될 수 있다. 그러나 가시는 면역반응의 제거 대상에서 제외된다. 가시는 적군이 아닌 이물질이다. 살아있지도 않고 죽어있지도 않은, 그래서 죽일 수도 없는 이물질. 표면상 치유된 피부 안에 여전히 갇혀 존재하는 이물질. 제거 방법은 다시 뽑아내는 수밖에 없다. 단, 이것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다시 그 부위에 상처를 내야 한다. 가시가 박힐 처음과는 달리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내는 상처다. 가시가 박혔을 때 곧장 제거했었더라면 굳이 낼 필요가 없는 상처. 그러나 건강한 몸을 위해서는 다시 상처를 내서라도 가시를 뽑아내야 한다. 아무리 아프더라도, 아무리 피하고 싶더라도 말이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회를 건강한 몸에 비유한다면, 획일성을 강요하여 존중과 배려보다는 혐오와 배제를 작동시킨, 우리 사회에 내재된 폭력성은 몸에 깊숙이 박힌 가시와도 같다. 그리고 이물질을 머금고 표면상 아문 상처는 곧 우리의 병든 사회의 단면이다. 겉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거짓과 위선으로 물든, 박제된 평화가 깃든 사회이다. 이런 현실을 사는 우리들은 자연스레 그 체제의 유지를 위하여, 혹은 그 체제를 이용하여 더욱 그 체제를 견고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데에 길들여졌다. 이성적으로는 억압적인 위계구조가 나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이마저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현실은 현실이라며 스스로 이상과 현실을 이분법으로 나눈 뒤, 당연한 삶의 방식으로 그 체제를 받아들였다. 그것들은 단호하게 거부하거나 부숴버려야 할 장벽이 아닌, 그저 약간만 발전시키고 조정하고 다듬기만 하면 언제든지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암묵적인 묵인으로 일관해왔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는 인식론적 폭력이 만연해졌고, 그에 따른 인식론적 사각지대가 범람했다. 그러나 루이스가 간파했듯, 악을 수정하고 발전시킨다고 해서 선으로 만들 수는 없다. 지옥을 개량해서 천국을 만드는 게 아니다. 천국과 지옥은 결혼할 수 없다. 악은 박힌 가시처럼 제거 대상이지 공존 대상이 아니다.

강남순의 책, '매니큐어 하는 남자'를 읽었다. 이 책은 그녀의 가장 최근 저서로써, 이전에 출판된 '정의를 위하여'와 '배움에 관하여'에서 나타난 큰 흐름을 잇는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줄기가 "존재 방식의 획일성을 강요하는 폭력성을 넘어서 모든 개별인들이 서로를 온전한 존재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로서는 이번이 강남순을 다섯 번째로 만나는 기회였지만, 서로 다른 맥락에서 쓰인 네 권의 책에서 만났던 동일한 강남순을 난 이번에도 만날 수 있었다. 저자의 글을 한 두 번만이라도 읽어본 독자들은 이 책의 제목에서부터 그녀의 메시지를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쓴다. "'매니큐어 하는 남자'는 억압적인 엄숙주의와 위계주의를 매니큐어라는 작은 몸짓으로 무효화시키고, 폭력적 젠더 고정관념을 자연스럽게 뒤집는 행위의 상징이다." 즉, 이 책은 사회에 너무나도 충만하여 견고한 성처럼 우리 눈 앞에 우뚝 서있는 인식론적 폭력의 체제에 흠집을 내고 균열을 내는,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그러나 전복적인) 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장, '낮꿈꾸는 사람들'에서 저자는,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향한, 그리고 '아직 아닌 세계'에 대한 희망을, 한 번에 한 걸음씩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탈일상성을 지향하는 비판적 성찰을 통하여, 우리들의 말과 행동 모두에서 능동적인 변혁을 꾀하며 함께 걸어가자고 제안한다. 마침내 도래할 나라를 포기하지 말고 기다리며, 소망의 끈을 놓지 말고 함께 가자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희망하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쓴다. "희망의 근거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낮꿈을 꾸면서 '홀로-함께' 그 세계를 이루어내고자 씨름하는 현장 한가운데에 있다. 결국 나 자신은 물론 타자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열정과 새로운 힘을 주었다면 희망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 그렇다. 거대하고 찬란한 승리를 바라는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면 족하다. 나의 상처도 누군가에겐 치유로 작동할 수 있듯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열등감과 패배감에 종종 휩싸이는 나도 왠지 모르게 힘이 났다.

두 번째 장, '페미니즘, 성숙한 민주사회를 위한 밑거름'에서는 저자의 페미니즘에 대한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페미니즘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사회는, 저자의 말처럼, 단지 '여성'의 평등성만이 확보되는 사회가 아닐 것이다. 시작은 남성 아닌 여성이라는 젠더 문제였을지 몰라도, 페미니즘은 젠더만이 아닌 인종, 계층, 장애, 성적 지향 등의 다양한 영역에 침투하여 차별 받고, 소외 당하고, 억압 받는 주변인과 소수자들이 온전한 인간으로 자신이 권리를 당연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평등과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지향한다. 페미니즘은 우리 몸 깊숙이 박힌 가시를 뽑아내는 통로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반드시 뽑아내야만 하는 이물질. 우리 사회에 박힌 억압과 차별의 체제에 대한 저항의 통로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 페미니즘을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세 번째 장, '함께 사는 세계를 향하여'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바로 이 책의 제목으로 선정된 '매니큐어 하는 남자'다. 그 남자는 실제 저자의 수업에 참여했던 학생이다. 그러나 저자는 늘 '평범했던' 그 학생이 자신의 열 손톱에 매니큐어를 하고 왔다는 사실보다 그의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의 반응이 더 흥미로웠다고 한다. 그들의 반응은 '무반응'이었다. 이때의 '무반응'은 '관심 없음'의 무반응이 아니라, '다름에 대한 존중'의 의미였다. 이어서 저자는 질문한다. 만약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고 말이다. 함께 사는 세상에서 '획일화된 존재 방식의 절대화'는 거세되어야 마땅하다. '획일화의 폭력성'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한, 다양한 존재 방식을 존중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저자의 말에 나는 동감하고 또 동감했다.

네 번째 장, '신의 이름으로'에서 저자는, 박힌 가시와도 같은 '획일성의 절대화'가 신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그 폭력성이 극대화되는 현상을 종교를 통해 보여준다. 제왕적인 목사의 권력이 당연시되는 기독교, 환대와 연민과 사랑이 가득해야 할 곳에 배제와 혐오와 미움이 대신 자리한 기독교, 성서를 이용하여 성서가 말하는 바를 반대하고 배척하는 이율배반적인 기독교. 저자는 여기서 급진적인 제안을 한다. 한국 기독교에는 이단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와 억눌린 자의 목소리를 듣고 은혜를 똑같이 베푸시는 예수의 가르침, 즉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선 정통과 이단으로 나뉘는 이분법적인 위계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참 정통'의 한가운데에는 예수의 사랑, 즉 타자에 대한 책임성, 환대, 돌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반대가 중심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는 정통 기독교는 정통이 아닌 오히려 이단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정통이 이단이 되어버리고, 이단이 정통이 되어버리는 이 모순된 한국 기독교를 생각하면, 여전히 기독교인인 나 역시 언제나 마음이 아프다.

마지막 다섯 번째 장, '우리 안의 작은 저항자들'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에피소드는 '우리 안의 '택시운전사''일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 '택시운전사' 시사회에 다녀온 뒤의 저자의 통찰이 묻어나는 글이다. 그녀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국가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혀 영웅적이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인간됨의 모습을 가까스로 지켜냈는지를 보았다고 한다. 저자가 간파한대로, 희망의 근거는 영웅적 승리의 보장이 아니다. 조금 못나고, 조금은 이기적인, 그래서 가까스로 각자가 자신의 영역에서 인간됨을 지켜내고 있는 우리들 모두는 바로 택시운전사일 것이다. 예수가 로마를 단번에 박살내는 정치적 영웅으로 오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평범한 일상의 작은 몸짓으로 우린 협력하여 선을 도모할 수 있다고 난 여전히 믿는다.

이미 한국 사회는 가시가 깊숙이 박힌 몸과도 같다. 이물질인 가시를 제거해내기 위해선 의도적인 상처를 내야만 한다. 상처가 나면 또 아프겠지만, 그 아픔은 거짓된 건강이 아닌 온전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피라미드의 위계체제는 사람들을 나누고 이간질하여 분쟁을 유도한다. 어쨌거나 피라미드 위에 앉으면 선이 되는 세상이다. 그 견고한 성벽과도 같은 체제가 우리 앞에 서있다. 이게 현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포기하지도 말고, 희망을 버리지도 말고, 비록 부족하고 연약하더라도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협력하여, 작지만 확실한 흠집을 내서 그 성벽에 균열을 가하자. 일상의 작은 부분에서 냉철한 이성으로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따뜻한 심장을 가지고 행동으로 나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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