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환] 용서해주시는 예수님, 능력을 키우려는 사람
[김동환] 용서해주시는 예수님, 능력을 키우려는 사람
  • 김동환
  • 승인 2019.08.18 23: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동환 목사의 설교 -  요한복음 8:1-11 

1. 13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8월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대학생이 안 계셔서 별로 와 닿지 않으시겠죠? 저는 이제 다음 주면 학교로 끌려갑니다, 방학이 벌써 끝나가네요. 아이들이 방학 때 실컷 놀고 와서 ‘선생님 이제 공부 열심할게요!’ 하면 좋겠으나, ‘이제 본격적으로 놀아볼까?’ 이런 마음으로 올 것 같아서 벌써 걱정입니다. 방학 때 이것 이것 해야지 계획이 많았는데, 역시나 안됐어요, 그래도 계획을 짤 때 행복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습니다. 대신 사람을 아주 많이 만났어요. 거의 매일 약속이 잡혔던 것 같습니다. 올해 전반기에 학교 일하고 저녁에 학원을 다니느라 약속들이 많이 밀렸던 것 같아요. 남은 한주는 최대한 약속을 잡지 않고 제가 해야 할 일을 좀 하려 합니다. 수업준비도 좀 하고요, 정리할 것 정리하고 새로운 준비도 하려 해요. 지난주 목요일에는 사진 정리를 했어요. 여기저기 외장하드, 핸드폰에 저장되어있던 사진들을 연도별로 정리해서 웹하드에 보관해두었어요. 언제 적 사진부터 가지고 있나 봤더니, 대학교 3학년 때부터 핸드폰,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이 정리되어있더라고요. 좀 더 일찍부터 사진들을 정리하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13년 정도의 이야기는 잘 정리되어있으니 이것도 다행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을 잘 정리하시는 편이신가요? 몇 살 때부터의 사진들이 정리되어있는지요? 대학교 3년이면 제가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본격적인 리더, 교회 임원 등을 맡을 때에요. 그전에 교회를 다니지 않을 때도 귀한 친구들, 관계들이 많았는지 잘 보관하지 못했구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어요. 그리고 대학교 과 친구들과의 사진도 많이 없더라고요. 너무 교회에, 기독교 동아리에 파묻혀 살았나?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실제로 과 친구들과 도 잘 어울리긴 했는데요, 과대표도 했었고요. 그런데 사진으로 남겨진 게 별로 없는 게 좀 후회스럽더라고요. 사진들을 쭉 보면서 제가 만나온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신앙 안에서 만난 관계들이 많았는데요, 지금도 연락하는 분들도 있고, 지금 연락을 하지 않는 분들도 많았어요. 아주 짧게 만난 관계들, 사진 속에 있지만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분들도 있고요, 보고 싶지만 만날 수 없는 분들도 있었어요.

사진들을 보고, ‘잘 살았네!’라는 생각과 ‘너무 대충 살았나?’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어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되는 걸까? 아니면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걸까?라는 고민이 솔직히 들더라고요. 이건 좀 더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 같아요. 제가 좀 더 잘했어야 했는데 라는 아쉬움이 좀 컸다고 할까요? 그렇다고 더 잘할 수 있는 건 아닌데, 이게 딜레마 같습니다. 오늘 나눌 주제와 관련하여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13년의 시간 동안 저는 크게 ‘업그레이드’ 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길을 걸어온 13년 동안 큰 변화가 없었어요, 믿음이 말이죠. 믿음이 더 커지지 않았고요, 처음 믿었던 그 믿음과 비슷해요.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좀 더 깊어졌다고 할까요?

 

2. 기도의 능력이 커지는 방법?

이해가 깊어지면 믿음이 더 커진거 아니에요? 이렇게 물으실 수 있겠어요, 좀 더 와 닿게 말씀드려볼게요! 처음 신앙생활 시작했을 때나 지금이나 기도를 해도 응답되는 게 별로 없어요. 아주 없다고 하면 여러분이 다음 주부터 안 나오실 것 같아서, ‘별로’라고 해봅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음의 크기라고 한다면 전혀 변화가 없었다는 말이에요. 어떤 어떤 훈련과정을 거치면 기도의 능력이 향상되는 게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매일 5시간씩 기도를 하고, 5시간씩 성경공부를 하고, 5시간씩 봉사활동을 하면, 그렇게 5년을 하면 기도가 응답받을 확률이 50프로 올라간다고 상상해볼까요? 여러분은 5년 동안 그렇게 하실 수 있겠어요?

저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의지가 약한 편이긴 한데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거에는 올인하는 편이거든요. 수년간 그런 훈련을 겪으면 기도의 용사가 될 수 있다는 게 있으면 저는 당장 시작했을 거예요. 실제로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 비슷한 훈련과정을 제가 알아서 찾아서 해왔었고요.  이걸 욕망이라는 말로 표현해볼까요? 거룩하고 싶은 욕망, 기도의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더 잘 쓰임 받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께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가고 싶은 욕망. 제 생각에는 그런 욕망이 여기에 계신 그 누구보다 제가 강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신학교를 갔겠죠. 이게 거룩한 열정인 줄 알았는데 그냥 욕심이더라고요.

 

3. 예수님 시대의 신앙의 롤모델

그 욕망의 사람, 거룩에 대한 욕망의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죠. 태어나서 아이 때부터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나기 위해 온갖 기도훈련, 성경암송, 해석 훈련으로만 자라나던 사람들이에요. 눈뜨면 기도하고, 시간마다 기도하고,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성경을 해석하고 기록하는 사람들. 그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이고, 유대인들의 롤 모델이 되었겠죠? 나도 저분들을 따라 믿음을 더 강하게 해야지, 내 신앙의 레벨을 끌어올려야지, 이런 정신적인 목표가 되는 사람들이 서기관, 율법 교사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스스로가 이런 생각이 있는 거예요,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의로운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실 것이다. 저 사람들은 죄인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 더러운 사람이다, 하나님께 버림받을 것이다.’

제가 거룩에 대한 욕망이 많았다고 했잖아요? 이게 동전의 양면과 같아요, 거룩에 대한 열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내가 생각하는 거룩의 조건에 멀리 있는 사람을 정죄하게 돼요, 자기가 거룩한 심판관이 되는 거죠, 순간적으로 하나님인 것처럼 세상을 심판자의 눈으로 보는 거죠. 심판하는 마음을 가질 때, 무의식적으로 ‘나는 저 사람보다 괜찮아, 그러니까 하나님이 저 사람보다는 나를 더 사랑하실 거야’ ,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건 제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거룩에 대한 열망에 빠져있을 때의 모습을 돌아보면 알 수 있거든요. 오늘 본문을 그렇게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면서도 또 사람들을 정죄해요. 아무리 읽고 읽어도, 거룩한 심판자 놀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어요. 오늘 본문은 사실 제발 그렇게 좀 살지 말아라, 너네 정말 왜 그러니!라는 내용인데 말이에요, 제가 왜 그랬을까요?

 

4. 간음한 여인을 마주한 예수님

아침에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왔어요. 그때 작정하고 믿음의 사람들(?)이 한 여인을 데려오지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요, 아침부터 말이죠. 그리고 이 여인을 예수님 앞에서 고발합니다, 간음을 한 여자라고, 예수님 어떻게 해야햐죠?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테스트하려고 데리고 온 거죠?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평소에 사회가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주고 고쳐주고 용서의 말씀을 전하셨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하실는지 테스트하는 거죠.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면 전에 쌓아온 이미지와도 다를 뿐 아니라, 사형법은 당시에 로마의 허락을 받아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모세의 율법만 가지고 사형을 명할지... 그러면 로마법에 잡혀가는 거고, 만약 거절하면 율법을 거절하는 어려운 상황인 거죠.

일단 이 상황이 생각해볼 점이 많아요, 신명기 22장에 보면 이 간음한 여인에 대한 율법이 생각보다 복잡한데요, 일단 결혼한 사람들의 간음은 죽이라고 되어있고요, 미혼인 경우에는 그것보다 좀 약해요. 그리고 간음 상황이 성 안이면 확실히 간음이니까 남자와 여자 둘 다 벌을 주게 되어있지만, 성 밖의 경우에는 여성이 폭력을 받는 상황일 테니 남자만 처형하라고 되어있고요. 오늘 본문을 보고 상상하건대, 율법 교사들은 예수님을 시험에 들고자 간음에 관한 정보는 바싹 끌어모았을 거예요. 예수님이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곳, 그리고 그 날 새벽이든 아침이든 미리 잡아두고 예수님께 데려올 수 있는 상황에 맞는 간음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을지... 그런데 또 남자는 어디로 갔을까요? 남자는 돈을 받고 풀려난 건지, 미리 정보를 받아서 합의하에 여자만 넘기기로 한 건지 모르겠어요. 잡혀온 여자가 억울하다고 하지 않는 걸로 보아 간음 상황이 맞긴 한 거 같거든요. 죄를 지은 자, 율법을 어긴 자, 돌로 쳐서 죽여야 할 여인. 이 여인은 사람들과 예수님 앞에 강제로 놓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갑자기 엉뚱한 행동을 하시죠? 땅에 무언가를 적어요, 여러 가지 주석이 있고, 설명들이 있으나 모두 상상입니다. 율법을 적었을 수도 있고요, 이 나쁜 XX들, 지독한 놈들, 이렇게 감정표현을 하셨을 수도 있고요. 아무도 모릅니다. 갑자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한마디를 듣고, 사람들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냥 돌아섭니다. 굉장한 한 마디였죠.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 무진장 고생했던 율법 교사, 서기관들은 속으로 부글부글하면서도 돌아설 수밖에 없었나 봐요. 돌로 쳐서 죽이고 싶으나, 사실 자기네도 로마법이 무서워서 돌아간 것일 수도 있고요. 평소에 자기들도 율법대로 하지 않으면서, 아니 지킬 수 있는 율법만 입맛대로 골라서 지켜놓고는 남을 공격할 때는 이렇게 정성을 다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또 세상법은 무서워서 그냥 돌아섭니다. 비겁한 거죠?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자 여인에게 묻습니다. “너를 고발하던 사람들, 너를 정죄하던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여인이 눈을 들어 보니 확인을 하고는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5. 그냥 용서해주고 믿어주시는 예수님

어떤가요? 당시에 가장 믿음이 크다던 사람, 기도의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군중들도 그렇게 믿는 율법 교사들의 모습. 믿음과 사랑이 충만한 사람으로 보이나요? 여러분은 백번 죽었다 깨나도, 당시의 이 율법 교사들보다 더 열심히 신앙의 훈련을 받지 못할 거예요. 눈뜨고 감을 때까지 성경말씀만 연구하고 암송하고 기도만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렇게 살 수 있나요? 영성의 대가가 되기 위해 그 정도의 노력을 하실 수 있으세요?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통해 저희가 다시 확인하고자 하는 건 개신교 교회가 공통으로 고백하고 있는 ‘이신칭의’ 교리예요. 이신칭의, 그러니까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는 고백이거든요. 이행 득의 와 다르죠? 행동으로, 실천함으로 의를 얻는다가 아니란 말이에요?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아요. 자, 이제부터 내가 너를 1년간 살펴볼 거야, 밤낮 살펴볼 거고, 머릿속까지 검사할 거야, 1년 365일, 8760시간을 검사할 거야, 그래서 네가 또 이 죄를 짓는지 안 짓는지, 어떤 선한 실천을 하는지 테스트를 할게, 그리고 이제는 괜찮다! 합격이다! 하면 너를 용서해줄게, 그러면 더 이상 죄인이 아닌 의인이 될 수 있어! 이게 아니란 말이에요, 예수님은 그런 조건을 달지 않아요, 그냥 나도 네가 죄 있다 하지 않을게, 하지만 대신 조리된 행동은 하지 말자, 앞으로는 다르게 살아보자, 너를 위해서.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을 먼저 믿어준다는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신칭의을 어떻게 설명하냐면 옷일 입혀주는 걸로 비유를 해요. 우리는 속이 거먼 상태로 똑같은데, 하나님이 깨끗하고, 아름답고, 멋진 옷을 입혀주시는 거죠. 우리는 그 옷을 입은 사람답게, 용서받은 사람답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에 맞게 살아가길 하나님께 부탁받는 거죠. 우리는 여전히 우리예요. 변한 건 하나도 없어요. 믿음이 커지는 게 아니란 거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커져서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이 교정되는 게 아니에요. 거꾸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신이 사람에 대한 신뢰를 받아들이는 게 되는 과정이 신앙인 거예요. 이런 나를 용서해준다고요? 이런 나를 믿어준다고요? 이런 나에게 무언가 기대를 한다고요? 이런 나를 사랑하신다고요? 이런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고요?

이렇게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을 영혼의 좀 더 깊은 곳까지 받아들이는 훈련이 신앙의 과정인 거예요. 머리로만 알던 것들이, 영혼의 심연까지 내려가는 과정인 거죠. 그래서 기도의 능력이 더 커진다거나, 믿음이 커진다거나, 그런 훈련과정은 없어요. 이걸 가장 깔끔하게 인정하는 교회가 개신교회예요. 가톨릭, 정교회도 교회지만, 이신칭의 교리를 가장 엄밀하고 정교하게 다듬고 믿는 교회가 개신교회거든요. 그래서 이 이해를 하지 않으면 개신교인이라고 할 수 없어요. 개신교회에 다닌다고 개신교인이 아닌 거예요. 교회 다닌다고 기독교 신앙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 처람 말이죠.

 

6. 이신칭의

저는 이신칭의 교리를 삼위일체와 더불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보아요. 신앙의 두 축이죠. 이신칭의. 교회가 2000년 동안 가장 치열하고 진지하게 토론해온 주제거든요. 그래서 살짝만 맛보기로 루터의 이야기를 조금만 해드릴게요. 중세 교회 시대에도 이런 고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좀 더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을까? 그런데 이게 한 끗 차이로 이상하게 변질될 수도 있는데요,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같은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약간 후자의 질문은 능력개발과 같이 보이죠? 그래서 한 끝 차이로 이게 겸손이 될 수도 있고 욕망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선한 생각과 하고 선한 행동을 해서 우리 안에 습관화시켜야 한다는 그룹이 있었고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니까 그걸 잘 꺼내서 쓰면 된다고 말하는 그룹이 있었어요. 여러분은 그게 그거 아니겠냐 하겠지만, ‘하나님’을 빼고, 그냥 사람이 할 수 있다고 하면 그걸 ‘펠라기우스’라고 해서 교회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고 말했고요, 조금 복잡하죠?. 그냥 깔끔하게 사람은 거기서 거기야! 이러면 좋겠는데, 신부님들 보니까 먼가 보통 사람보다 거룩해 보이잖아요? 그래서 이걸 정리해보려다 보니 좀 복잡해진 거예요, 성화의 단계를 설명해보려는 거죠.

그래서 이 선한 ‘의’를 내 안에서 확장시킬 수도 있고, 저장할 수도 있고, 심지어 전달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생겨난 거예요. 우리가 유에스비에 자료 담아서 넘겨주듯이?.; 누군가 선한 행동을 했으면 그 의를 어떤 루트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도 할 수 있다 봤는데, 그게 공로, 공적 개념이에요. 왜 성상을 세워서 거기 기도하고 그런 모습 있잖아요? 가톨릭의 그런 모습은 이단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신앙의 체계, 이신칭의가 약간 엄밀하지 않게 다루어져서 그런 모습이 생겨났다 보시면 되겠어요. 이게 긍정적인 효과로는 내가 선한 행동을 하나하나 실천하는 게 중요해, 그 실천이 결국 쌓이는 거니까, 하나님께서 그 쌓이는 모습을 보고 좋아하실 거야! 이런 효과가 날 수 있고요, 반대로, 의의 갑질이 일어날 수 있죠. 신부님은 일반 성도와 급이 다른 존재야, 매일 기도하고 수련하기 때문에 넘사벽의 거룩이 묻어났거든. 그러니까 말씀 잘 듣고, 성실하게 사세요! 이렇게 위화감을 조장할 수도 있죠.

루터도 이런 가톨릭 시대 사람이잖아요? 우리도 다 아시겠지만, 면죄부 문제가 그래서 컸죠, 정확히는 면벌부예요. 죄의 용서는 예수님이 하시는 거고, 다만 그 죄의 크기에 합당한 벌을 받아서, 회개의 행동으로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완전한 용서의 단계에 들어간다고 교회가 가르쳤거든요. 비판을 할 수도 있지만, 그냥 참회의 기도로 끝! 하는 이상한 개신교보다는 더 괜찮다고 할 수 있는 면도 있긴 있어요, 이 부분은 다음에 나눌게요.

문제는 이런 거예요, 여러분은 가족, 친척이 다 기독교인이신지 모르겠지만, 기독교 신앙 고백을 하지 않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이게 고민이 되는 거거든요, 하나님이 과연 그 사람을 받아주실지... 설령 기독교인이어도 아직 그 사람이 죗값을 다 치르지 않고 소천했다고 하면 그건 어떻게 할지...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죽은 이를 위해서도 기도하며 중보 하곤 했었어요. 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그 사람이 바로 천국에 못 갔어도, 하나님 앞에서 성화의 과정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어느 개신교 집단에서 하듯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렇게 수학공식처럼 하는 게 그렇게 전통적이라고 보긴 어려워요. 연옥이란 개념이 개신교는 인정하진 않지만, 교회의 오랜 생각이긴 했으니까요.

공적 개념이 연옥과 합쳐졌을 때, 긍정적으로는 이런 효과가 있어요. 아, 내가 부모님이 못다 한 것, 용서를 구해야 할 일이 있으면 내가 대신 선을 행해서 갚아드려야지, 아니면 내가 하나님의 일을 더 열심히 해서 하나님을 진지하게 받아 들시지 않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하나님품에 안기도록 열심을 다해야지, 이런 열심을 줄 수 있죠. 그래서 루터도 죽은 이를 위해 기도를 하라고는 했거든요. 이게 문제 됐던 건 돈문제죠. 헌금을 하면, 아직 연옥에서 훈련받고 있는 당신들의 가족이 그 벌을 행하는 기간이나 강도를 줄여서 더 빨리 천국에 갈 수 있다, 기도나 ... 선행보다 헌금이 더 효과가 있다... 이러면서 성단 건축을 하니까 헌금을 더하라 ... 이러면서 이게 문제가 커졌던 거예요. 루터는 신부로 살다가, 이런 믿음의 문제, 거룩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살짝 성경에서 포인트를 좀 벗어났다는 걸 파악하고 공론화 한 사람이에요.

루터가 다녔던 비텐베르크 대학은 사실 당대로 따지면 진보적인 가르 침하던 가톨릭 신학교였어요. 비아 모데르나, 새로운 길이라고 말하는 가르침이었거든요. 의란 어떻게 얻는 것이냐? 신과 인간 사이에 이런 계약이 있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하면 신은 그 인간을 구원해주고 의롭다 해주는 것으로. 이렇게 의를 계약관계로 설명하려는 방식이 예전의 ‘의’를 설명하는 방식과 다른 새로운 현대적인(?) 길이라 하여 비아 모데르나라고 했어요. 루터는 나름 가톨릭 안에서도 이렇게 새로운 물결의 흐름을 타서 공부를 했던 신부였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의는 우리 안에서 확장되는 게 아니고, 그냥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는 게 더 성경적임을 말했어요. 이게 종교개혁이란 교회 개혁 운동의 핵심 키, 열쇠였거든요. 그냥 부정부패 줄이자 이런 게 아니에요. 이 안에 더 치밀하고 정교한 논리와 토론들이 있는데, 더 말하면 상처 받으실 것 같아서 나중에 좀 더 풀어서 설명해볼게요,

정리를 해보자면 이런 거죠. 오늘 여인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셨어요. 죄를 용서하는 말씀을 하셨죠? 그 여인이 뭔가 공적, 선행을 쌓아서 때까 차서 찾아오신 건가요? 정반대죠? 율법 교사들에 의해 끌려온 거예요, 죽임 당해 마땅한 여자라고 끌려온 거예요. 예수님이 사람을 찾아오는 방식이 이런 거라는 거예요, 여러분을 찾아가시는 이유는 여러분이 선을 많이 쌓아서가 아니라, 그냥 여러분이 하나님 눈에는 귀해 보이는 거예요. 제 눈에는 다 똑같아 보여도(?) 하나님 눈에는 특별해 보인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분이 알았어요, 구원의 은총을 알았어요, 그럼 믿음을 어떻게 더 키워야 하나요? 좋은 믿음으로 더 성장시켜야 하나요? 믿음은 여러분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확장되는 게 아니에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거죠, 하나님이 여러분을 신뢰해주는 거예요. 그냥 사랑해주시는 거고요, 믿음은 그걸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예요. 구약성경, 신약성경이 다 팩트다, 사실이다, 장르 파괴하고 다 받아들인다 이런 걸 믿음이라고 하는 게 아니고요.

루터가 이 이야기를 할 때, 이런 공격을 받아요. 의가 자라는 게 아니라고 가르치면 사람들이 실천을 하겠냐고, 믿음의 행동을 하겠냐고, 그냥 구원받는다고 설교를 하면 어떤 교육적 의미가 있겠냐고... 오늘 말씀 마지막 부분에 예수님이 이렇게 여인에게 말씀하시잖아요?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이건 그 여인을 믿고, 그 여인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죄와의 싸움을 하며 살라는 신뢰예요. 정기적으로 율법 교사의 검사를 받아라, 한 달에 한 번씩 나를 찾아와서 검사를 해보자 이런 거 아니거든요. 어떻게 그 여인이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죄를 짓지 않겠어요, 하지만 정죄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의 욕망과, 그것을 용서해주는 주님을 만난 여인은 마음가짐이 좀 달라졌을 거예요. 세상은 내가 죄를 짓고 넘어지길 바라지만, 하나님은 내가 넘어져도 정죄하지 않고 다시 죄를 이길 수 있도록 응원해주시는구나. 그 신뢰에 보답하며 살아야지!

개신교는 그래서 성도가 목회자에게 고해성사를 하지 않죠. 죄와의 싸움은 홀로 하는 것이죠. 다만 그 싸움의 과정 주에 나눌 수 있는 만큼만 공동체 안에서 나눠주시면 되어요. 그리고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더 개발되는 게 아니라는 걸 명백하게 인정해야 해요. 그래서 개신교 목사의 가운은 성화의 과정을 평신도보다 더 많이 밟았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교리와 성경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학문적 훈련을 받았다는 인증의 역할만을 해요. 이신칭의 교리를 엄밀하게 받아들여서 교회 안의 모든 시스템이 재정리되는 게 개신교거든요. 교회에 처음 온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보다 여러분이 더 기도의 능력이 더 높은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목사도 기도의 능력이 커지는 게 아니에요. 그럼 무슨 차이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을 신뢰하는 성숙함에 차이가 있는 거죠. 좀 더 많은 경험 속에서 나의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정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른 거예요. 그런데 교회를 처음 온 사람은 ‘아, 나는 문제가 많지, 자격이 없어, 그래도 예수님이 날 사랑하신다니...’ 이러는데, 교회를 좀 오래 다닌 사람이 말로는 나는 자격이 없어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내가 이 정도는 됐지, 이제는 기도의 힘이 이 정도는 늘어났지...’ 이러면 헛 다닌 게 된다는 말이에요. 아무리 좋게 말해도, ‘개신교인’이라고 하기 어렵죠.

우리는 개신교회입니다. 나의 영적 성장을 믿지 마시고요, 예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을 믿는 개신교회입니다. 처음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나, 목사나, 믿음의 크기는 같아요. 그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을 바라보는 훈련이 익숙하냐 아니냐의 차이겠지요. 혹시나 내 마음에 나의 믿음의 힘을 의지하는 교만이 있었다면, 오늘 이 간음한 여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또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려 몰려든 율법 교사, 서기관, 군중들의 군상을 보며 회개합시다. 손은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 무릎 끓고 얼굴을 들지 못하는 이 여인과 같은 사람을 일으키라고 주신 것이라는 걸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