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웅의책과일상] 충직과 성실의 맥락
[김영웅의책과일상] 충직과 성실의 맥락
  • 김영웅
  • 승인 2019.08.20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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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자신의 소유가 아닌 집을 자신의 집보다 더 완벽하게 관리해야 하며,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보다도 집 주인을 더 우선시하여 섬겨야 하는 직업. 타인을 섬기도록 운명지어진 직업. ‘집사’라는 직업에 가장 어울리는 두 단어가 있다면, 충직과 성실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섬겨야만 하는 주인에게 도덕적인 결함이 있거나,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을 경우, 게다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까지 있을 경우, 이런 주인을 섬기는 집사의 충직함과 성실함은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러한 맥락에서도 여전히 충직함과 성실함이라는 덕목이 ‘위대한 집사’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위대한 집사라는 개념이 과연 상황에 독립적일 수 있을까.

이 책의 주인공은 평생 달링턴 경을 섬기며 그의 저택 (달링턴 홀)을 관리했던 총 책임자, 스티븐스 집사다. 그는 어릴적부터 집사였던 아버지를 통해 진정으로 위대한 집사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직접 보고 들으며 배웠던 사람이다. 그는 누군가에겐 위대한 집사의 자질일 수도 있는, 화려한 언변과 박학다식을 그저 집사의 부수적 능력으로 여기는 과감함을 가진 사람이며, 그런 자질보다는 주인을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섬기는 충직함과 성실함에서 집사의 위대함과 품위를 찾는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가 숨을 거두시던 순간에도 집사의 본분을 다하느라 임종을 함께 할 수 없었던, 아니 함께 하지 않기로 선택했던, 사람이다. 지독스레 충직하고 악착같이 성실했던 그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그때의 일을 회고할 때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들의 불효가 아닌, 가족까지 희생하며 본분을 다했던 집사로서의 프로페셔널리즘을 기억한다. 그는 실로 자타가 공인하는 위대한 충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함도 주인이 어떠한 사람이었냐에 따라 훗날 해석이 달라질 수 있고, 제아무리 자신을 스스로 높게 평가한다고 해도 결코 합리화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결국 집사는 주인의 그늘 아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무대가 되는 장소는 영국, 때는 1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국이 히틀러가 이끈 패전국 독일의 책임을 묻는 시기 즈음이다. 달링턴 경은 영국의 총리와 독일 대사를 자기 집으로 비밀리에 초대할 수 있을 만큼의 영향력을 가진 엘리츠 층이었다. 그를 모시던 스티븐스에겐 위대한 집사가 되기 위해서 더할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달링턴 경이 최후에는 그의 고고한 (그러나 나중엔 나이브했다고 판명이 나는) 영국인스러운 신사다움 때문에, 역사적으로 독일의 히틀러 편을 들어준 사람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이슈는 그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를 충직하게 모시던 스티븐스 집사는 마치 달링턴 홀과 함께 일괄처리되는 품목 중 하나인 것처럼, 미국에서 건너온 새로운 주인 패러데이 경의 집사로 넘겨지게 된다. 이 책은 패러데이 경이 출장 가는 시기에 맞춰 스티븐스 집사가 주인의 휴가 제안을 기어이 받아들이고 일주일 간 자동차 여행을 떠나게 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스티븐스 집사가 고심 끝에 휴가를 떠나기로 결정했던 이유 중 하나는 예전에 달링턴 홀에서 총무직을 수행하다가 결혼 때문에 서부로 떠난 켄턴 양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달링턴 경의 몰락으로 인해 달링턴 홀은 이름과 규모만 유지된 채 예전의 명성을 모두 잃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 스티븐스에겐 고작 몇몇 사람만으로 큰 저택을 관리하고 있던 어려운 시기였고, 인원 부족으로 여러 사소한 문제까지 터지고 있던 찰나였다. 마침 날아온 켄턴 양의 편지에서 스티븐스 집사는 그녀의 결혼이 거의 파경에 이르렀다는 것과 그녀가 다시 달링턴 홀로 복귀하고 싶어한다는 뉘앙스를 읽어낸다 (하지만 결말 부분에서 이는 그가 잘못 짚은 것임이 드러난다). 함께 일할 때 앙숙이기도 하면서 남녀 간의 묘한 감정까지 그녀로부터 받았던 기억은 좀처럼 떨어지기 힘든 그의 발걸음을 기어코 옮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언뜻 보면 이 책은 스티븐스 집사가 그의 일주일 간의 휴가 중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한 회고록이나 일기 정도에 불과하다. 잔잔한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을 겪으며 떠오르는 상념들, 그리고 지난 날을 되돌아보며 추억에 잠기는 등의 자연스러운 삶의 사소로움을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화려한 나날들을 보내고 이젠 인생의 저녁을 맞이한 한 인간의 삶을 조망하기에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듯하다. 게다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터라, 그가 내뱉는 독백이나 문득문득 떠오르는 상념들에 이어진 과거의 추억들은 모두 우리 개개인의 내밀한 일상과 그대로 이어져있어, 평소에 잔잔한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읽을 때 조용히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날에 대한 후회와 합리화의 경계를 왔다갔다하며 자신의 과거를 곱씹는 건, 인생을 살며 낮은 곳을 지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집사로서의 품위를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에게 있어 집사의 품위는 곧 충직함과 성실함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믿었던대로 살아냈다. 나름대로 성공한 삶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주일 간의 여행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변호한다. 변호는 방어기작이기에 누군가의 공격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를 공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미 몰락하고 생을 다했던 달링턴 경에 대한 무성한 소문만 냈을 뿐이다. 그럼에도 스티븐스가 자신이 평생 믿어온 가치에 대해 의심하고 합리화까지 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그가 달링턴 경을 자신과 동일하게 여겨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의 명예가 곧 그의 명예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똑같은 논리로, 주인의 몰락이 곧 그의 몰락이가도 했다는 의미로도 해석 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주인과는 달리,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지도 않을 뿐더러 지금은 새로운 주인을 모시는 집사였다. 몰락을 경험했지만 몰락하지 않은 중간 상태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가 믿는 품위가 텍스트라면, 그의 옛 주인의 평판은 컨텍스트다. 컨텍스트의 몰락은 텍스트의 독립성을 저지한다. 택스트가 가진 고유한 가치까지도 희석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며, 때론 정반대의 평가까지도 마다해야만 한다. 어쩌면 틀린 컨텍스트에서 바른 텍스트는 해적선에 탄 성실한 해적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아이히만처럼 충직함과 성실함이 평범함의 옷을 입고 악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는 모습과 같을지도 모른다. 악의 평범성을 다시 한 번 힐끗 떠올리게 만드는 스티븐스 집사의 삶이 황혼 무렵 비스듬히 깊게 들어오는 햇살처럼 애처롭게 느껴지는 이유다.

하지만 그는 해적선의 성실한 해적과도 달랐고, 아이히만과도 달랐다. 책을 끊임없이 관통하고 있는 그의 내밀한 독백이, 다행히도, 자랑과 거들먹거림이 아닌 후회와 합리화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평생 믿어온 가치를 스스로 의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치는 다시 아로새기면 될 일일지도 모르지만, 지나간 인생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인생에는 저녁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녁이 인생의 끝은 아니다. 이번 여행이 그에게는 어쩌면 새로운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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